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손자들’ 키우는 재미…70세 차붐의 슬기로운 고흥살이
한국 축구의 대명사 차범근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올해로 고희를 맞았지만 한국 축구의 차세대를 이끌 유망주 발굴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전민규 기자 |
“아이들이 공을 차는 모습이 참 이쁘지요. 모두가 사랑스러운 내 손자·손녀들입니다.”
그라운드를 바라보던 ‘노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올해 고희(古稀)를 맞은 차범근(70)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한국 축구의 대명사’인 차 감독은 요즘 전남 고흥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손자뻘 아이들을 가르치는 ‘차붐 할아버지’의 뜨거운 축구 열정 앞에 나이란 숫자에 불과했다.
지난 26일 전남 고흥 팔영체육관에서 열린 FC차붐 풋볼 페스티벌 행사에서 차범근 감독을 만났다. 그는 “고흥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던 중 올해 초 축구교실(FC 차붐)을 열었다”면서 “고흥군과 뜻을 모아 지역 초등학생 1~3학년생 85명을 대상으로 주 2회 무료로 축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게 어느덧 1년이 됐다”고 말했다.
전남 고흥에 축구교실을 연 뒤 손자뻘 어린이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는 차 감독. [사진 풋웍크리에이션] |
전남 고흥군은 다른 농·어촌 지역과 마찬가지로 어린이 수가 급감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6만 명을 살짝 넘는 관내 인구 중 초등학생은 300여 명에 불과하다. 1~3학년은 150여 명이니 관내 초등학교 저학년생 중 절반이 차 감독에게 축구를 배우는 셈이다. 고흥군이 축구교실에 지원하는 예산은 연 5000만원. 차 감독은 이 돈으로 아이들에게 유니폼과 축구화를 지급하고 훈련장 임대료 등 부대 비용을 해결한다. ‘차붐 할아버지’는 또 전북 무주에서도 주말 리그 형태의 ‘리그 붐’를 진행하고 있다. 내년에는 경북 영덕에도 무주와 비슷한 형태의 유소년 리그를 운영할 예정이다.
차 감독이 지방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가진 건 축구가 지역사회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독일에서 직접 체험한 유럽은 사회 분위기가 건강하고 맑았다. 온 마을이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를 함께 즐기며 육체와 정신의 건강은 물론 공동체 의식까지 다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며 “우리나라도 스포츠를 중심으로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차 감독의 대형 걸개그림 앞에서 포즈를 취한 FC 차붐 소속 어린이들. 차 감독은 내년에 경북 영덕에도 ‘팀 차붐’을 만들 계획이다. [사진 풋웍크리에이션] |
차 감독은 현역 은퇴를 앞둔 1988년 서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축구교실을 열었다. 이듬해 은퇴한 뒤 독일 분데스리가 여러 구단의 코치직 제의를 거절하고 귀국해 축구교실 운영에 매달렸다. 축구를 포함해 대부분의 스포츠가 학원 스포츠 중심으로 이뤄지던 시절, 차범근축구교실은 국내 최초의 클럽 축구팀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80년대 축구대표팀 소속으로 재팬컵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가 우리 대표팀 훈련장 인근 잔디구장에서 공을 차는 일본 어린이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잔디 상태와 장비, 훈련 프로그램까지 모두 최고 수준이었다”면서 “현지 관계자로부터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30년 후엔 한국 축구를 반드시 뛰어넘는다는 목표로 아이들을 최상의 환경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고 털어놨다. 차 감독은 또 “그 이후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독일식 유소년 축구클럽 시스템을 한국에 도입하는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실이 바로 내 이름을 딴 축구교실”이라고 덧붙였다.
차범근축구교실 운영 중단을 알린 공고문. [사진 차범근축구교실 인스타그램] |
차범근축구교실은 운동장 사용 문제로 지난해 굿바이 페스티벌 행사를 갖고 운영 중단을 알렸지만, 극적으로 운영을 재개할 수 있었다. 뉴스1 |
지난해 서울에서 운영 중이던 축구교실을 중단할 뻔했던 상황을 겪은 게 오히려 지역 축구 발전에 더욱 매진하는 계기가 됐다. 차 감독은 “축구교실을 운영하던 이촌 축구장 재계약이 불발돼 1500명의 수강생을 가르칠 공간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을 때 아찔했다”면서 “여러 축구인들과 지역 주민들이 한마음이 되어 차범근축구교실 부활을 위해 뛰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이후 이촌 구장 낙찰자가 운영을 포기하며 차 감독은 예전과 같은 장소에서 축구교실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그 상황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학원 스포츠로 출발한 한국 축구가 클럽 위주로 재편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 할 일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고 털어놓은 그는 “축구교실 운영 관련 해프닝을 겪으며 내가 한국축구로부터 받은 은혜를 아직 다 갚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 서울에 머물지 않고 고흥과 무주로 봉사의 영역을 넓힌 것”이라 설명했다.
이어 “서울에서 운영 중인 축구교실의 경우 한여름과 한겨울에 회원 규모 변동이 많았던 예전과 달리 한 차례 해체 위기(?)를 겪은 이후엔 아이들이 좀처럼 그만두질 않는다”면서 “입단 대기자가 2000명에 육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다소나마 규모를 키워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 덧붙였다.
전남 고흥에서 운영하는 FC 차붐 축구교실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취미반으로 운영된다. 훈련장 안팎은 웃음꽃으로 가득하다. 사진 풋웍크리에이션 |
1500명의 회원을 보유한 서울을 비롯해 고흥·무주 등에서 엘리트 선수 육성 대신 취미반을 운영하는 건 국내 축구 지도자들과의 역할 분담을 위해서다. 차 감독은 “축구 감각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린 시절에 공을 가지고 노는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면서 “내 역할은 거기까지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한국 축구의 대들보로 길러내는 건 실력 있는 후배 축구인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고흥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차 감독은 “그림 같은 자연경관과 가족, 가르치는 아이들만 신경 쓰는 삶에 만족한다”면서 “아이들이 번뜩이는 재능을 보여줄 때마다 흥분이 된다”며 활짝 웃었다.
축구 페스티벌 행사에 참가한 아이들에게 기념 메달을 걸어주는 차범근 감독(맨 오른쪽). 사진 풋웍크리에이션 |
차 감독과 손잡고 축구교실을 운영 중인 고흥군은 지역 활성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정동석 고흥군 문화체육과장은 “한국 축구 레전드 차범근 감독이 직접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인근 지역 어린이들 중에서도 등록해 축구를 배우는 인원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규만 고흥군 체육진흥팀장은 “우리 지역에서 봉사하시는 차 감독님을 위해 부족하나마 물심양면으로 돕고자 최선을 다 하고 있다”면서“유자와 나로호 정도가 널리 알려진 고흥군이 ‘축구 유망주 육성의 중심지’로 주목 받는다면 기쁠 것 같다”고 했다.
고흥군의 축구교실 운영 사례를 살펴보기 위해 방문한 무주군의 서종열 체육진흥팀장은 “태권도(태권도원)와 스키(무주리조트) 중심으로 인지도를 높여가던 무주가 ‘차붐 리그’를 통해 축구의 영역을 차츰 넓혀가고 있다”면서 “차범근 감독을 중심으로 고흥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등 상생을 위한 ‘축구 네트워크’를 구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선수와 지도자로 모두 최고의 자리를 경험한 차범근 감독이지만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칠 때 가장 열정적이다. 사진 풋웍크리에이션 |
고흥=송지훈 기자 song.jiho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