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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눈’ 기적 … 실명 50대, 10년 수족돼준 남편 얼굴이 보였다

작년 5월 국내 첫 인공망막 이식

저화질CCTV 수준 시력 회복

수술비 2억 … 아직 건보 안 돼


남편 지난해 암으로 숨지기 전

“이젠 마음 편하게 떠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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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국어대 앞. 이화정(55·여)씨가 인도로 혼자 걸어왔다. 왼손에 지팡이를 들긴 했지만 흐트러지지 않았다. 1년 반 전에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바닷가에서 흐릿하게나마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밤하늘의 별도 봤어요.”


이씨는 이에 앞서 23일 인터뷰에서 지난 여름의 강원도 여행 추억을 떠올렸다. 그는 “아직도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유전성 망막질환 때문에 시력이 서서히 떨어지다 2007년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지난해 5월 국내 최초로 인공 망막 이식 수술을 받았다. 서울아산병원 안과 윤영희 교수가 집도했다. <중앙일보 2017년 6월 30일자 2면>


인공 망막은 일종의 ‘전자 눈’이다. 안경 가운데 소형 렌즈가 앞을 인식해서 허리춤의 휴대용 수신기 겸 컴퓨터 프로세서로 보낸다. 여기서 영상을 데이터로 변환해 안경 옆에 달린 500원짜리 동전보다 좀 큰 외부송신 안테나로 보낸다. 이어 망막에 내장된 칩으로 데이터를 전달하고 마지막으로 시각 중추로 전달된다. 장비 착용 전 망막에 백금 칩을 이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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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의 시력은 저화질 CCTV 수준이다. 수술 직후 시력판의 가장 큰 글씨만 보였는데, 피나는 재활 훈련 끝에 지금은 시력판의 다음 크기 글자까지 볼 수 있다. 사물의 윤곽을 파악하는 정도이지 자세히 식별할 정도는 아니다. 이씨는 1년 반 동안 흑백 구분, 사물 윤곽 파악, 장애물 피하기 등의 재활 훈련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반려견을 데리고 다녔다. 24일 반려견을 다른 데로 보내고 지팡이만 사용한다.

이씨는 혼자서 40분(편도 기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한다. 외대앞역(1호선)~수유역(4호선) 구간을 오간다. 중간에 창동역에서 환승하는 데도 무리가 없다. 수술 전 바깥 생활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에 비하면 엄천난 변화다. 이씨의 시야는 20도(일반인 180도)이고 흑백으로만 구분한다.


망막색소변성증은 인구 4000명당 1명 생긴다. 국내 환자는 1만여 명. 인공망막 이식이 유일한 치료법이다. 이씨를 시작으로 6명이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받았고 모두 합병증 없고 경과가 좋다. 윤 교수는 “이씨 수술 이후 약 350명의 환자가 문의했고, 내년 3~5명이 수술받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장비는 미국에서 개발한 ‘아르구스2’이다. 안전성 검증이 끝나 의료 현장에서 사용된다. 수술 비용은 2억 원 정도. 아직 건강보험이 안 된다. 이씨를 포함해 5명은 서울아산병원이 지원했다. 윤 교수는 “내년에 병원 기금으로 3~5명의 수술비를 지원하겠지만 나머지는 환자가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의 전자눈은 지난해 8월 대장암으로 숨진 ‘남편의 선물’이다. 남편(56)은 이씨가 시력을 잃자 10년 간 아내의 수족이 됐다. 남편은 복지관에 아내를 데리고 다녔고, 서울아산병원이 수술 대상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망설이던 아내의 손을 이끌었다. 이씨는 “수술 후 눈을 떴을 때 남편과 딸의 얼굴이 흐리게 보였다. 그 순간 셋이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고 말했다. 남편의 첫 마디는 “이제 됐다” 였다. 그는 “당신을 두고 (저 세상으로) 가더라도 이제 마음이 덜 아플 것 같다”고 말했다. 수술 후 석 달만에 남편은 세상을 떴다. 남편은 지난해 초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힘든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아내의 전자눈 수술 뒷바라지에 매달렸다. 아내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고 통증 치료를 받다가 편하게 눈을 감았다. 남편은 “아내처럼 눈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을 위해 각막을 기증해달라”고 말하고 서명하고 떠났고 사망 후 누군가에게 기증됐다.


김태호 기자 kim.ta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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