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뒤 사랑에 빠진 韓스님, 하버드 나와 예일대 교수된 사연
[백성호의 현문우답]
일미(51) 스님은 미국 예일대 교수다. ‘남부의 하버드’로 불리는 듀크대에서 9년간 동양학ㆍ종교학 교수로 있다가 3년 전에 예일대로 옮겼다. 테뉴어(Tenure)를 받아 정년이 따로 없는 예일대에서 종신 교수가 됐다. 지난 7월에는 예일대 동아시아연구소 소장에 임명됐다. 한국인으로선 처음이다. 잠시 귀국한 일미 스님을 12일 중앙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Q : 한국 스님이 예일대 교수가 됐다. 여러모로 뜻밖이다.
A : “제 삶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16살 때 조계종으로 출가했고 하버드대에서 공부했다. 그러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고, 지금은 자녀를 키우며 일상 수행자의 삶을 산다. 지금은 태고종 소속이다.”
Q : 출가가 무척 빨랐다.
A : “전남 장성이 고향이다. 집안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알코올 중독이었다. 저보다 5살 많은 누이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심장병을 앓았다. 밥 먹다가 쓰러져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술 취한 아버지가 가마니에 말아서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묻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어디에 묻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술에 너무 취해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가 얼마나 속이 썩었겠나. 제가 출가하고 6개월 후에 어머니도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일미 스님은 사춘기 때 반항아였다. 중학교 1학년 때 가출도 했다. 새벽 3시에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독서실에서 청소 등 별일을 다 하면서 1년을 보냈다. 그러다 약수동 달동네에 살면서 수도학원에 다니며 중ㆍ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2년 만에 통과했다. 머리는 좋았다.
그에게는 출가해 스님이 된 삼촌이 있었다.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삼촌은 그를 절로 보냈다. “그냥 두면 제 인생이 삐뚤어질 거라고 보신 거다. 제주도 법화사로 가서 주지 시몽 스님을 만났다. 삼촌 스님의 사숙이었다. 1주일 정도 지냈더니 신도들이 ‘절에 살면서 왜 법복을 안 입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승복을 입었다. 좀 더 지나니까 절에 살면서 왜 머리를 기르느냐고 했다. 짧게 깎았다. 또 좀 있으니까 절에 살면서 왜 새벽 예불에 안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새벽 예불에도 나갔다. 그러다 출가했다.”
Q : 단지 그 이유인가.
A : “그건 아니다. 하루는 은사 스님(시몽 스님)이 새벽 예불을 마치고 방으로 불렀다. 엄하신 분이다. 무릎 꿇고 있으니까 한문으로 된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을 펴놓고 가르쳐 주셨다. 그때 절감했다. 아, 나한테 필요했던 사람이 저렇게 엄한 아버지 같은 분이구나. 그런 사람이 없어서 내가 방황을 했구나. 이분에게 내 인생을 맡기고 제자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래서 출가했다.”
Q : 스승이 아버지의 역할을 한 건가.
A : “그렇다. 아버지의 역할이 있다. 항상 있어주고, 어머니를 사랑해주는 일. 이게 자녀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텃밭이다. 제 삶에는 그게 형성이 안 돼 있었다. 그래서 붕 떠다녔다. 그런데 아버지가 채워주지 못한 삶의 텃밭을 스승께서 채워주기 시작했다. 삶에 대해 질문을 하면 방향을 제시해주셨다.”
시몽 스님은 그에게 “현대 승려는 현대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동국대 불교학과에 들어갔다. 3학년 때는 교환학생으로 일본 교토에 있는 류코쿠(龍谷)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졸업 후 미국 뉴욕에 있는 불광선원으로 갔다. 거기서 절 청소도 하고, 신도들을 태우고 봉고차 운전도 하면서 공부를 했다.
결국 하버드대 대학원에 합격했다. 3년 만에 석사를 마치고, 하버드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5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시절에 승복 입은 그는 ‘사랑’을 만났다. 유대계 미국인 여성 수미 런던(46)이다.
예일대 불교 채플 지도법사인 수미 런던(앞줄 맨왼쪽)이 예일대 불교학생회원들과 함께 두손을 모으고 있다. [사진 일미 스님] |
Q : 처음에 어떻게 만났나.
A : “제가 하버드대에 처음 갔을 때, 수미는 하버드대 불교학생회 회장이었다. 그녀는 산스크리트어 석사 과정에 있었다. 스님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찾아왔다. 불교학생회를 도와달라고 했다. 같이 일을 하면서 친해졌다. 당시에 그녀는 명상을 하며 출가자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Q : 그래도 머리 깎고 출가한 스님이다. 서로 고민이 많았겠다.
A : “만난 지 1년 후에 남녀의 감정이 생겼다. 수미는 내가 스님이란 걸 존중했다. 나도 한국 불교를 위해 일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래서 4년 정도 서로 바라봤다. 그러다 마음을 정했다. 박사 과정에 들어갈 때 은사 스님에게 편지를 썼다. ‘제가 스님 제자가 됐을 때 평생 비구로 살 자신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스님, 허락해 주십시오.’”
두 달간 답이 없었다. 먼저 연락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편지가 왔다. ‘너의 보살과 함께 한국에 와라. 직접 만나봐야겠다.’ 두 사람은 제주도로 갔다. 방 안에서 무릎 꿇고 앉았다. 스승은 아무런 말 없이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10분이 흘렀다. 일미 스님은 “그 10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스승의 첫 마디가 떨어졌다. “인연이 이렇게 됐으니까, 네가 결혼한 승려로 너의 보살과 함께 한국 불교를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한다면 허락하겠다.” 두 사람은 미국의 명상센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은사 스님도 참석했다. 스승의 주선으로 일미 스님은 조계종에서 대처를 허락하는 태고종으로 승적을 옮겼다.
Q : 결혼 생활을 해보니 어떤가.
A : “결혼한 지 17년이 흘렀다. 16살 딸과 14살 아들이 있다. 대개 결혼할 때는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혼하는 사람이 많지 않나. 스님의 결혼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저는 운이 좋았다. 이 사람은 나에게 정말 가까운 도반이다. 설령 제 아내가 아닌 사람으로 보더라도, ‘참 존경할만한 사람이다. 훌륭한 수행자다’란 생각이 든다. ”수미 런던은 현재 예일대 불교 채플 지도 법사를 맡고 있다.
Q : 자녀에게 본인이 갈망하던 삶의 텃밭이 되고 있나.
A : “실제 아이들을 낳고 키워보니 알겠다. 아버지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면 할수록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지 않나. 아이들에게 아버지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면 싶을수록, 내가 아버지처럼 되어간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래서 다시 아버지를 품어야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텃밭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일미 스님은 "결혼한 후에도 수행자의 삶을 제대로 사느냐 살지 않느냐가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라고 말랬다. 김상선 기자 |
일미 스님은 “700명 청중 앞에서 한 시간 동안 감명 깊은 강연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식과 함께 사는 시간은 속일 수가 없다. 나의 수행력과 감정을 감출 수가 없다”며 “가정에서는 항상 진실해야 한다. 감추는 것 없이 대화해야 한다. 가족은 정말 그 자체가 수행처다. 권투로 치면 사각의 링 위다. 그 링에서 아내에게 진실한 남편, 아이들에게 진실한 아빠라는 말을 들으면 성공한 삶이다”라고 말했다.
■ 예일대, 일본어 보다 한국어 배우는 학생 더 많아
미국 예일대에는 동아시아 연구소가 있다. 한국학과 중국학, 그리고 일본학을 연구한다. 중국학 교수는 16명, 일본학 교수는 11명이다. 반면 한국학 교수는 일미 스님뿐이다. 그런데도 일미 스님은 동아시아 연구소의 소장을 맡았다.
예일대는 한국학을 키우려고 한다. 지난 20년간 예일대 학생들이 “한국학 교수를 뽑아달라”는 요청을 계속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본어를 배우는 학생보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 수가 더 많다.
일미 스님은 “예일대에서 교수 한 명 뽑으려면 60억 원(500만 달러)의 기부금이 있어야 한다. 예일대는 그걸 금고에 넣고 투자하며, 그 이자로 교수 연봉을 준다”며 “한국학 교수도 더 뽑고, 한국학 전공도 세우려면 기부금이 절실한 상황이다. 일본학은 그런 기부금이 아주 많다.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을 한다”고 말했다. 예일대 학생들은 졸업 후에 세계 각지에서 지도자 역할을 한다. 한국학을 키우는 게 나중에는 결국 ‘한국의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