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밉지않은 관종언니’ 가수 이지혜가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까지
가수 이지혜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 기회를 잡기까지 그가 걸어온 지난 23년은 지금의 행복에 누가 될까 말하기 겁이 날 정도다. 우쥬록스 제공 |
관심 종자, 줄여서 ‘관종’. 언뜻 호감 가지 않는 이 단어를 가수 이지혜(40)와 나란히 놓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지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밉지않은 관종언니>는 지난해 8월 첫 선을 보인 이후 7개월 만에 구독자 20만명을 넘겼다. 채널의 주된 주제는 일상이다. 남편인 문재완씨와 딸 태리양이 함께 출연한다. 가식없이 재치 넘치는 입담으로 육아의 고충을 털어놓고, ‘코인 노래방 라이브’를 통해 녹슬지 않은 노래 실력을 뽐내기도 한다.
“인생도 그렇고, 돈을 버는 것도 그렇고. 저는 정말 ‘업 앤 다운’이 너무 심해서 10년 후 제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를 늘 고민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터지는 이웃집 언니 같지만, 지나온 23년 세월이 마냥 장밋빛이 아니란 건 모두가 안다. 1998년 그룹 샵으로 데뷔한 이후 2002년 해체까지, 그가 겪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놓는 것조차 지금의 행복에 누가 될까 겁이 날 정도다.
최근 트로트 가수란 새로운 도전도 시작했다. 곡명은 ‘긴가민가’. 여느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지혜를 지난 21일 전화로 만났다. 달리는 차 안, 수화기 너머로 오고 간 대화였지만 오랜 시간 쌓인 이지혜의 내공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오해와 편견에 지지 않는 법
이지혜, 딸 문태리양, 남편 문재완씨(왼쪽부터). <밉지 않은 관종언니> 란 유튜브 채널 이름은 절친한 예능인 김신영과 <정오의 희망곡> 작가가 지어줬다. 그는 “마음에 쏙 드는 이름”이라고 했다. 유튜브 캡쳐 |
‘연예인도 사람’이란 인식이 지금보다 더 부족하던 2000년대 초반. 특히 20대를 막 넘긴 여성 연예인에게 세상은 가혹했다. 이지혜가 고등학생이던 어린 나이에 데뷔했고, 그룹 내 따돌림 피해자였다는 사실은 언론과 대중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2005년 솔로로 데뷔한 뒤엔 음악 이야기가 아닌 성형설 해명부터 해야했다.
2006년 발표한 솔로곡 ‘러브 미 러브 미(LOVE ME LOVE ME)’가 1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유튜브를 통해 재조명 받는 것도, 음악적 재능보다는 가십에 집중했던 당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솔로 활동 이후 2년의 공백기는 생활고는 물론 탈모·불안장애에 시달리게 했다.
특히 힘들었던 건 이유조차 알기 힘든 선입견이었다. “댓글을 꼼꼼히 살피는 편이에요. 의미없는 악플 같은 건 자세히 보지 않지만, 대부분 처음엔 저를 비호감이라고 생각했대요. 정말 별로다.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걸 어떻게 설명을 하겠어요.” 혹시 오해와 편견에 의해 주눅이 들진 않았을까. 단호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힘들긴 했지만 주눅들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를 믿었거든요.”
그런 믿음이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주변에 오래된 친구들이 많아요.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건 제가 그들을 사랑할 줄 알고 깊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거잖아요. 결국 나를 알게 되는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게 될 거다. 그러니 나는 진국이다. 이렇게 믿고 버텼어요.”
오히려 그를 답답하게 만든 건 스스로를 내보일 자리조차 없는 현실이었다. “연예인이란 직업이 참 어려워요. 기회를 먼저 주는 게 방송국이냐, 아니면 어디선가 먼저 두각을 드러내야 하는 것인가. 이 부분이 제일 헷갈렸어요. 저는 가수잖아요. 솔로활동이 잘 됐으면 큰 문제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인기와 관심이 떨어지니까 계속 갈 곳을 잃는 것 같더라고요. ‘저 사람은 가수인데 무슨 예능이야?’ 이런 얘길 들을까봐 저 스스로도 몸을 사리기도 했어요. 이런 생각을 떨치는 데 시간이 참 오래 걸렸죠.”
라디오, 이지혜의 날개가 되다
이지혜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누군가라도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다. 우쥬록스 제공 |
이지혜에게 ‘작은’ 자리가 생겼다. 평소 친분이 있던 예능인 김신영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정오의 희망곡>에 토요일마다 고정 출연하게 된 것이다.
자리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라도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야겠다, 나를 보고 기분 좋게 만들어야겠다. 왠지 차가울 것 같고, 이기적일 것 같고. 목소리도 좀 쏘는 톤이라서 얄미운 이미지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그걸 깨보려 더 열심히 했어요.”
라디오는 그렇게 이지혜의 작은 무대가 됐다. “내가 잘할 수 있다는 걸 아는데 길은 열리지 않으니까. 당시엔 정말 막막하고 두려웠어요. 그래서 특히 <정오의 희망곡>이 고마웠죠.” 노력한 만큼 그의 공간도 점차 넓어졌다. 2016년 무렵부터 MBC <복면가왕> <라디오스타>, KBS <해피투게더> 등 예능 섭외가 들어온 것은 물론 2018년 <오후의 발견 이지혜입니다>를 통해 정식 라디오 DJ로 데뷔했다.
“라디오 DJ란 꿈이 이뤄지니 다른 일도 잘 풀리기 시작했어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것도 마음에 안정을 줬어요.” 새로운 기회도 주어졌다. 시사교양 프로그램 KBS 2TV <거리의 만찬>이었다. “아기를 낳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저에게 정말 꼭 같이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라디오를 듣다가 ‘이 사람이다’ 했대요. 공감을 잘 하면서도 재치있게 이야기를 툭툭 던지는 모습을 보고요. 박미선 언니와 김지윤 박사님 사이에서 진지하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은 감초 역할이 필요했다고 하셨어요.”
‘거리의 만찬’으로 변곡점을 돌기까지
KBS 2TV <거리의 만찬> 의 한 장면. ‘연예인도 사람’이란 인식이 지금보다 더 부족하던 2000년대 초반. 이지혜는 솔로로 데뷔한 뒤엔 음악 이야기가 아닌 성형설 해명부터 해야했다. KBS 제공 |
<거리의 만찬>은 이지혜가 이전까지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그럼에도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스스로도 몰랐던 장기도 발견했다. “<거리의 만찬>을 하면서 좋았던 건, 듣기만 해도 된다는 것이었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 사람들 정말 힘들었겠다. 제가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란 걸 깨닫는 계기가 됐어요. 예능 프로그램에선 내 것 하기 바빠 남의 말을 못 들었거든요. 사실 듣기만 하고 웃기지 않으면 다신 불러주지 않죠.”
때론 진지했고, 가끔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제겐 참 영광스러운 프로그램이에요. 그 전까진 TV에 나와 힘들다고 말하거나 고충을 토로하는 게 제 역할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아는 것에 대해 말을 하거나 가르치는 것 역시 제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건 저보다 더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여겼어요.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제 또 다른 모습도 보여드릴 수 있었어요.”
그런 <거리의 만찬>이 이달 초 화제의 중심에 섰다. 갑작스러운 시즌1 종료와 함께 들려온 MC 교체 소식 때문이었다. 하차가 아쉽지 않은지 조심스레 물었다. “제 역할은 상황이 처했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만 생각했을 땐 섭섭하고 서운하죠. 하지만 프로그램 하다가 갑자기 나오지 말라고 하는 경우를 많이 겪어서 그런지.(웃음) 며칠간 생각이 많아졌지만, 금방 털어버렸어요.”
다시 태어나도 ‘연예인 이지혜’
지난해 12월 남편과 함께 유튜브 수익금 전액을 보육원에 기부했다. 그는 “감사함을 잊지 않고 즐거움을 유지하는 것이 꿈”이라 말했다. 우쥬록스 제공 |
이지혜는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과거 공백기의 두려움을 생각하면 지금은 천국”이라며 웃을 여유도 생겼다. TV에서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유튜브 채널을 통해 팬들과 소통할 수 있다. “관심 받고 사랑 받고 싶은” 마음도 더는 숨기지 않는다. “사람의 본능 같아요. 그래서 ‘관종언니’란 별명이 마음에 들어요.”
그를 멘토로 삼는 팬이 늘어나면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도 커졌다. “한때 굉장한 착각에 빠져있었어요. 연예인이란 존재는 남들과 다르게 도도하게 포장되어 있어야 하고.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사는 거라 생각했던 시절이요. 이제와서 보니 연예인도 똑같은 사람이고 하는 일만 다를 뿐이지 우월하거나 잘난 존재가 아니었어요. 그럼 내 역할이 뭘까. 상대를 웃게 해주는 게 참 좋으니까, 이 역할에 충실해야겠다 싶어요.”
‘다시 태어나도 연예인이 되고 싶냐’는 다소 진부한 질문을 던졌다. 잠시 고민하는 듯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답이 돌아왔다. “기회가 된다면 안 할 이유는 없어요. 재능이 있다면 그걸 보여주며 사는 것도 행복이니까요. 딸에게도 말해주고 싶어요. 삶에서 직업이든 뭐든 선택할 때 행복을 기준으로 선택하면 좋겠다. 이왕이면 행복한 일이 네가 잘 하는 것이면 더 더욱 좋겠지. 돈이 연결되면 더 좋고.(웃음)”
그는 지난해 12월 남편과 함께 유튜브 수익금 전액을 보육원에 기부했다. “저는 마흔이 되면서 원하던 걸 다 이뤘어요. 사람이 갖고 싶은 걸 가지게 되면 그 행복을 유지하는 게 힘들다고 하잖아요. 감사함을 잊지 않고 즐거움을 유지하는 것, 그게 제 남은 꿈이에요. 제가 즐거워야 저를 보시는 분들도 즐겁지 않을까요.”
진지한 대답 뒤 미간을 찡그리며 웃는 얼굴이 그려지는, 쾌활하면서도 쨍쨍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참, 뭐든 닥치는대로 다 하는 만능엔터테이너로 소개해주세요. 고급진 표현은 사양합니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