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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했던 그때 그 시절의 라면들

삶의 추억까지 서려 있는 라면에 대한 추억 속으로 빠져보는 건 어떨까요?

시대별로 알아보는 추억의 라면

1960년대 초반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라면은 그 당시 서민층에 급속도로 파고 들었다. 경제난 속에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많았던 그 시절, 라면은 정말 음식의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값이 싸고 간편하며, 심지어 맛까지 좋아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최고의 식품으로 꼽았다.


유년시절부터 군대, 자취 생활 등 자신만의 다양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라면은 종류도 다양했다. 하지만 그만큼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라면도 있다.

우리나라 라면의 탄생, 1960년대

라면의 탄생설은 여러가지가 있다. 1870년대 일본의 중국요리점에서부터, 혹은 1920년대 삿포로에서 처음 라면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끊임없이 언급되고 있는 라면의 시초에 비해, 우리나라의 라면 역사는 이로부터 반세기나 뒤에 시작됐다. 한국 라면의 탄생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 1968년에는 우리나라 라면이 미국에 첫 수출 되었고, 미국 교포와 월남 파병 장병을 위한 급식용 라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당시 라면의 값이 단돈 10원이었단 사실. 그렇다면 60년대 당시에 나왔던 라면으론 어떤 것이 있었을까?

삼양라면


우리나라의 최초 라면은 1963년에 출시된 삼양라면이다. 해방 직후, 그리고 6.25의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미국에서 밀가루를 지원받았던 지독한 가난이 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삼양라면의 故 전중윤 회장은 남대문 시장에서 노동자들이 미군이 먹고 버린 고기 뼈다귀와 닭다리로 끓인 꿀꿀이죽으로 한 끼를 때우는 것을 보게 된다. 전 회장은 과거 일본을 방문했을 때 먹었던 라면을 떠올리고,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해 삼양라면을 개발하게 된다. 적자가 날 염려에도 불구하고 10원이라는 싼 가격으로 라면을 출시, 서민의 배고픔을 덜어주고자 국내 최초로 닭 육수로 만든 삼양라면을 선보였다.

왈순마 라면


6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라면이 바로 ‘왈순마’ 라면이 아닐까 싶다. ‘봉지마다 껌을 선사한다’는 광고문구와 함께 소비자의 마음을 공략했던 라면이기도 하다.


1968년 농심(당시 롯데)에서 출시한 라면으로, 배우 강부자가 광고 모델이었다. 삼양과 치열한 라이벌 관계였던 농심이 야심차게 내놓았던 라면이었으나, 뜻밖의 문제로 단종됐다. 만화 ‘왈순아지매’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법원으로부터 상표사용금지처분결정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래도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만큼 베트남 전쟁 당시 군수물자로 수출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매콤한 라면의 서막을 알리다, 1970년대

라면이 쌀밥을 대신하는 ‘대용식’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라 할 수 있다. 60년대가 ‘라면의 시초’라 한다면, 70년대는 ‘라면의 개척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고기 라면의 출시를 시작으로 카레맛, 짜장맛 등 다양한 기호에 맞춘 여러 맛의 라면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여러 종류의 맛이 나오긴 했지만, 당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역시 소고기 라면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고기가 부족했던 만큼, 지방을 보충하려는 욕구를 라면으로 충족한 것이다.

소고기 라면


닭 육수를 활용한 기존의 흰 국물에서 벗어나 1970년에 소고기 라면이 출시되면서 ‘빨간 국물’, ‘매콤하고 얼큰한 국물’로 라면의 모습이 변화했다. 현재까지 출시된 대부분의 라면도 소고기 육수와 매콤한 맛을 사용해 만든 것이 대부분이라 할 정도로, 라면의 대중화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매콤한 맛을 고스란히 담아낸 소고기 라면. 특히 농심 소고기 라면은 교과서에도 심심찮게 등장했던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슬로건이 인상 깊게 다가오기도 했으며,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개그맨 故 구봉서, 故 곽규석이 CF모델로 출연하여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현재까지 출시되고 있는 소고기 라면은 삼양의 쇠고기면으로 당시처럼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맛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라면 업계의 팽창기, 1980년대

1980년대는 ‘라면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급격한 경제발전 덕분에 라면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80년대 이후의 라면은 어느덧 가난한 시절의 애환을 상징하면서도, 서민들의 대표 기호식품으로 그 자리를 굳건히 다지게 됐다. 특히 1980년대에는 비빔면, 해물육수면 등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개발된 라면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70년대보다 라면의 종류가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라면 업계 부동의 1위인 신라면도 1986년에 처음 생긴 이후 라면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농심은 88 서울올림픽 공식 후원사로 라면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농심 사발면


1981년에 첫 선을 보인 농심 사발면은 당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큰 사랑을 받았다. 그 비결 중 하나는 바로 ‘끓여 먹는 번거로움을 단번에 해소했다는 점’. 우리나라 최초의 사발 형태 용기면이라 할 수 있는 농심 사발면은 끓여 먹는 대신 물을 부어 3~4분 이내로 빨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끓인 물을 붓고 뚜껑을 덮어 기다리기만 하면 끝이었으니, 라면은 먹고 싶은데 끓여 먹기 번거롭거나 시간이 없을 때 특히 좋았던 것이 바로 사발면이었다. 현재까지도 이 사발면은 육개장, 김치 사발면으로 출시되고 있으며, 다른 컵라면 대비 저렴한 가격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신라면


라면 업계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신라면, 현재까지도 1위의 자리를 좀처럼 내어줄 줄 모른다.  30년 이상 점유율 1위, 판매율 1위를 기록하여 농심의 대표 라면이 된 신라면은 2012년까지 220억개가 팔린 스테디셀러로 라면 업계에서의 위치를 굳건히 다지고 있다.


매콤한 라면, 얼큰하고 구수한 라면을 넘어 아예 ‘매운 맛’을 선보인 라면이었기에 당시에는 모험이자 도전이라 할 수 있었는데 매운 맛을 좋아하는 20~30대를 타깃으로 한 덕분에 판매량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집 라면


이름부터 매우 친근한 빙그레의 우리집 라면. 이미 대형 3사(농심, 롯데, 삼양)가 주름 잡던 라면 업계의 틈에서 80년대의 라면 역사에 당당히 자리할 수 있던 이유는 기존에 생산되던 라면의 맛과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천연 토코페롤을 사용한 덕에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을 자랑하던 '우리집 라면'은 삼양라면보다 20원이 더 비쌌지만, ‘그 만큼의 값을 한다’는 평이 이어져 한동안은 빙그레를 대표하는 라면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또, 당시 인기 개그맨 김병조가 광고 모델로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끈 마케팅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셔터스톡, 전성기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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