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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고소·구수 ‘백반 3총사’…여기 있던 밥 한 공기 “으딜 갔다냐”

고흥 오일장


꽃게만큼 맛있는 돌게장 백반

겨울 방어보다 한 수 위인 삼치

외나로도서 구이·커틀릿으로

과역면 버스터미널 냉동 삼겹살

얇게 썬 고기·기름에 구운 김치


다 익을 무렵 수확하는 토마토

아린 맛 적은 토종 마늘도 눈길

입맛 돋우는 채소·음식 넘쳐나

경향신문

해산물이 풍부한 고흥은 겨울에 특히 맛있는 고장이다. 녹동항에서 파는 돌게장 백반(왼쪽)은 밥을 계속 부르고 나로도항에 흔한 삼치(가운데)는 부드럽고 고소한 살맛이 일품이다. 식당에 혼자 가서 삼겹살 백반(오른쪽)을 시켜먹을 수 있는 것도 고흥의 매력이다.

따듯한 남쪽 오일장 중에서 고흥을 골랐다. 20년 동안 고흥은 열댓 번 정도 간 듯싶다. 초반에는 유자 때문에, 중반에는 석류 때문에 갔었다. 여행이 아닌 출장이라 고흥읍과 유자 공원만 둘러보고는 대부분 다른 업무를 보러 보성으로 해남으로 갔다. 바쁘게 움직여야 하기에 기억 속에 고흥은 12월과 유자밖에 없었다.


5년 전쯤 여행작가와 고흥을 동행 취재하며 고흥이 가진 매력에 푹 빠졌다. 이번엔 1박2일 오롯이 고흥 구석구석을 다녔다. 벌교와 고흥 초입에서 직진하면 녹동항이 나온다. 일정이 바쁘다는 이유로 항상 직진이었지만 이번에는 좌회전도 하고, 우회전도 했다. 그렇게 하니 고흥의 숨은 속살이 보였다.

가지에서 익은 토마토

서울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해 오전 8시가 좀 넘어 고흥읍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려고 장터 주변을 도는데 사람이 없다. 잠시 생각해 보니 며칠 전이 설날이었다. 설 대목장 이후로 보름 정도 지나야 장이 제대로 서는데 깜빡 잊었다. 오일장뿐 아니라 백화점도 온라인쇼핑몰도 명절 후 보름 정도 지나야 평소 매출을 회복한다. 사람도 물건도 없는 장터를 잠시 걸었다. 다른 장터와 다른 특이한 점이 있었다. 생선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고흥 시장에는 곳곳에 숯불에 생선 굽는 집들이 여럿 모여 있다. 가자미, 민어, 삼치 등 종류도 다양했다. 제사상이나 잔칫상에 구운 생선 올리는 것이 고흥 지방의 특색이라고 한다. 반건조한 생선 파는 곳은 어디든 있어도 생선 구워서 파는 곳은 가본 곳 중에서 유일했다.


고흥 가는 목적에 오일장도 있었지만 맛있는 토마토농장 방문도 있었다. 겨울에도 제주를 비롯해 남해, 하동, 고성, 진도, 해남을 포함한 남쪽 지방에서 웬만한 채소가 난다. 한여름 토마토는 춘천을 비롯해 화천에서 많이 생산한다. 화천은 매해 여름 토마토 축제까지 여는 도시다. 겨울 토마토는 고흥을 비롯한 남쪽 지방에서 난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토마토는 크게 유럽계와 동양계 두 가지다. 예전에는 생식용으로 먹는 동양계를 주로 생산했지만 근래에는 유럽계 토마토 생산이 많아졌다. 유럽계는 껍질이 단단해 다단계 유통에 적합한 품종이다. 단단하기에 쉬이 물러지지 않는다. 물러지지 않은 것이 최선이고 맛은 그다음이다. 그런데 아무리 단단한 유럽계 토마토라도 익은 상태에서 유통하면 판매 기간이 짧아진다. 그런 까닭에 익기 시작할 무렵부터 수확한다. 파란빛이 도는 토마토는 유통 단계를 거치는 동안 붉은빛으로 물든다. 색만 바뀌는 것이라 가지에서 제대로 익은 것과는 맛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고흥의 ‘어설픈 농부이야기’(070-4234-0909)는 여느 토마토 농가와 다르게 토마토를 재배하는 곳이다. 다르다는 게 별거 없다. 품종을 떠나 토마토가 줄기에서 충분히 익었을 때 수확한다. 그렇게 하면 방금 따더라도 꼭지가 말라 있다. 꼭지 마른 것은 오래 묵은 토마토라 신선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설익은 토마토만 본 이들이 하는 말이니 맹신할 필요가 없다. 꼭지가 싱싱해서 좋은 것은 아마도 딸기 정도 아닐까 싶다. 줄기에서 익은 토마토는 제철처럼 맛있었다. 차지게 씹히는 과육과 풍성한 과즙에는 향긋함이 가득했다. 수확해서 익힌 토마토 맛과 줄기에서 잘 익은 토마토의 맛은 다르다. 글로 설명하기 힘들다. 직접 맛을 봐야 한다. 이 토마토를 맛본 뒤 아는 셰프한테 농장을 소개했더니 바로 메뉴에 사용하고 있다.

마늘 맛있게 먹는 법

농장에서 녹동항 가는 길 주변 밭이 파랗다. 예전에는 시금치도 있었는데 찾아보기 어렵고 요즘은 전부 다 마늘밭이다. 겨울 초입에 파종한 마늘은 여름 초입에 거둔다. 거두는 시기에 따라 조생종(난지형)과 만생종(한지형)으로 나뉜다. 조생종은 주로 중국과 스페인 품종이고 만생종은 주로 재래종이다. 예전에는 조생종이 재래종보다 저장성이 떨어졌지만 근래에는 별 차이가 없다. 서산, 태안, 단양, 의성은 마늘로 이름난 지역이다. 고흥에서 나는 마늘도 앞서 언급한 지역만큼이나 맛이 뛰어나다. 따듯한 지역답게 조생종 마늘 재배가 많지만 고흥 재래종과 개량종도 많이 난다. 재래종은 수입종이나 중국산 마늘에 비해 아린 맛이 적다. 생마늘은 채 썰어 고기와 쌈을 쌀 때 진가를 발휘한다. 굳이 구워서 아린 맛을 없앨 필요가 없다. 마늘 이야기 하는 김에 한 가지 더. 다진 마늘을 구입해 사용하면 껍질을 까거나 다질 필요가 없어 편하다. 하나 다진 마늘은 마늘을 가장 편하게 먹는 방법이면서 가장 맛없게 먹는 방법이다. 마늘은 다지면 금세 색이 갈색으로 변한다. 슈퍼마켓에 있는 다진 마늘 색은 방금 다진 것처럼 색이 밝다. 구연산과 냉장 보관으로 변색이 천천히 되도록 했다. 색이 변하는 것은 지연시킬 수 있어도 마늘이 가진 특유의 향은 다지는 순간부터 공중으로 날아간다. 향이 없는 식재료가 맛있을 수는 없다.


오일장이 서지 않았지만 수산시장은 괜찮을까 싶어 녹동항 어시장으로 갔다. 역시 설 대목 이후라 사람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장 구경을 서둘러 끝내고 밥을 먹었다. 녹동항을 가면 항상 장어탕을 한 그릇 했다. 바닷장어인 붕장어를 된장 넣은 육수에 끓인 뚝배기 한 그릇에 출장의 피곤이 단박에 풀리곤 했다. 사실 여름 보양음식으로 장어를 많이 찾는데 붕장어가 가장 맛있는 시기는 겨울철이다. 붕장어는 4월과 5월 사이에 산란한다고 알려져 있다. 물고기는 산란을 준비하는 시기가 가장 맛있다. 초여름의 붕장어는 산란 직후라 겨울철보다 맛이 떨어진다. 평소처럼 장어탕을 할까 하다가 돌게장 백반으로 정했다. 돌게 혹은 박하지로 부르는 게는 사실 ‘민꽃게’다. 민꽃게는 꽃게보다 껍질이 단단하고 살은 적다. 다만 꽃게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맛도 떨어지지 않아 게장 담는 용도로 쓰임새가 좋다. 게장 백반을 주문하니 이내 상이 차려진다. 몇 가지 반찬과 간장게장, 게무침이 상에 놓였다. 달고 짠 맛으로 먹는 간장게장은 배불러도 밥이 들어가는 마력을 지닌 반찬이다. 같이 나온 시금치며, 말린 장대 찐 것 등 반찬은 숫자는 적지만 하나하나 맛이 좋다. 돌게장 백반(061-844-9090).

경향신문

고흥 오일장에서 숯불로 구워 파는 민어(위). 빨갛게 익은 뒤에야 수확하는 고흥 토마토(가운데). 설 대목 지나고 한가한 고흥 오일장(아래).

삼치 생선가스 씹는 맛

녹동항에서 고흥읍 방향으로 30여분 직진하면 바로 고속도로가 나온다. 직진 대신 오른쪽의 77번 국도 따라 외나로도로 향하면 시간은 조금 더 걸려도 아름다운 풍광을 만난다. 오른쪽에는 드넓은 푸른 바다와 아기자기한 섬이, 왼쪽엔 나지막한 산과 넓은 들판이 50㎞ 넘게 이어진다. 작은 포구 어디든 인생샷 포인트가 된다. 운전하는 오른발의 힘을 뺄수록 풍경이 편하게 다가오는 길이다. 대한민국 10대 아름다운 길이 있다고 하는데 내 기준으로 여기가 1등이다. 특히 나로우주센터 전망대에서 여수 넘어가는 팔영대교까지 해안길이 가장 마음에 든다.


녹동항에서 45㎞쯤 가면 외나로도 항구가 나온다. 주변 섬으로 가는 여객터미널 주변으로 삼치회를 파는 식당 몇 곳이 모여 있다. 필자 입맛에는 겨울엔 방어보다 삼치가 한 수 위다. 작년 겨울에 쓴 해남 오일장 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삼치가 최고다. 이번 겨울에는 삼치회 대신 구이와 생선가스를 주문했다. 생선구이 전문점에서 나오는 작은 삼치 한 마리 대신 한 토막이 나온다. 한 토막의 살이 한 마리보다 먹을 게 많다. 대형 할인점에서 40~50㎝ 크기의 삼치를 한 마리 단위로 팔기도 한다. 같이 파는 고등어나 조기 등 다른 생선에 비해 크기가 커 보여도 삼치 새끼다. 적어도 80㎝는 넘어야 제대로 된 삼치 살 맛을 볼 수 있다. 구운 삼치 한 토막은 양도 많지만 부드럽고 고소한 살 맛이 어느 생선도 흉내 낼 수 없다. 부산과 일본 사이에 대마도가 있다. 대마도에서 후쿠오카 가는 길에 이키섬이 있다. 이키섬 특산 음식 중에서 삼치 샤부샤부가 있다. 얇게 포를 뜬 삼치를 살짝 데쳐 양념 소스에 찍어 먹는다. 삼치의 고소한 맛이 좋았거니와 회 말고도 다른 방식으로 먹는 게 신선했다.


5년 전에 왔을 때 나로도항 주변 식당에서는 삼치회만 팔았는데 지금은 생선가스와 어탕국수도 팔고 있었다. 서울식당(061-835-5111)의 삼치로 만든 생선가스(메뉴에는 삼치 커틀릿)는 씹는 맛이 좋았다. 살집 좋은 삼치는 대구나 명태 살을 적당한 두께로 썰어 튀긴 것과는 식감이 전혀 달랐다. 한 번은 먹어야 할 음식이다. 갓김치는 한 번 더 달라고 했다. 나로도에서 삼치회를 먹으면 더 맛있게 느꼈던 것도 톡 쏘는 갓김치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혼고기’ 하기 좋은 동네

고흥군 과역면에는 두 가지 유명한 것이 있다. 하나는 커피농장이고, 나머지는 삼겹살 백반이다. 국내 최대 커피농장 주변으로 카페와 바리스타 교육장이 있다. 카페에서는 고흥에서 재배한 커피만 사용한다. 과역면 버스터미널 주변으로는 백반집이 여럿 있다. 기사식당이든 일반 식당이든 주종목은 삼겹살 백반이다. 삼겹살 백반을 시키면 불판 위에 냉동 삼겹살이 나온다. 메뉴가 하나라 선택의 고민이 없다. 식당에 들어서면 인원수만 확인하고 일사천리로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삼겹살을 올린다. 반찬이 깔리는 사이 얇게 썬 냉동 삼겹살이 익기 시작한다. 잘 익은 김치를 삼겹살에서 나온 기름에 굽는다. 얼추 삼겹살과 김치가 익으면 먹을 준비 끝이다. 고기를 상추에 싸 몇 번 먹다보면 밥 한 공기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손님들 오가는 말속에 친분이 가득하다. 동네 사람들 오가는 편한 식당이다. 동네 맛집이라는 게 동네 사람들 편하게 가는 식당이라는 의미다. 혼자 고기 구워먹기 힘든 곳이 우리나라다. 고흥만큼은 눈치 안 보고 편하게 고기와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 보성식당(061-833-9381).


고흥장은 4·9일에 열리고 과역장은 5·10일에 열린다. 고흥장을 제대로 못 봤기에 다음날 과역장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갔지만 역시나였다. 사람 없는 장터에서 며느리에서 며느리로 이어진 팥죽을 한 그릇 할까 하다가 잠시 다른 구경을 하는 사이에 팥죽집이 문을 닫아버렸다. 일이라는 게 해야 할 타이밍에 하지 않으면 남는 것은 후회다. 여행에서 후회는 다시금 가야 할 핑곗거리가 된다. 오일장을 제대로 못 봐서, 먹어야 할 팥죽을 못 먹어서 후회가 가득하다. 기온이 올라가고 내려감에 따라 오일장 취재지를 결정한다. 꽃길 따라 올라갔다가 단풍 따라 내려온다. 가을 단풍이 땅으로 내려앉을 때 다시 한번 고흥에 갈 생각이다.


김진영 식품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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