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에 반하고, 바다맛에 취하다…충남 보령 ‘맛있는 포구’
서해 낙조 보며 제철 해산물 즐긴다
충남 보령 오천항은 전국에서 제일가는 키조개 산지다. 오천항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 잡은 충청수영성에선 서쪽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낙조도 감상할 수 있다. |
겨울 포구는 ‘먹방 여행’에 제격이다. 육지 것들이 추위로 얼어붙을 때도 바다는 제 안에 품은 것을 넉넉히 풀어낸다.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남짓 달리면 닿는 충남 보령은 제철 먹거리를 즐기러 훌쩍 떠나기에 부담이 없다. 천수만을 따라 늘어선 보령의 포구들에선 겨우내 맛있는 냄새가 진동한다. 제철 해산물을 즐기며 바라보는 서해 낙조의 아름다움은 흔치 않은 여행의 덤이다.
굴구이의 원조 천북
굴구이(왼쪽)와 굴찜 |
굴 하면 통영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보령시 천북면도 굴이라면 빠지지 않는 고장이다. 천북면과 맞은편 안면도를 사이에 끼고 길게 펼쳐진 천수만은 예로부터 자연산 굴이 지천에서 자랐고 굴양식도 잘됐다. 겨울철 포장마차에 가면 ‘천북굴’이라 써놓고 비싼 값을 받았을 정도로 유명했다. 천북굴이 전국에 이름을 알린 건 굴구이 때문인데 생굴이나 찜이 아닌 구이요리로 굴을 즐긴 건 천북이 처음이다.
시작은 우연에 가깝다. 굴양식을 하던 어민들이 작업하던 바지선 위에서 추위와 허기를 달래기 위해 깡통불에 굴을 껍데기째 하나씩 구워 먹었는데 그 맛이 기막혔다. 이 정도면 팔아도 되겠다 싶어 굴구이를 메뉴로 내는 집이 장은리 해변가에 서너 집 생겼다.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장사가 잘되자 굴구이집이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아예 천북 굴단지를 형성하게 됐고 겨울이면 관광객들이 몰리는 지역 명소가 됐다. 굴단지를 처음부터 지켜온 ‘갯마을’ 사장 박해숙씨(55)는 “1994년 12월부터 굴구이를 팔기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지면서 굴단지가 유명해졌다. 택배가 없던 시절에 강원도에서까지 상인들이 굴을 사러 올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굴칼국수(왼쪽)와 돌솥영양굴밥 |
박씨의 남편 이주우씨(59)는 천북면 어촌계장과 굴단지 상인회장을 겸하고 있다. 이씨는 수산고를 나와 통영에서 15년간 굴양식을 배웠고, 굴로 고향을 일으켜보겠다고 1988년 보령에 정착했다. 처음 5㏊ 규모로 시작한 굴양식은 이제 두 배 규모가 됐다. 전체 70개가 넘는 굴단지 가게 중에 굴양식을 겸하는 집은 6곳 정도다. 천북굴의 특징을 묻자, 이씨는 “천수만에 담수가 많이 내려와서 바닷물의 염도가 낮다. 물이 짜면 굴도 씁쓸한 맛이 나는데 짜거나 쓴맛 없이 은은한 단맛이 나는 게 천북굴의 장점”이라고 답했다.
굴단지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메뉴는 단연 굴구이와 굴찜이다. 3만원이면 7~8㎏ 되는 굴 한 망을 통째로 구워 먹거나 쪄서 먹을 수 있다. 굴구이는 가스불에 직화로 굽는데 관자가 껍데기에 붙으면 입 벌리기가 힘들다. 자주 굴리거나 뒤집어주는 게 맛있게 먹는 요령이다. 커다란 양은솥 가득 나오는 굴찜은 가리비 등 다양한 조개류가 서비스로 들어간다. 돌솥영양굴밥은 자색고구마, 밤, 배추, 표고버섯, 은행, 완두콩, 당근, 들기름까지 직접 농사지은 재료에 신선한 굴을 가득 넣어 달래장에 비벼 먹는다. 굴칼국수, 굴무침, 굴물회, 굴전 등 굴단지에선 굴을 활용한 거의 모든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비닐하우스촌이던 굴단지는 최근 깔끔한 상가단지로 시설 개선 공사를 거의 마쳤다. 공중화장실은 어린이 소변기까지 갖췄다. 보령시는 완공에 맞춰 오는 20일부터 30일까지 굴단지에서 ‘천북 굴축제’를 개최한다.
사철 즐기는 키조개의 매력
키조개 관자 회(왼쪽)와 키조개두루치기 |
천북에서 멀지 않은 오천항은 이름난 키조개 산지다. 한 해 3000t 이상을 수확하는데 전국 생산량의 60~70%가량을 차지한다. 키조개는 배를 타고 30분~1시간 나가 수심 20~50m의 앞바다에서 채취한다. 선장과 기관사, 잠수부가 한 조를 이뤄 새벽부터 조업하는데 하루 2000~3000개씩 조업량을 정해놓고 잡아 남획을 막고 적정 가격도 유지한다. 4~5년 자란 성패(成貝)는 크기가 30㎝ 내외로 모래와 펄이 섞인 지형에 박혀 있는 걸 잠수부가 일일이 갈고리로 끄집어낸다. 조업은 조금(조수가 가장 낮은 때)에만 가능해 격주로 한 달에 절반만 진행된다. 키조개 가격은 조업 상황에 따라 개당 2000~3000원 사이에 형성된다.
키조개 제철은 4~5월로 알려져 있다. 7~8월 산란기를 앞두고 영양분을 축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갯살 전체가 아니라 관자 부분만 요리해 먹기 때문에 사철 맛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올해 오천항 키조개축제도 11월에 열렸다. 겨울에도 맛이 좋다는 얘기다. 한겨울엔 키조개 조업이 없지만 근해 가두리 그물에 저장해 둔 키조개를 사용하기 때문에 오천항에선 연중 언제든 싱싱한 키조개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오천항 인근 수산물센터에 늘어선 횟집들은 키조개 코스 요리로 회와 샤부샤부, 무침, 두루치기 등을 골고루 낸다. 밥과 칼국수도 코스에 포함되는데 1인 기준 2만~2만5000원이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오천항에서 18년째 식당을 운영해온 조종실 ‘하니쌈밥’ 대표(59)는 키조개 두루치기와 키조개 삼겹살을 주메뉴로 낸다. 두루치기는 양파, 미나리, 대파, 고추, 당근, 버섯 등 각종 채소에 마늘, 배, 사과, 키위, 맛술 등을 넣어 일주일 숙성시킨 특제 고추장 소스를 더해 익혀 먹는다. 육수가 따로 없어도 약한 불로 은은히 끓이면 채소와 키조개 관자에서 자작하게 물이 배어나오며 먹기 좋은 상태가 된다. 키조개 삼겹살은 삼겹살과 관자를 구워서 함께 싸먹는데 입안에서 엉키는 식감이 좋다.
키조개축제 때 보령시가 오천항 식당들에 보급한 레시피를 보면 키조개 관자를 활용한 요리는 관자해물영양밥, 관자해물샐러드, 관자더덕구이, 관자야채굴소스볶음, 키조개치즈단호박찜 등 매우 다양하다. 쫄깃하고 담백한 관자가 어떤 재료와 섞여도 두루 어울리는 맛을 내기 때문이다. 오천항에서 구입한 키조개로 집에서 해먹는 버터구이는 요리도 간단한 데다 술안주로도 아이들 간식으로도 손색이 없다.
오천항 낙조와 갈매못의 예수
충청수영성 꼭대기의 정자 영보정 |
보령방조제에서 바라본 오천항의 석양. 언덕 위 영보정의 실루엣이 선명하다 |
오천항에서 배를 채운 후 들르기 좋은 곳이 있다. 먼저 오천항을 내려다보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충청수영성이다. 1501년 돌로 쌓은 충청수영성은 조선시대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는 최고사령부였다. 1896년 폐영되기까지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는 군사요충지였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수군진의 모습이 잘 보존된 드문 유적지다.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인 서문으로 들어서 언덕을 오르면 진휼청 건물이 나오고 꼭대기에는 멋들어지게 지은 정자 영보정이 자리 잡고 있다. 영보정은 바다 건너편 황학루, 한산사와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로 조선시대부터 유명했다. 많은 시인 묵객이 영보정에 들러 숱한 시문을 남겼다. 다산 정약용, 백사 이항복이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영보정에선 오천항은 물론 멀리 천수만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바다 저편 보령방조제에서 오천항 쪽으로 노을 지는 모습도 놓쳐선 안될 장면이다. 언덕 위 영보정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그 뒤로 둥근 해가 서쪽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장면은 서해에서만 즐길 수 있는 보물 같은 장관이다.
갈매못 순교성지의 예수상 |
오천항에서 남쪽으로 2㎞만 내려가면 갈매못 순교성지가 나온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된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 위앵 마르티노 루카 신부와 한국인 신자인 황석두 루카 회장, 장주기 요셉 회장 등 5명이 군문효수형을 당한 곳이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이던 세 명의 프랑스 사제들은 20~30대의 한창 나이에 지구 반대편의 조선까지 와 신념을 펼치다 생을 마쳤다. 외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들의 흔적은 종교를 떠나 경외의 감정이 들게 한다. 잔디와 소나무로 장식된 순교터 한쪽엔 예수상이 서 있다. 천수만에 한가로이 떠 있는 어선들을 배경으로 두 팔 벌린 예수의 모습에서 언어로는 포획되지 않는 인간 신념의 깊이와 고뇌가 느껴진다.
순교터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조그만 성당이 세워졌는데 큰 돌을 겹쳐 쌓아 유리한 곡선을 만든 건축 자체가 볼거리다. 성당 내부에선 다섯 순교자를 표현한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담장에 여남은 개 설치된 작은 예수 조형물도 인상적이다. 제각기 예수의 고난의 길을 형상화했다. 순교터 바로 옆에는 순교자들의 행적과 유품 등을 전시하는 기념관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보령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