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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안 해봤던 걸 하면 다른 사람이 된다”…명대사 입소문 탄 ‘나의 해방일지’

중앙일보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포스터. [사진 JTBC]

JTBC ‘나의 해방일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드라마다. 경기도 수원 근처 산포시라는 가상의 도시에 사는 삼남매 염기정(이엘), 창희(이민기), 미정(김지원)이 서울로 출퇴근하고, 밥 먹고 술 먹으며 신세 한탄을 하다 또다시 출퇴근하는 장면이 드라마에 반복적으로 그려진다. ‘경기도민은 인생의 20%를 대중교통에서 보낸다’는 웃픈 현실이 드라마 속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셈이다. 그나마 아버지의 공장 및 농장 일을 돕는 미스터리한 외지인 구씨(손석구)의 등장이 텁텁한 이들 일상 속 최대 변수다.


극적인 사건이 없는 ‘나의 해방일지’는 초반 2%대 시청률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tvN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 등 박해영 작가의 전작들이 그랬듯, ‘나의 해방일지’도 현실적인 이야기가 주는 울림이 입소문을 타면서 24일 방영된 6회는 자체 최고 시청률인 3.8%(닐슨코리아 기준)를 기록했다. 피상적인 인간관계, 벗어나기 힘든 경제적 한계 등 일상의 평범한 고민들을 세밀하게 담아낸 장면과 대사들이 시청자로부터 “또 하나의 인생 드라마가 탄생했다”는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날 추앙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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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나의 해방일지'의 주인공 삼남매 가운데 막내 염미정(김지원)은 공허한 삶을 견디다 못해 성이 '구씨'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외지인 구씨를 찾아가 "날 추앙해달라"고 제안한다. [사진 JTBC]

삼남매 중에서도 미정은 가장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막내다. 늘 조용히 웃음 짓고 있는 캐릭터지만 속은 새까맣게 타버린지 오래다. 사내 복지랍시고 동호회 가입을 강요하는 회사, 겉도는 말만 해대는 동료들, 업무보고에 내려지는 팀장의 무자비한 수정지시 등 하나하나가 미정에게는 버겁기만 하다. 여기에 빚은 미정에게 떠넘겨놓고 전 여친에게 가버린 애인까지. 미정은 어느날 속으로 ‘지쳤다’고 선언한 뒤 꼭 자기처럼 말이 없는, 덩그러니 술만 마시는 구씨를 찾아간다.


“날 추앙해요. 난 한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 구씨가 방에 들어와 사전을 찾아볼 정도로 그 의미도 생소한 ‘추앙’이란 단어에는 단순히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이 아닌,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통해 “한번은 채워지고 싶은” 미정의 절박함이 담겨있다. 그렇게 미정은 성이 ‘구’라는 것 빼고는 아는 것 하나 없는 구씨에게 토해내듯 ‘추앙’을 요구하는 것으로 자신만의 ‘해방’의 첫발을 뗐다.

“쉬는 말이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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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나의 해방일지'의 주인공 삼남매 가운데 첫째 염기정(이엘)은 "아무나 사랑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사실 쉬는 말이 하고 싶다"는 인물이다. [사진 JTBC]

첫째 기정은 온통 사랑 타령인 인물이다. 자신에게만 이성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직장 상사에게 대놓고 이유를 묻고, 자신의 장점에 대해 “진돗개 같다. 배신 안 때리고 쭉 남자를 지킨다”며 어필하는 불도저 같은 여자다. 그런 기정이 핏대 세우지 않고 한숨 쉬듯 뱉은 말이 “쉬는 말이 하고 싶다”는 거였다. “존재하는 척 떠들어대는 말 말고, 쉬는 말이 하고 싶어. 사실 나 남자랑 말이 하고 싶어.”


본인 말마따나 이것저것 재며 남자를 만나온 기정은 이제 ‘아무나’ 사랑하겠다고 선언하지만, 그 말은 결국 말할 때 쉬는 기분이 드는, 그만큼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절규다. 그런 기정이 막힘없이 말이 통하는 ‘애 딸린 이혼남’ 조태훈(이기우)을 만나게 되면서 정말 ‘재지 않고’ 사랑에 몸을 던질 것인지, 그 해방의 기로에 섰다.

“아버지는 인생을 계획한대로 사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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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나의 해방일지'의 염창희(이민기)가 아버지의 타박에 울컥해 "아버지는 인생을 계획한 대로 사셨습니까"라고 반문하는 장면은 많은 2030세대의 공감대를 자아냈다. [사진 JTBC]

편의점 영업직원으로 일하는 창희는 경기도를 ‘계란 흰자’(서울은 노른자)에 비유하는 여자친구로부터 “견딜 수 없이 촌스럽다”는 말을 듣고 이별을 맞이한다. 조건 따져가며 만나는 만남에 질린 창희는 새롭게 다가오는 여자에게도 “내 주제 빤하다”며 등을 돌렸다.


이런 아들이 답답한 아버지가 “긴 세월 아무 계획 없이 살 거냐”고 타박하자 울컥한 창희는 “아버지는 인생을 계획한 대로 사셨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애들한테 꿈이 뭐냐고 묻는 게 제일 싫어. 꿈이 어딨어? 수능 점수에 맞춰 사는 거지.” 창희의 항변은 열심히 계획을 세우고 살아도 목표는 늘상 저 멀리 달아나 있는, ‘꿈꾸고 살라’는 말이 사치가 된 2030세대의 갑갑함을 대변해준 대사로 공감대를 얻었다.

“한번도 안 해봤던 걸 하면 다른 사람이 된다”

다짜고짜 ‘추앙’을 제안한 미정에게 구씨는 “추앙하다보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게 확실한 것이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한번도 안 해봤을 거 아니에요. 난 한번도 안 해봤던 걸 하고 나면 그 전하고는 다른 사람이 돼있던데”라고 받아친 미정의 대답도 위로가 되는 명대사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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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나의 해방일지' 5회에서 구씨(손석구)가 염미정(김지원)의 날아간 모자를 줍기 위해 강가를 점프해 건너는 장면은 미정을 향한 구씨의 '추앙'이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역대급 엔딩'으로 회자되고 있다. [사진 JTBC 캡처]

미정의 말처럼 누군가를 전적으로 응원, 즉 추앙하며 한 계절을 보낸다면 뭐가 됐든 그 계절의 끝에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그간 한번도 채워진 적도, 타인을 채워줘 본 적도 없던 두 사람은 결국 팍팍한 삶의 해방구로 서로를 추앙하기로 마음먹는다.

“소몰이하듯 나를 끌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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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나의 해방일지' 6화에서 구씨(손석구)가 염미정(김지원)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장면. [사진 JTBC]

“하는 일 없이 지쳐. 그래도 소몰이하듯이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 단정하게 가보자. 그렇게 하루하루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

구씨와 미정은 서로와 있을 때 조금씩 말이 많아진다. 자신의 속내를 쉽사리 내보이지 않는 미정이지만, 구씨 앞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삶이 즐겁지 않았다고, “80년 인생을 8년으로 압축해 살아도 하나 아쉬울 거 없을 거 같다”고 조곤조곤 털어놓는다. “불행하진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다”는 미정의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며 조용히 안도하게 만든다. 또 미정의 말에 생전 소주 이외의 것은 산 적 없던 구씨가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툭 건네는 장면은 “그 어떤 로맨스보다 설렌다”는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나의 해방일지’에 대해 “드라마가 어떤 역할을 해줘야 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공 평론가는 “최근 쏟아졌던 장르물들은 볼 때는 통쾌하지만, 끝나고 나면 피로도만 남기는 측면이 있다”며 “현실을 솔직하게 그리는 작품은 자기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어 “구씨의 존재도 서서히 드러나면서 재미가 더해질 것”이라며 전망하며 “작가의 전작 ‘나의 아저씨’가 그랬듯 종영 후에 오히려 작품 전체를 오래도록 곱씹어보는 시청자가 많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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