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흑돼지 맛, 제주 '삼수정'
‘진짜 흑돼지의 맛은 뭘까’ 약간의 회의가 들려던 찰나, 이곳이 떠올랐다. 제주도가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될 무렵부터 한결같이 자리를 지켜온 고깃집 ‘삼수정’을 찾았다.
제주 흑돼지라면 나도 적잖이 먹어봤다. 이미 뭍에 제주 흑돼지를 판다는 전문점이 여럿이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제주도에 갈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지만. 사실 ‘내가 아는 그 정도의 흑돼지에서 뭐가 더 다르겠나’ 하는 심정이었다.
더 솔직히는 부정적인 생각도 했다. 육질이 고르지 않고 너무 비싼 데다 가짜가 횡행한다는. 이런 생각은 삼수정(三水亭)의 고기가 다 익은 뒤로는 싹 사라졌다. 향수를 일으키는 상호, 허름한 옛 슬래브 지붕에서는 남다른 시간의 축적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지금도 사용하는 오래된 공중전화, 제주도에서 받은 ‘대를 물린 가게’ 인증서 그리고 노포 특유의 공기와 냄새. 무엇보다 대를 이어온 음식이야말로 ‘진짜 노포’의 상징 아니겠는가.
불판에 놓인 고기에 시각적으로 압도당했다. 아, 이건 뭔가 좀 다르다! 삼수정의 고기가 기름 연기를 내뿜으며 익어간다. 칼집을 깊이 넣은 흑돼지는 230g에 1만 8000원.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제주 도심을 벗어난 성산포라는 입지, 가족경영을 고수하는 노포라서 가능한 가격이다. 일반 돼지를 쓰는 삼겹살집도 180g에 1만 3000원에서 1만 5000원 수준이니 요즘 말로 하면 ‘가성비 갑’이다.
익은 고기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돼지가 원래는 순한 가축이 아니라 멧돼지였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야성미가 느껴졌달까. 돼지고기 냄새는 보통 기름에서 나오는데, 그게 불에 익으면서 제주 흑돼지 특유의 진하고 강한 향을 뿜어낸다.
“우리 돼지는 워낙 오래 거래해온 집에서 늘 오는 거라 믿을 만합니다.” 3대째 대를 이어오고 있는 강정민 사장(55세)의 말이다. 시작은 그의 할머니 오선옥(92세) 씨였다. 2대는 어머니 김애자(77세) 씨가 맡아 경영했다.
현재는 아들 내외에게 맡기고 가게 일에서 거의 손을 뗐다. 삼수정의 전성기, 그러니까 1980~1990년대를 이끈 사람이 김애자 씨다. “시아버지가 함덕지사장을 할 때 총을 맞았어요. 시어머니가 그때부터 혼자 자식 키우고 먹고살려고 가게를 여신 거지.”
처음에는 빵집으로 시작했다. 성산포는 물동량이 많은 항구다. 부산에서 직선거리로 가까워서 온갖 물자가 이 항구로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상대로 해서 가게도 제법 번성했다. 그러다 제주에 새 시대가 열렸다. 비행기가 뜨고 도시 여행객이 들어오면서 11년 동안 운영한 빵집을 접고 고깃집으로 업종을 바꿨다.
1972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삼수정’이라는 간판을 내건 지 올해로 50여 년이 됐다. 제빵 기술자였던 아버지 강제문 씨가 고기도 잘 다룬 덕분에 장사가 잘돼 주방장급 직원도 둘이나 더 들였다. 처음에는 소고기를 주로 팔았다고 한다.
나와 동석한 친구 양용진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제주 음식 문화 연구자이자 셰프다.
“원래 제주에는 고기를 식당에서 사 먹는 문화가 없었어요. 고기는 큰 잔치가 있을 때나 먹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굳이 사 먹을 일이 없었죠. 게다가 돼지는 굽지 않고 삶아 먹었어요. 주로 소고기를 구워 먹었지.”
부분육 판매 문화가 없었던 그 시절에는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들여왔다. 그 문화는 지금도 남아 갈비와 등심, 육회에 갈비탕, 곱창 같은 내장 요리로 이어졌다. 하나같이 맛이 좋다.
강정민 사장이 직접 손질하고 요리한다. 제주 흑돼지는 선사시대부터 있었다. 중국 역사서 ‘위지’의 기록에 보면 “마한의 바다 한가운데 섬에 흑돼지가 있다”고 나온다. 그 돼지는 현재 천연기념물 제550호로 지정돼 있으며 우리가 요즘 먹는 것과는 종이 다르다.
현재 식용으로 쓰이는 흑돼지는 대부분 듀록과 버크셔의 교잡종이다. 굉장히 맛 좋고 값도 비싼 듀록에 기름 맛이 특별한 버크셔를 교배시킨 것이다. 다만 두 종이 얼마나 섞여서 어떤 품질을 조성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피부가 검으면 일단 ‘흑돼지’로 분류되니까.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 좋은 흑돼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궁금하다면 지방과 고기의 경계선을 살펴보면 된다. 삼겹살의 경우 선이 아주 뚜렷하다.1980년대에는 렌터카도 없고 주로 개인택시를 대절해 관광하던 시절이었는데, 하루에 택시가 많게는 70대까지 삼수정으로 온 적도 있다고. 음식 맛이 좋으니 손님들의 평가가 후해서 소개한 기사들도 우쭐해졌다.
아침에 문을 열면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들어왔다. 할머니 오선옥 씨는 최불암, 김혜자 씨가 왔던 것을 기억했다. 그사이 흑돼지 목살과 소갈비가 다 익었다. 모두 육고기 본질에 충실한 맛을 낸다. 미박(껍질)이 붙은 고기가 얼마나 찰기 있는지 이에 들러붙는 느낌이다. 불판의 고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좋은 고기를 먹고 난 뒤에 느껴지는 충만함이 속을 가득 채운다. 거기에 노포에서만 즐길 수 있는 묘한 감동까지 더해지니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다. 참, 소를 한 마리 통째로 받아서 모두 알뜰히 요리했던 경험과 솜씨를 느껴보고 싶다면 한우 육회나 한우 물회도 꼭 맛보시기를.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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