석촌동은 '백제 리즈 시절' 증언…한성백제판 '대릉원' 연접분의 정체
석촌동 고분군의 항공사진. 북쪽(맨왼쪽)에 근초고왕릉으로 비정되는 3호분이 있고, 1·2·4·5호분 등이 복원되어 있다. 이번 발굴은 1호분 북쪽 공원에 발생한 동공 때문에 시작됐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어, 이거 웬 구멍이야?” 2015년 5월,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사적 243호)을 관리하던 이가 이른바 석촌동 1호분의 북쪽 잔디광장에서 직경 25㎝의 동공을 발견했다. 순간 머리카락이 바싹 섰다. 고분군 밑으로 백제고분로 지하차도가 관통하고 있는데다 그 밑에서는 지하철 9호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도굴 가능성 뿐 아니라 당시 석촌호수 주변에서 심심찮게 나타나던 싱크홀일 수도 있었다.
100m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접분
한성백제박물관 조사팀의 시굴 결과 동공은 지하수 확보를 위해 팠다가 사적공원 지정 후 폐기된 우물터가 함몰되면서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런데 조사과정에서 의미심장한 현상을 목격했다. 관정 벽면에서 인위적인 석축열과 점토성토층이 드러난 것이다. 본격 발굴하자 깜짝 놀랄만한 유구가 드러났다.
땅 표면을 깎아내고 아주 견고하게 다진 흙의 기초 위에 돌무지 무덤(적석총)이 계속 이어지는 ‘연접식 돌무지 무덤’(이하 연접분)이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하나의 큰 돌무지 무덤을 중심으로 한변의 길이가 8~12m인 직사각형 형태의 작은 무덤을 동·서·남쪽으로 계속 확장해서 조성했다.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돌무지 무덤을 계속 이어서 조성한 이른바 연접분이 확인됐다. 모두 16기의 돌무지 무덤이 10기의 연접부로 이어져 있었고, 중간중간에 제사행위를 펼친 것으로 보이는 제의공간이 3곳이나 보였다. 연접분은 기존 석촌동 1호분이라 일컬어진 곳까지 이어져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접분의 폭은 40m, 길이는 100m에 달한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그렇게 시쳇말로 ‘줄줄이’ 이어진 돌무지 무덤은 16기에 달했다. 이러한 작은 돌무지 무덤을 이어주는 연접부 10기가 노출됐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연접 무덤은 기존에 석촌동 1호분(남·북분)으로 일컬어진 곳과, 또 기존에 파괴분으로 알려진 또다른 돌무지 무덤(학계에서는 A호 무덤이라 한다)과도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이번에 확인된 ‘연접분’은 ‘이번 연접분+기존 1호분+기존 A호 무덤’ 등 크기가 100m 가량이나 되는 엄청난 고분이었던 것이다.
연접분의 분포도. 1호와 4호, 7호 묘의 동쪽에 매장의례부가 한 곳씩 조성되어 있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4.3㎏ 인골의 정체는
이 뿐이 아니었다. 몇몇 돌무지 무덤을 연접하여 조성한 뒤 일종의 장례의식을 치른 공간으로 보이는 매장의례부가 3곳 노출됐다. 이 매장의례부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돌무지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최고위층이었음을 알려주는 금장신구와 유리구슬을 비롯해 거의 본래 형태로 복원될 수 있는 토기와 기와, 꺾쇠와 못 등 철제 유물들이 출토됐다. 이중 용도를 알 수 없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토제품도 쏟아졌다.
이것은 양념에 불과했다. 발굴단이 경악한 것은 총 4.3㎏에 달하는 인골이 이 매장의례부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 인골들은 예외없이 잘게 부스러진 파편 상태로 흩어져 출토됐다.
7㎝ 이상의 인골편은 보이지 않았다. 또 절대 다수 인골의 색이 유백색이었다. 이것은 모두 600도 이상의 고온으로 불에 태운 것을 의미한다. 또 동일한 부위의 뼈조각이 여러 점 확인됐다. 유구마다 최소 두 세 사람의 뼈가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강한 화염으로 심하게 뒤틀리거나 서로 달라붙은 기와들도 보였다. 그런데 희한한 대목이 있다.
석촌동 1호분 주변에서 발견된 동공. 폐기된 우물이 함몰되면서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연접분 발굴이 시작됐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정치영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발굴 2팀장은 “매장의례부에서 불에 탄 흙과, 인골 조각, 그리고 고온에 엉겨붙었거나 뒤틀려버린 기와들이 보였지만 정작 그곳에서 직접 불을 피운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불에 탄 인골들을 검토하던 발굴단은 1985~6년 서울대박물관이 석촌동 3호분의 동쪽 지역을 긴급발굴 하던 중에 작은 적석총 밑 부분에서 확인된 이른바 ‘화장유구’를 떠올리고 무릎을 쳤다.
당시 기둥을 박은 흔적들이 열지어 나오고 그곳에서 불에 탄 흙과 목탄, 유백색의 인골편들이 보인 바 있다. 이번 연접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용도 불명의 토제품을 포함해서 토기와 석기, 철기, 장신구 등도 나왔다. 이번 연접분의 출토 양상과 너무도 흡사했지만 1980년대 당시에는 그저 ‘화장유구’라 표현하는 선에서 끝났다. 30여년이 지난 이제와서 심층 자료가 확보되기 시작한 것이다.
연접분 내 1·4·7호묘에서 노출된 매장의례부. 이곳에서 불에 탄 기와와 목탄, 인골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최소 12명이 화장됐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강현숙 동국대 교수(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에 따르면 고구려 고분이 집중된 집안(集安·지안)과 환인(桓仁·환런), 장백(長白·창바이) 등에서 석촌동에서 발굴된 것과 비슷한 ‘연접식 돌무지 무덤’이 상당수 보인다. 시신을 불에 태운 고분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고구려와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서울대 산학협력팀(이준정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하대룡 서울대 인골고고학연구실 연구원)의 분석결과 석촌동에서 출토된 인골 4.3㎏ 중에 이른바 물체질로 걸러낼 정도의 작은 파편이 66%(2.6㎏)에 이르렀다. 또 출토 인골로 추정해보니 12명 혹은 16명 정도가 3곳의 매장의례 공간에 존재했던 것으로 분석됐다.
매장의례부에서는 이와같이 아주 잘게 부숴진 인골들이 나왔다. 3곳에서 총 4.3㎏이 수습됐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일반적으로 성인 한사람을 화장한 뒤에 남는 인골의 무게는 1.0~3.6㎏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매장의례부’에 최소 12명분의 인골이라면 12~43.2㎏ 정도가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수습된 잔존 인골의 양(4.3㎏)은 12명분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적은 양이다. 따라서 서울대 산학협력단은 “인골을 불에 태워 대형 뼈조각 위주로 습골한 뒤 다른 특정한 곳에 안장하고 작은 파편들은 불에 탄 흙과 목탄, 기와 등과 함께 매장의례 공간에 매납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정치영 팀장은 “(불에 탄 기와로 미루어볼 때) 시신은 아마도 기와를 사용한 목조 구조물에서 화장한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한성백제기 왕실의 장례법을 일러주는 자료인 것이다.
1호 매장의례부에서 물체질로 걸러낸 인골의 파편들. 700g의 인골 중 절대다수가 1㎝ 미만의 유백색 파편이었다. 완전 연소되었음을 알려준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99%가 훼손된 한성백제판 대릉원
이쯤에서 뜬금없지만 ‘타임’을 걸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석촌동 고분이 과연 어떤 곳인가.
괜히 마을 이름이 ‘돌(石)의 마을(村)’이라고 해서 ‘석촌동’이었겠는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정밀조사(1919~1920년) 결과 석촌동을 중심으로 방이동·가락동 일대까지 무려 293기의 백제 돌무지 무덤(적석총)이 흩어져 있었다. 백제 역사(678년) 중 4분의 3에 가까운 493년(기원전 18~기원후 475)간 백제를 다스린 임금들이 묻힌 공간이다. 특히 근초고왕(재위 346~375)과 근구수왕(375~384), 침류왕(384~385) 등 백제 최전성기를 이끈 임금들이 이곳에 무덤을 썼을 것이다. 신라 경주의 대릉원에 비견되는 한성백제의 ‘왕릉지구’ 위상을 갖춘 곳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연접분의 매장의례부에서 확인된 용도미상의 토제품들. 이와 비슷한 토제품이 1980년대 중반 3호분 동편 고분군에서도 인골과 함께 출토됐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이곳은 293기의 고분을 확인하고도 그대로 훼손·방치되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과, 그 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도시화 와중에 유구가 99% 이상 사라지는 참화를 겪고 말았다. 석촌동 3호분을 관통하는 도로를 건설하려다가 한 고고학자(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의 동분서주로 겨우 고분 밑 지하도로(백제고분로)로 설계변경된 사례가 석촌동 고분의 수난사를 상징한다. 이 교수의 보존운동이 결실을 맺어 1985년 석촌동 고분군의 사적 지정면적을 기존 1513평에서 1만7000평으로 확대하는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
확인된 연접분 기존의 1호분 및 A호 고분과도 연접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지금 석촌동 고분군 중 5기의 고분만이 유적공원 내에 복원되어 있다. 하지만 이중 한변의 길이가 50m가 넘는 3호분(동서 50.8m, 남북 48.4m)이 근초고왕릉으로 비정(比定)되고 있을 뿐이다. 한 변의 길이가 고구려 광개토대왕(391~412)이나 장수왕(413~491)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장군총(35.6m)보다 훨씬 크다는 점에서 백제 최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최진석 학예연구사는 “또 1984년 3호분 발굴조사에서 금으로 만든 영락, 옥연석(연마한 옥) 등과 함께 출토된 청자반구병의 연대가 4세기 후엽(중국 동진)으로 편년됐다”고 밝혔다. “372년(근초고왕 27년) 동진에 사신을 보내 교류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석촌동 가랑동 방이동 일대에는 293기의 백제고분이 존재했다고 한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눈감고 코끼리 만지듯
하지만 석촌동 고분들이 윗부분이 심하게 깎이고, 훼손되는 바람에 무덤 주인공이 묻힌 공간인 매장주체부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예컨대 계단식 적석총인 3호분은 도로개설과 가옥축조 등으로 윗부분이 상당부분 파괴되었다. 다른 1·2·4·5호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번에 조사된 ‘연접분’ 16기 역시 무덤 윗부분이 깎여 있었던 탓에 매장주체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무덤의 구조와 성격, 그리고 주인공의 정체 등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니 ‘눈감고 코끼리 만지듯’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번에 전혀 새로운 개념의 ‘연접분’이 나오고, 매장의례 공간 내에서 무수한 인골 파편이 쏟아지는 등 나름대로 획기적인 발굴성과를 얻어냈다. 하지만 기존 자료가 부실하다보니 여전히 수수께끼 투성이다. 쾌도난마, 명쾌한 해석도 좋지만 자칫 앞으로의 발굴에서 전혀 새로운 조사결과가 나올 수 있다. 잘못 입을 놀려 단정했다가 망신 당할 수 있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석촌동 1호분의 모습. 그 당시에도 윗부분이 상당부분 훼손되었지만 해방 후에도 파괴가 계속됐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그냥 던져보는 궁금증들
그냥 지금까지의 발굴성과를 토대로 몇가지 궁금증을 던져보는 수밖에 없다. 우선 최근 몇 년 간의 발굴성과인 ‘연접분’은 과연 여기서만 나올까. 기존에 1호분(남북분)과 A호 고분까지 연접된 것을 확인했다면 어떨까. 기존의 2·3·4·5호분도 실은 연접분일 가능성은 없을까. 근초고왕릉으로 비정되는 3호분의 동쪽 고분군은 어떨까. 이미 조사된 고분 내 유구들은 어떨까.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하는 것’ 아닐까.
매장의례 공간에서 아주 작은 뼈조각이 되어 나타는 백제인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무덤 주인공이 남긴 화장 유골 중 일부일까, 아니면 무덤조성 후 희생양이 된 순장자의 뼈조각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완전 소각되어 가루와 같은 뼈조각으로 남았을까. 384년(침류왕 1년) 도입된 불교의 상장의례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궁금증은 계속 이어진다. 백제왕과 왕족의 무덤이 분명한 석촌동 고분군에서 왜 이처럼 무덤을 계속 이어 조성했을까. 문득 고구려 간첩 도림의 꾐에 빠져 궁실과 성곽을 화려하게 고치고 “맨 땅에 임시로 매장돼있는 선왕의 해골을 잘 수습해서 욱리하(한강)에서 채취한 큰 돌로 만든 덧널 안에 묻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개로왕대의 기사(475년)가 눈에 밟힌다. 개로왕대에 이뤄진 대대적인 토목공사의 하나로 선왕들 유골을 모아 이곳 석촌동 고분에 잘 묻어주고 제사를 지낸게 아닐까. 그러나 발굴된 유물과 유구의 연대가 4세기 후반으로 편년된다는 약점이 있다. 그냥 4세기 후반 어느 임금의 시기에 차례차례 무덤을 이어나갔다고 볼 수도 있다.
연접분의 매장 의례부에서 확인된 금제 귀고리 1쌍과 달개 장식 4점. 유리구슬도 70여점 출토됐다. 무덤주인공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다.|한성백제박물관 제공 |
모자이크 맞추듯
모든 것이 수수께끼 투성이다. 발굴을 담당하는 정치영 팀장은 “99% 훼손·파괴되어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모자이크를 하나하나 맞춰가는 느낌”이라고 밝힌다. 임영진 마한연구원장은 “예컨대 1980년대 서울대박물관의 발굴도 지하로 관통하는 백제고분로의 기둥을 박는 부분에서만 긴급히 이뤄졌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국사학과)는 “석촌동 고분군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는 지금의 영역이 너무 좁다”면서 “낮게 기초를 판 주변 주택이나 연립주택 단지의 땅 밑에도 고분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짙다”고 밝혔다.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국사학과)는 “발굴 영역을 좀더 넓혀 고분군의 성격을 하나하나 파악해내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는 “축소 복원된 3호분도 고구려 장군총(7단)만큼 재조정해야 하고, (1980년대 화장유구가 노출됐다는) 3호분 동쪽 고분군 유적도 재평가하고 재발굴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근초고왕릉으로 비정되는 석촌동 3호분의 모습. 제2롯데월드 건물이 마치 근초고왕릉의 구조물처럼 어우러져 보인다. 3호분은 한변의 길이가 50m가 넘는 초대형 고분이다. 고구려 장군총보다도 규모가 크다. |
백제의 ‘리즈’ 시절을 이끈 왕들의 자취
석촌동 고분군이 어떤 곳인가.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과 그 후예들의 ‘사후 공간’이었다. 태자(근구수왕)와 함께 고구려군을 참패시키고(369년) 황제의 깃발을 의미하는 황색깃발을 휘날리며 대대적인 열병식을 열었고, 2년 뒤(327년)에는 급기야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 원정에 나서 고구려 고국원왕까지 죽인 근초고왕이다. <송서>와 <양직공도> 등 중국 사서에 ‘요서경략’ 기사가 등장하고 <양서>에는 “요서에 근거를 둔 백제가 근구수왕, 전지왕(405~420), 비유왕(427~455)이 백성을 파견했다”는 대목까지 보인다. 이 기록을 부인하는 학자들도 많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최치원(857~?)이 당나라 문하시중(태사)에게 올린 편지의 내용 역시 심상치 않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었습니다.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했고, 북으로는 연·제·노의 지역을 어지럽혀…”(<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최치원은 “전성기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대륙을 괴롭혔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뿐인가. 근초고왕은 가야연맹의 7개 소국을 정벌하고 남쪽으로는 침미다례(전남 해안)를 무찔러 비리 등 4읍의 항복을 받아냈다.
369년(근초고왕 24년) 무렵에는 왜왕에 칠지도를 하사했으며, 박사 고흥을 시켜 역사서 <서기(書記)>를 편찬하도록 했다. 시쳇말로 석촌동 고분군의 주인공들이 ‘백제의 리즈’ 시절을 구가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 이 순간도 그 전성기의 백제를 증거할 석촌동 고분군은 그저 수수께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지금 한성백제박물관은 최근 6년간의 발굴결과 출토된 석촌동 고분 관련 유물들을 소개하는 특별전 ‘백제왕도 발굴조사 성과전, 왕성과 왕릉’을 열고 있다. 한번 가서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시기 바란다.
<참고자료>
한성백제박물관, <서울 석촌동 고분군-1호분 북쪽 연접 적석총 상·하>(한성백제박물관 유적조사보고 6), 2019
정치영, ‘백제 한성기 왕실묘역 돌무지 무덤에 묻힌 화장 인골들의 증언’, <한국고고학저널>, 국립문화재연구소, 2019
강현숙, ‘고구려 고분 연구-편년과 분포를 중심으로’, 서울대학원 박사논문, 2000
하대룡·이준정, ‘서울 석촌동 고분군 적석총 출토 화장인골에 대하여’ <서울 석촌동 고분군-1호분 연접적석총 하>(한국백제박물관 유적조사보고 6), 한성백제박물관, 2019
이병호, ‘일제강점기 백제 고지에 대한 고적조사보고사업’, <한국고대사연구> 61, 한국고대사학회, 2011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