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피 쥐고 브래드 피트 뼈 때렸다, 오스카 빵터진 윤여정 농담
영화 '미나리'로 한국배우 첫 여우조연상
시상자이자 제작사 대표 브래드 피트에
"우리 영화 찍을 때 어디 있었냐" 농담도
1947년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지도 않은 해방 정국에 태어났다. 한양대 재학시절인 1966년 연극배우와 T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흑백TV에서 칼라TV로, 단관 극장이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바뀌는 격변의 반세기를 한국 대중 연기자로 살았다. 일흔 넘어 처음으로 재미교포 2세가 찍는 미국 독립영화에 “도와주는 마음으로” 출연했다. 제작비 200만 달러(약 22억3500만원)의 그 영화 ‘미나리(MINARI)’로 무게 8.5파운드(약 3.55㎏)의 황금빛 오스카 트로피를 쥐었다.
배우 윤여정(74)이 제93회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02년 한국영화사상 첫 아카데미 연기상이다. 윤여정은 25일(현지시간)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주관으로 미국 LA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15번째로 호명된 수상자가 됐다. 아시아 여배우의 이 부문 수상은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 미요시 이후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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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시상식은) 내게 텔레비전으로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여기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다. 나는 경쟁을 믿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글렌 클로스(‘힐빌리의 노래’)를 어떻게 이기겠느냐. 경쟁이란 있을 수 없다. 그냥 내가 운이 좀 더 좋았다. 미국 사회가 한국 배우를 환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백발을 틀어올린 모습에 이집트계 디자이너 마마르할림의 짙은 네이비색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오른 윤여정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같은 소감을 영어로 쏟아냈다. 그는 무대 오른쪽에 서 있던 시상자 브래드 피트를 향해선 “드디어 만났군요. 우리가 털사에서 영화 찍을 동안 어디 계셨나요?”하는 우스개로 좌중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브래드 피트는 ‘미나리’의 공동제작사인 플랜B의 대표다. 윤여정은 ’미나리’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을 비롯한 출연진에게 감사를 전한 후 “내 첫 영화를 찍은 김기영 감독님이 살아계셨다면 기뻐했을 것”이란 말로 소감을 마무리했다.
앞서 미 배우조합(SAG)상과 영국 아카데미상(BAFTA)에서 여우조연상을 잇따라 수상했던 그는 이날 이변 없이 트로피를 쥐었다. 함께 경쟁한 마리아 바칼로바(‘보랏 속편영화’), 글렌 클로스, 아만다 사이프리드(‘맹크’), 올리비아 콜맨(‘더 파더’)은 그의 수상에 환한 미소로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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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작품상 포함 4관왕을 휩쓸었지만 배우 개인의 연기상은 없었다. 전 세계 영화산업의 꽃인 아카데미에서 아시아 배우의 수상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다. 남녀 통틀어 아시아 배우가 아카데미 연기상을 탄 것은 1985년 ‘킬링필드’의 베트남계 미국인 행 앵고르가 남우조연상을 탄 후 36년 만이다. 남녀 주‧조연을 통틀어 비영어 대사로 연기한 배우 중에선 ‘두 여인’(1961)의 소피아 로렌(이탈리아어), ‘인생은 아름다워’(1998)의 로베르토 베니니(이탈리아어), ‘라비앙 로즈’의 마리옹 코티야르(프랑스어) 등에 이어 윤여정이 여섯 번째다. 1947년생인 그는 역대 여우조연상 수상자 중에 ‘인도로 가는 길’(1984)의 페기 애슈크로프트(당시 77세), ‘하비’(1950)의 조지핀 헐(당시 74세)에 이어 세 번째로 나이가 많다.
1980년대 한인 가족의 미국 정착기를 그린 ‘미나리’(감독 정이삭)는 여우조연상을 포함 총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앞서 발표된 감독상과 각본상에선 고배를 마셨다.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스티븐 연은 이날 시각효과상의 시상자로 나서 1991년 ‘터미네이터’ 관람 기억을 회고하기도 했다. 시각효과상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이 차지했다.
봉준호 감독은 이날 시상식장과 화상연결된 서울 메가박스 돌비시네마관에서 감독상을 발표했다. 통역 샤론 최와 함께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후보에 오른 다섯 감독에게 ‘길에서 아이를 붙잡고 감독이란 무엇인가 20초 안에 설명한다면 뭐라고 할 건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면서 차례로 다섯 답변을 소개하기도 했다.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은 “영화는 삶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실제 삶에 스토리텔러는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봉 감독이 한국어로 인용한 이 같은 답변들은 영어 자막과 함께 실시간으로 세계 관객들을 만났다. 감독상은 ‘노매드랜드’의 중국 출신 클로이 자오 감독에게 돌아갔다. 여성 감독으론 두번째, 아시아 여성으로선 첫 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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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남우조연상은 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의 이면을 그린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다니엘 칼루야가 수상했다. 시상식 후반부에 발표될 남우주연상은 지난해 사망한 채드윅 보스만(‘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의 사후 수상이 유력하다.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바이올라 데이비스 역시 여우주연상 수상이 유력시 되고 있다. 이들 모두가 아프리카계 흑인. 예측대로 이들이 수상하면 윤여정과 함께 한 해 아카데미 연기상 전체를 비백인이 수상하는 진기록이 세워진다.
윤여정은 이날 행사 시작 2시간 전인 오후 3시쯤 행사장인 유니언 스테이션에 도착해 '미나리'에 함께 출연한 배우 한예리와 함께 레드카펫에 올랐다. 미국 연예매체 E뉴스가 진행한 레드카펫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 배우로서 처음으로 오스카 연기상 후보에 올랐고, 한국인이자 아시아 여성으로서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역사적인 순간이다. 당연히 우리는 무척 흥분되지만, 나에게는 정말 신나면서도 무척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미나리’의 한국 할머니 순자 역할과 실제 삶이 얼마나 비슷하냐는 질문에는 “사실 저는 (영화에서와 달리) 손자와 살고 있지 않다. 이것이 영화와의 차이점”이란 농담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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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삭 감독과 주연 스티븐 연은 둘 다 나비넥타이에 검은 정장으로 멋을 내고 각자 부부 동반으로 입장했다. 두 사람은 먼 사돈 관계로 정 감독 부친의 조카딸이 스티븐 연의 아내 조아나 박이다. ‘미나리’에서 막내 아들 데이빗을 연기한 앨런 김과 제작자 크리스티나 오도 함께 손을 잡고 레드카펫을 밟았다. 크리스티나 오는 고름이 달린 퓨전한복 정장 차림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200여 후보를 포함한 참석자들에 대해 백신 접종 및 세차례 코로나 검사 등 철저한 방역을 거쳐 대면 행사로 열렸다. 진행을 맡은 흑인 배우 레지나 킹은 “카메라가 돌 땐 마스크 없이, 꺼지면 마스크 착용을 원칙으로 함께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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