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농구국보 서장훈
[THE LEGENDS] (20)
점프볼이 창간했을 때, 이미 서장훈은 선수로서 이룰 건 다 이룬 선수였다. 농구대잔치 시절, 대학선수로서 형님들을 꺾고 정상에 섰으며, 프로농구에서도 소속팀(SK)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점프볼 창간 후 첫 챔피언이 바로 SK였다. 당시 그가 이루지 못한 유일한 하나가 바로 아시안게임 금메달이었는데, 다행히도(?) 점프볼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야오밍의 중국을 꺾고, 코치이자 대학시절 은사였던 박건연 씨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KBL 최초의 1만 득점 보유자로서 ‘국보 센터’라는 수식어로 코트를 누벼온 서장훈. 점프볼은 오랜 시간에 걸쳐 그와 인터뷰를 가져왔지만, 긴 호흡을 갖고 국가대표와 국제대회에 대해 나눈 경험은 많지 않았다. 점프볼이 만난 서장훈. 긴 시간동안 서장훈이 대한민국 농구국가대표에 대해 말했던 챕터들만 옴니버스 스타일로 엮어 보았다.
# 한국농구를 향해 뛰어라!
서장훈이 처음 대표팀에 선발된 게 1993년 ABC대회.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한국은 중국, 북한에 밀려 3위에 그쳤지만 서장훈의 등장은 한국농구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 당시 207cm의 키에 그 정도 기량을 갖춘 선수는 한국 농구사에 없었다.
서장훈은 대학 1학년생이었지만 그런 선수의 등장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 후로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불참을 제외하고는 대표팀 센터 자리를 비운 적이 없다. 대한민국의 확고부동한 센터였다. 대표팀 경력만 벌써 8년차로 따지고 보면 대표팀 최고 베테랑이다.
서장훈은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당시와 지금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고 말한다. 훈련 기간이나 강도가 약해졌다든지 단순히 역대 대표팀에 비해 기량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대표팀 권위의 상실, 이것이 현실이다. 강한 대표팀, 누구나 뛰고 싶어하는 대표팀이 돼야 한다. 사실 서장훈은 대표팀 차출에 불응한 적이 없다. 아무리 시시한 대회라도 말이다. 그것은 본인이 국가대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장훈도 태릉에서의 훈련이 답답하고 힘들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컨디션이 좋았던 적도 드물다. 부상이 있어도 견딜 만하면 태릉으로 향했다.
“축구선수들은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 것이 일생의 목표입니다. 한국 축구가 세계 최정상급은 아니잖습니까? 겨우 16강이 목표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라는 서장훈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예전처럼 대표선수가 되는 것이 모든 스포츠 맨들의 꿈이어야 한다. 그런 분위기는 농구에서 사라진 듯하다. 선발된 선수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불참을 통보한다. 그렇다고 선수들을 탓할 수만도 없는 문제다. 대표팀에 대한 메리트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불참한 선수들만 탓하는 것은 명분이 서지 않는다.
불만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서장훈에게는 대표팀에 대한 자부심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도 후배 김주성에 대해서는 대표팀의 공동 목표를 향한 동반자로 반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제가 (김)주성이보다 경험이 많으니까 서로 역할이 겹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게 해주어야지요. 주성이는 보통의 대학생들처럼 아직 수동적인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역시 잘 하는 선수니까 그 친구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이끌어줄 생각입니다.”
글_최국태 기자(점프볼 2001년 8월호)
# 국가대표의 자부심
처음 그가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팀에는 한기범과 김유택이 있었다. 국가대표팀에서 허재와 김현준 시대가 저물기 시작하고, 이상민, 문경은 등이 새로운 주축으로 자리를 잡던 세대교체의 시기였다.
당시 막내였던 서장훈은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1998년 방콕, 2002년 부산을 거쳐 2006년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 그는 최고참이며, 그 뒤에는 김주성, 김민수, 하승진 같은 쟁쟁한 후배들이 새 시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대표팀과 팬들이 국제대회에서 가장 믿고 있는 선수는 여전히 서장훈이다. “그간 (슛) 넣을 만큼 넣었고, (상도) 받을 만큼 받았고, (비난도) 먹을 만큼 먹었다. 참 오래하지 않았나? 이러기도 쉽지가 않다”
농담 삼아 던진 말이지만, 국가대표 유니폼을 향한 그의 포부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개인의 영광이 아닌, 나라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 포부 말이다. 프로선수 서장훈에게는 야유를 보내던 팬들조차도 서장훈의 대표팀에서의 입지와 애정에 대해서는 반문하지 못한다. 그만큼 그는 최선을 다해왔다. 멀리 갈 것 없이 2005년 FIBA 아시아선수권대회만 봐도 알 수 있다. 비록 중국에 완패하긴 했지만, 야오밍과의 매치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야오밍과의 자리싸움 중 중심을 잃어 그를 부둥켜안고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과 한국 농구의 자부심을 위한 것이었다. (※ 야오밍은 훗날 국내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를 묻는 질문에 여러 차례 서장훈과 허재를 언급하기도 했다.)
글_손대범 기자(점프볼 2006년 11월호)
# 내 인생의 로맨스
서장훈은 김진 감독과 프로에서 처음으로 한솥밥을 먹게 됐다. 하지만 김진 감독과 서장훈. 왠지 낯설지 않다. 또 다시 9년 전으로 시계태엽을 돌려보면 이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둘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한 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다. 당시 감독과 선수로 출전, 대한민국이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진 감독은 번뜩이는 용병술로 대표팀을 지휘했고, 서장훈은 NBA리거 야오밍과의 맞대결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경기 막판 김승현의 ‘폭풍 활약’까지 묶어 대표팀은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중국을 제압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지난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이후 20년만에 획득한 금메달이었다.
연세대 재학 시절부터 대표팀의 부름을 받은 서장훈에게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남다른 의미로 기억된다. 어릴 때부터 많은 기대 속에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끝내 넘지 못했던 벽이었던 중국을 넘었던 그 순간, 마치 밀린 숙제를 끝낸 것과 같은 후련함과 짜릿함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그토록 행복한 기억을 가슴 속에 아련히 새길 수 있도록 자신을 이끈 스승이 바로 김진 감독이었던 것이다. “제 인생에 커다란 로맨스를 가져다주신 분이죠. (문)경은이 형부터 (현)주엽이, (김)승현이에 이르기까지 그때는 유독 개성 강한 선수들이 많았어요. 그런 선수들이 하나로 뭉쳐 기적을 이뤄냈죠. 김진 감독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해요.”
이때다 싶어 “농구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였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서장훈은 1993년의 기억을 떠올렸다. 1993년. 서장훈이 만 19세의 나이에 성인무대를 평정한 시기다. 그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입생임에도 한기범, 김유택과 같은 대선배들을 압도했다.
서장훈의 활약에 연세대는 실업팀을 연달아 제압,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우승이라는 파란을 연출했다. 그리고 그는 농구대잔치 역사상 최초의 대학생 MVP로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다. 1993년은 ‘서장훈 천하’의 시작을 알린, 한국농구의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된 의미 깊은 한 해였다.
글_최창환 기자(점프볼 2011년 7월호 게재)
# 국내농구 최초 亞게임 5회 출전 고사
2010년 11월 중국 광저우에서 제16회 아시안게임이 열린다. 한국남자농구도 메달권 진입을 목표로 6월부터 담금질에 들어간다. 이번 대표팀 선발을 앞두고 지난해부터 관심의 주인공이 있었다. ‘국보센터’ 서장훈의 승선 여부였다.
이번 아시안게임에 출전할 경우 국내농구 사상 처음으로 아시안게임 5회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주역인 서장훈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부터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까지 4회 연속 출전했다. 대기록 달성도 가능했다. 시즌을 마친 뒤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유재학 감독에게 연락이 온 것. 유 감독은 “이번에 한 번 같이 해보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서장훈은 고심 끝에 “이젠 후배들이 가야하지 않겠나? 내가 가면 욕먹는다”며 태극마크를 고사했다.
서장훈은 아쉬움이 짙게 남아있었다. “사실 가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나가는 것도 개인적으로 영광스런 일이고, 그야말로 마지막인데 대표팀에서 그렇게 퇴장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죠. 주축이 아닌 후배들과 함께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애들을 돕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국 생각을 바꿨다. 개인 욕심이라 생각했기 때문.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단 후배들이 가는 게 맞고, 그런 역할도 내가 아닌 다른 후배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내 욕심 차리려고 후배들이 좋은 경험을 쌓을 기회를 뺏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후배들이 가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그는 그렇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대표팀을 마다하고 후배들에게 양보했다.
대신 대표팀 얘기를 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의미가 있는 태극마크를 최근 선수들이 기피하는 현상이 있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국제대회를 누구보다 많이 나가본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아니다”였다. “내가 본 사람들 중 기피라고 할 정도로 태극마크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최근에 성적이 안 나다보니 그런 얘기가 나왔다고 봐요. 선수들은 가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부상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해요.”
그는 대표팀에 나서는 선수들을 대변하고 나섰다. 시즌으로 인한 컨디션 조절 문제였다. “프로를 10년 넘게 하다 보니 선수들의 리듬이나 밸런스가 시즌에 맞춰져 있습니다. 시즌 개막을 하더라도 2라운드가 돼야 몸이 올라오는데, 연습할 시간도 거의 없는 상황에 7~8월 대회는 선수들의 컨디션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죠. 선수들도 더 노력을 해야겠지만, 성적만큼 3류 수준은 아닙니다.”
태극마크를 반납한 그는 후배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이번 아시안게임에 대한 기대도 내비쳤다. “유재학 감독이라는 훌륭한 감독님이 계시기 때문에 선수들이 잘 따른다면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 기대해요. 하지만 각자 다른 팀에서 연습하다 1~2개월 손발을 맞춰야 하는 상황인데다 중국 홈에서 열리는 경기이기 때문에 걱정이 되긴 합니다. 팬들도 그런 부분을 감안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 국가대표팀에 대한 아쉬움보다 후배들을 위한 배려가 먼저인 그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한국농구 발전을 위한 대승적인 마음이었다. 앞으로 한국농구의 미래를 짊어지고 가야할 후배들이 그의 몫까지 열심히 뛰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_서민교 기자(점프볼 2010년 5월호 게재)
# 서장훈의 못 다한 이야기
Q. 기억에 남는 외국선수가 있나요?
재키 존스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인간적인 면도 그렇고, 플레이스타일이나 기량도 그렇고, 저와 참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다만 마무리가 안 좋았는데 정확히는 모르지만 성품상, 잘못 휩쓸려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재키 존스는 2001-2002시즌 직후 헤씨씨 파문에 연루돼 다시는 KBL 무대를 밟지 못했다.)
Q. 당대 최고 포인트가드들과는 거의 다 손발을 맞춰봤죠.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선수는?
프로팀 외에 대표팀은 사실 오랫동안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말하기가 까다로워요. 개인적으로는 나를 잘 만들어준 (이)상민이 형(현 삼성 코치)과 호흡이 제일 잘 맞았다고 봅니다.
Q. 그렇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매치업은?
한 명을 꼽을 수가 없죠. 워낙 많은 경기를 치렀으니까요. 다만 항상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제가 막아야 할 선수는 있었지만, 저를 막을 때는 늘 더블팀, 트리플팀이 들어왔으니까요. 이 선수를 어떻게 해야 할 까 고민하기에 앞서, 더블팀이 어디서 들어오는지부터 생각했던 기억 밖에 없습니다.
Q. 더 이루고 싶은 도전은 없었나요?
NBA에 한번은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요즘에는 정보가 참 많아 방법이 다양해졌지만 그때는 대학을 거쳐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실한 정보나 루트가 없었죠. 요즘에는 G리그도 있잖아요. 굳이 NBA에서 어떻게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만약 내가 NBA에 도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해봤습니다.
Q. SNS는 아예 안 하세요?
혹시나 실수를 하게 돼서 가볍게 보일 것 같아서요. 조심하는거죠. 또, 제가 굳이 모든 것을 말하고 밝힐 필요도 없고요.
글_손대범 기자(점프볼 2013년 1월 인터뷰)
# 서장훈, 9시즌 연속 연봉 1위
서장훈은 1998-1999시즌 데뷔하자마자 최고연봉 선수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 국내선수 드래프트를 통해 데뷔하는 선수들의 첫 해 최고 연봉(연봉+인센티브=보수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연봉으로 통일)은 1억 원이다. 이는 애초 8,000만원에서 오른 것이다. 서장훈이 데뷔할 때는 신인 선수 연봉 제한이 없었다. 최초의 1순위 현주엽도 서장훈과 연봉 1위 자존심 대결 끝에 1억 8,000만원에 도장을 찍었다.
서장훈은 1999-2000시즌 이상민과 함께 2억 2,000만원으로 공동 1위를 차지했다. SK를 챔피언에 올려놓고 플레이오프 MVP에 선정된 서장훈은 2000-2001시즌부터 연봉 1인자 시대를 열었다. 데뷔와 함께 TG(현 DB)를 챔피언에 올려놓은 김주성이 서장훈의 대항마로 떠올랐다. 서장훈은 2005-2006시즌과 2006-2007시즌 김주성과 연봉 공동 1위로 이름을 나란히 했다. 김주성이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2007-2008시즌부터 서장훈은 연봉 1위에서 내려왔다. 9시즌 동안 이어진 서장훈의 1위 기록도 이때 중단됐다. 김주성은 서장훈의 뒤를 이어받아 2005-2006시즌부터 2012-2013시즌까지 8시즌 동안 연봉 1위를 달렸다. 서장훈의 기록에서 한 시즌 부족하다. 이후 연봉 1위는 춘추전국시대다.
문태종만 두 시즌 연속 1위에 이름을 새겼다. 더구나 KBL은 구단보다 선수에게 유리한 FA 규정을 개정했다. FA 자격을 얻은 선수들의 몸값이 더욱 뛰어오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서장훈이나 김주성처럼 오랜 시간 동안 연봉 1위를 지킬 가능성이 낮다는 걸 의미한다. 앞으로 최고 연봉은 샐러리캡이 계속 오를수록 경신될 것이다. 그렇지만, 9시즌 동안 연봉 1위를 차지하는 선수는 아예 나오지 않을 듯 하다.
글_이재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