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미남 가드’ 김희선 “여배우 김희선과 함께 화보 찍은 에피소드요?”
‘김희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이라는 질문에 십중팔구는 90년대 최고의 스타 중 1명으로 꼽혔던 여배우 김희선을 떠올릴 것이다. 영화배우로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으나 워낙 드라마에서 강세를 보였던지라 ‘안방극장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목욕탕집 남자들, 미스터Q, 토마토 등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농구대잔치 팬들 사이에서는 중앙대학교 김희선(48, 187cm)을 기억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는 한창 농구 인기가 뜨거웠던 당시 김승기, 홍사붕, 김영만, 양경민, 조동기 등과 함께 중앙대 전성시대를 이끌어간 주역 중 1명이다. 잘생긴 외모로 인해 ‘꽃미남 가드’로도 유명했다. ‘연세대에 이상민, 우지원이 있다면 중앙대에는 김희선이 있다’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다. 중앙대 동문, 남자농구선수와 여배우 등 여러 화제가 겹치며 동명이인 여배우 김희선과 동반 화보 촬영을 하기도 했다.
프로에서의 김희선은 다소 운이 없던 케이스였다. 주전급으로 손색없는 기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팀 내 같은 포지션의 네임벨류 높은 선수들에게 밀려 기회를 충분히 받지 못했다. 삼성 썬더스 시절이 대표적이다. 데뷔 첫 시즌 평균 17.6점 2.2리바운드 3.1어시스트 2.2스틸로 펄펄 날아다닌 것을 비롯해 다음 시즌에도 두 자리 득점을 올렸으나 군 복무 이후 출전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한창 기량이 좋았던 두 시즌 동안 평균 4점도 기록하지 못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한창 성장해야 될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 뼈아팠다.
김희선은 이후에도 출전시간을 충분히 받았던 시즌에는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식스맨으로 밀리게 된 시즌에는 기록이 급하락했다.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에서 꾸준하게 출전했다면 어떤 커리어를 남겼을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하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승부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하이라이트 장면을 만들어내는 등 인상적인 한방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배들이 김희선 이름으로 장난 좀 쳤던 기억이 납니다”
Q.어떻게 지내십니까?
현재는 모교인 춘천 강원사대부고에서 코치로 있으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부터 말씀드리면 부산에서 유소년들을 가르치다가 KTF(현 KT)에 2군이 창설돼 거기서 2012년까지 코치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가 WKBL 부천 하나외환(현 하나원큐)에 고교 및 대학 선배인 조동기 코치가 감독을 맡으시면서 코치로 부임해서 함께했죠. 2013~2014시즌까지 하고 이후 약간의 공백을 거쳐 모교로 들어와 지도자를 이어가고 있다고 보면 맞겠습니다.
Q.선수 시절 꽃미남 가드로 유명하셨어요. 예전에 비해 살이 좀 찌신 것 같아요.
살이 엄청 많이 쪘죠. 10kg 이상 쪘어요. 선수 시절에 비해 운동량은 확 줄었는데 먹는 것은 비슷하니까요. 다른 분들도 비슷한 케이스가 많을 거예요. 운동량이 줄면 먹는 양도 줄여야 하는데 이게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이제는 외적인 모습이 문제가 아닌 건강 때문에라도 빼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향으로 내려오니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마트나 물건을 사러 가도,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도 알아봐주시더라고요. 근데 “예전 모습이 많이 없어졌어요” 하시면서 놀란 표정을 짓는 분들도 좀 있으세요. 이제는 저도 동네 아저씨인데 어릴 적 모습으로만 기억하셔서 그런 거죠.
Q.그래도 옛날 얼굴이 남아있으시던데, 여전히 잘생겼다는 소리는 조금 듣는 편이시죠?
하하…. 절대 아닙니다. 살도 찌고 내일모레면 50인데 그런 소리 듣고 그럴 때도 한참 지난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나이에 맞게 지혜로움, 넉넉한 그릇 등 심적인 요소에서의 성장을 가져가고 싶은데 말처럼 쉽지 않네요. 어릴 때는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그런 부분들이 채워지는 줄 알았는데 막상 제가 그 나이가 되어보니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니구나 싶어요. 끊임없이 생각하고 배우고 그래야 하는 것 같아요. 나이를 먹어서도요.
Q.대학 시절 인기가 많으셨을 것 같아요.
거창하게 인기까지는 아니지만 좋아하고 응원해주셨던 팬들도 상당수 있기는 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제가 딱히 스타축에 끼어서가 아니라 당시 농구 인기가 엄청났잖아요. 농구를 했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먹고 들어가는 게 있었어요. 저 역시 당시 농구 인기, 중앙대 농구부라는 좋은 팀의 일원으로서 묻어간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한 일이죠.
Q.그래도 평범한 분들과 나란히 서면 외모가 더 빛나셨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홍사붕 님 등.
(웃음)그, 그렇죠. 사붕이 형과 있으면 그래도 쪼금 괜찮게 보였을 수도 있었겠죠. 사붕이 형 죄송합니다.
Q.당시 최고 인기 여배우와 이름이 같았어요.
김희선이라는 여배우가 워낙 대세이기는 했죠. 그래도 저는 남자고 농구선수다 보니 둘을 헷갈리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죠. 물론 단순히 “김희선”하고 이름만 불쑥 부르면 저보다는 그 여배우를 먼저 떠올리는 분이 훨씬 많았겠지만요. 그런 것보다는 남녀가 서로 동명이인이라는 사실이 신기해보이기는 했었나 봐요. 잡지사에서 나란히 화보를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생소하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죠. 그때 제가 4학년이고, 그 배우가 1학년이었을 거예요. 같은 학교 동명이인, 서로 다른 성별 등 이것저것 소재가 된다고 생각했나 봐요. 더불어 휴대폰에 저장된 제 이름을 가지고 싱거운 장난을 치는 선배들이 좀 있었어요. 저한테 전화가 오면 본지인들에게 “탤런트 김희선한테 전화왔다”고 장난으로 뻥치는(?) 선배들도 많았다 하더라고요. 지금처럼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그런 것이 없는 시대였잖아요. 대놓고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이상 휴대폰을 들고 자연스럽게 쓰윽 밖으로 나가면서 통화하면 아무도 모르는 것이죠(웃음).
Q.여배우 김희선과 함께 화보 찍으면서 있었던 에피소드 같은 것 없으셨나요?
딱히 기억나는 것은 없어요. 제가 막 외향적이고 끼가 많은 성격도 아니거니와 화보 같은 것 찍는 자체에도 익숙하지 않아서 상황 자체가 긴장되고 어렵고 그랬죠.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던 것 같아요. 나이 먹고 이런 인터뷰 할 줄 알았으면 좀 재미있는 에피소드라도 만들어놓을 걸 그랬어요(웃음). 그래도 그분이 워낙 지금까지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다 보니 함께 화보를 찍은 적이 있다는 것 자체로 이렇게 한마디 할 수 있는 소재도 만들어졌네요.
Q.이름으로 인해서 얻은 득이 많았을까요, 실이 많았을까요?
허허…. 득실 따질 것이나 있을까요. 해당 여배우가 워낙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저도 엄청난 농구 인기에 묻어가면서 이름 석자는 알리고 있었으니까 다들 누가 누군지 구분 정도는 했을 거예요. 물론 그럼에도 아주 간혹 오해를 산적도 있기는 했지만요. 어쨌거나 너무 뻔한 답 같지만 득도 없었고 실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Q.혹시 미혼이신가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등에 본인 밖에 없으셔서요.
아니에요. 딸이 벌써 대학교 졸업반이에요. 한양대에서 거문고를 전공했어요. 카카오톡 프로필 같은 경우는 다들 프라이버시가 있으니까 가족사진도 막 올리고 그러는 편은 아니에요. 그냥 가끔 제 사진만 올리죠.
Q.아빠 닮았으면 굉장히 미인이지 않을까 싶어요. 키도 클 것 같고요.
저를 닮아서 힘은 좋아요(웃음). 키는 운동을 했으면 좀 더 컸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앉아서 거문고만 타다 보니까 167~168cm 정도예요.
“수비요? 정말 악착같이 했습니다”
Q. 농구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희 나이대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당시에는 먹는 것부터 모든 게 정말 열악했어요. 과자 하나 먹는 게 정말 이벤트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지금 친구들은 “진짜 그랬어?”라고 되물을지 모르겠으나 소풍이 왜 좋았겠습니까. 그래도 다른 때에 비해 과자도 많이 먹을 수 있고 그래서 더 좋지 않았나 싶어요. 저나 제 주변은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당시 또래들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눈에 띄었어요. 농구를 하게 되면 이것저것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혹했죠.
Q.본래부터 가드 포지션에서 뛰셨나요?
주변 또래들 중에서는 제가 가장 키가 큰 축에 속했어요. 그래서 춘천근화초등학교 때는 크다는 이유만으로 센터 포지션을 주로 봤고 춘천중학교로 올라가면서 포지션 변경을 했죠. 근데 그것도 완전히 포지션에 정착했다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옮겨다니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일단 선수 숫자가 많지 않다 보니 적성이나 그런 쪽은 세밀하게 체크하기가 어려웠어요. 이것은 당시 지방에서 농구한 선수들은 다들 비슷했을 거예요. 생각보다 키가 많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때 기준으로 본다면 가드로서는 괜찮은 신장이었던 것 같아요.
Q.1, 2번을 오가셨는데 선수 김희선의 정확한 포지션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2번에 가까운 가드였어요. 상황에 따라 1, 2번을 오가기도 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포지션은 2번이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포인트가드와 슈팅가드를 계속해서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아요. 제가 1번을 잘해서라기보다는 상황이 그렇게 된 거죠.
Q.수비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중앙대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때 선배님들도 워낙 쟁쟁하셔서 제가 뚫고 들어가기는 게 쉽지 않았어요. (김)승기 형만 봐도 워낙 잘했잖아요. 프로에 가서도 못한 것은 아니지만 대학 때는 국가대표도 하시고 ‘터보가드’라는 별명까지 얻으면서 연세대 (이)상민이 형이랑 라이벌 구도까지 이뤘잖아요. 선후배 그런 것을 떠나 이름값이나 기량이나 제가 한참 모자랐죠. 그러다 보니 상대 에이스를 밀착마크 하거나 열심히 뛰면서 에너지레벨을 높이는 플레이 등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팀에서도 그런 쪽을 원했고요. 원팀으로서 강한 전력을 내려면 개개인의 그런 자세가 필요한 것이 맞기도 하겠죠. 그러다 보니 수비가 늘게 되고 프로에 가서도 ‘수비는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듣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이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농구를 하다 보면 같은 포지션에서 자신보다 잘하는 선수를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런 선수가 같은 팀에 있으면 교체멤버로 밀릴 수밖에 없고요. 그런 경우 수비력은 출전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무기가 될 수도 있어요. 어설프게 주전 선수의 다운그레이드버전보다는 수비라도 잘하는 혹은 악착 같이 하는 선수가 전술적으로도 쓸모가 있고 감독님 눈에도 더 잘 띄겠죠.
Q.중앙대는 어떻게 들어가시게 된 것인가요?
(조)동기 형이 고등학교 선배셨어요. 동기 형이 중앙대학교를 갔잖아요.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컸죠. 물론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학교는 아니었지만요. 당시 중앙대가 저희 학교로 연습경기 등을 하러 자주 왔어요. 동기 형은 물론 당시 강동희 선배님의 플레이 등을 보며 ‘아, 나도 저런 대단한 선배님들처럼 중앙대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됐죠. 그러던 중 정봉섭 농구부장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셨고 운 좋게 중앙대라는 좋은 학교로 갈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챔피언결정전의 스틸이 인생샷으로 남았습니다”
Q.중앙대 시절, 같은 포지션에 비슷한 스타일의 선배 가드가 둘이나 있었어요.
승기 형, 사붕이 형 모두 농구를 많이 잘하셨죠. 저 같은 경우 옆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당시 중앙대 가드진을 보면 핵심 앞선이 모두 듀얼가드였어요. 1, 2번을 오갈 수 있다는 점에서 승기 형, 사붕이 형, 저 모두 비슷했죠. 언뜻 보면 서로 겹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같은 듀얼가드라도 성향이나 플레이 스타일이 조금씩 달랐고 서로 1, 2번을 바꿔서 플레이할 수 있는지라 장점이 더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이 부진하거나 다쳐도 서로 커버해 줄 수 있고요. 당시 강정수 감독님은 물론 정봉섭 농구부장님께서도 190cm가 넘는 장신 가드를 키우고 싶어 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선견지명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지금 봐봐요. 하나같이 듀얼가드에 신장도 부쩍 커졌잖아요. 정말 좋은 정통가드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듀얼가드도 다양한 방식으로 팀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삼성에서는 더했던 것 같아요. 무려 주희정, 강혁이었죠.
중앙대 시절도 그렇고, 삼성 시절도 그렇고 사실 이것은 제가 불운하다 어쩌다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아요. 선수 생활을 한다는 것은 경쟁의 연속이잖아요. 제가 더 잘하는데 기회를 못 받았으면 억울하고 그랬겠지만, 아니었잖아요. 특히 말씀하신 대로 삼성 시절은 무려 주희정, 강혁이었어요. 저도 노력은 했지만 그 친구들이 워낙 잘했죠. 팀 밸런스나 조합 면에서도 더 잘 맞았던 것 같고요. 물론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불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쉬움이죠. 프로선수라면 종목 불문하고 누구나 경기에서 많이 뛰기를 바랍니다. 특히 당시에는 한창 젊은 시절이었으니까 갈증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었고요. 프로생활하면서 단 한 번도 수술을 받은 적이 없었을 정도로 내구성도 좋고 몸 관리에도 나름 신경을 많이 썼죠. 체력적으로도 팔팔했던지라 벤치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근질근질할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제가 부족한 탓이었던 것 같습니다.
Q.팬들 사이에서는 아쉽다는 의견도 많았어요.
좋게 봐주시고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시 삼성은 (문)경은이 형을 비롯해 많은 선수들이 “우승 한번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상황이었어요. 삼성이 농구대잔치 말기부터 프로농구 초창기까지 우승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 같이 힘을 모아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됐어요. 양보할 것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희생하는 마음가짐으로 오직 팀만을 생각하자는 뜻이 강했죠. 저도 출전시간의 아쉬움보다는 팀이 우승하는데 일조하자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우승팀의 일원이라는 것도 큰 훈장이잖아요.
Q.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2시즌 동안 식스맨으로 주로 뛰셨어요. 기량이 한창 좋을 때였던 것 같은데 아쉬움이 남으셨을 듯해요.
사실 우승하고 난 뒤 저도 많이 뛸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팀에 (트레이드)요청도 했었죠. 식스맨으로 뛰게 되니까 젊은 나이임에도 힘은 남아도는데 운동량이 많이 부족했어요. 당연한 말이겠지만 체력이라는 건 쉰다고 늘어나지 않아요. 출전시간도 어느 정도 가져가야 이른바 경기 체력도 늘게 되는 거죠. 더욱이 그때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훈련 시스템도 없던 시절이라 스스로 몸을 만들어야 되는데 참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눈에 띄고 싶어 일찌감치 나와서 경기장에서 몸도 풀고 나름대로는 노력도 꽤 했죠. 근데 그 당시 팀이 좀 어수선했어요. 경은이 형도 나가고 대신 (우)지원이가 들어오고 얼마 있다가 (서)장훈이도 영입됐고요. 우승팀답지 않게 변화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과도기였던 것 같아요. 이래저래 타이밍을 놓쳤던 것 같고 결국 FA 자격을 얻은 후 SBS(현 KGC)로 이적하게 됐죠.
Q.2000-2001시즌 챔피언결정전 4차전에서 막판 스틸에 이은 결승 레이업슛을 성공시키며 삼성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했어요. 기억나시죠?
잊을 수가 없죠. 그것 하나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주시는데요. 당시 삼성이 2승 1패로 앞서 있었기 때문에 4차전 승패가 매우 중요했죠. 4차전을 내주게 되면 2승 2패로 동률이 되잖아요. 더욱이 4차전을 창원에서 치렀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LG 홈팬들이 엄청 열광적이시죠. 분위기상 저희가 조금 밀리는 느낌이었어요. 챔피언결정전 같은 큰 무대에서는 기세 싸움이 중요하잖아요. 삼성이 전력에서 더 낫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LG 역시 챔피언결정전까지 올라온 팀이었죠. 거기에 공격농구가 돋보인 팀이었던지라 화력에 불이 한 번 붙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률이 된다면 흐름상 LG가 유리했을 가능성이 컸어요. 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가 아니라 그날 경기를 내줬으면 시리즈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Q.너무 극적인 장면이었어요. 노리고 있었나요?
아뇨. 출전시간이 길지 않은 식스맨이어서 이것저것 생각할 입장도 아니었어요. 단지 (조)성원이 형이 워낙 잘하셨잖아요. 특히 클러치 상황에 많이 강했고요. 저는 그냥 성원이 형만 막으라고 내보낸 거예요. 저 역시 성원이 형에 집중하고 있었죠. 그러다 보니 결정적인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스틸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성원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술 한 잔 사라고(웃음).
Q.앞으로 계획하고 계신 일 등이 궁금합니다.
딱히 따로 계획하고 있는 것은 없어요. 언제나 그렇지만 지금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이 더 잘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이 커요. 대학도 가고 프로도 가고 국가대표까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여기는 저의 모교며 머물고 있는 지역 역시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에요. 농구를 가르치는 선생님과 고향 선배의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어요. 더불어 기회가 된다면 대학팀 감독, 프로팀 감독도 하고 싶습니다. 근데 이것은 저뿐 아니라 많은 농구인들이 가지고 있는 바람 아닐까 싶어요. 특히 저처럼 지도자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더더욱이요. 그동안 해온 나만의 농구 스타일을 한 번 발휘해 보고 싶은 것이죠. 하지만 당장은 우리 아이들이 잘되는 것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니까요.
Q.끝으로 여전히 선수 김희선을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도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께는 정말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선수 시절 저를 응원해주셨던 분들 역시 시간이 많이 흐른 만큼 나이가 꽤 드셨을 것으로 생각돼요. 저랑 큰 차이가 없겠죠. 같이 나이 먹는 입장에서 기회가 된다면 함께 모여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추억을 나누는 그런 시간도 가지고 싶어요. 비슷한 시대 정서, 비슷한 공감대가 있잖아요. 어려운 시기지만 다들 힘내시고요.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세요.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인사드리겠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KBL 제공
◇ 필자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농구를 사랑하던 오랜 팬으로 2002~2003년 본지에 농구 무협소설 '해동전설(海東傳說)'을 연재한 바 있으며 데일리안, 홀로스, 올레, 오마이뉴스 등 다양한 인터넷 매체에서 스포츠 객원기자로 활동한바 있다. [김종수의 농구人터뷰]를 통해 전현직 농구인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시각으로 다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