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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오끼] 곤드레와플, 향어백숙…정선 음식이 이렇게 우아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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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의 먹거리는 하나같이 구성진 사연을 품고 있다. 곤드레밥이나 메밀국수나 지금은 건강식으로 통하지만, 실은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던 정선 사람의 고단한 삶이 엿보이는 음식이다. 고한‧사북 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탄구이 고깃집도 탄광 시대 광부들에게 뿌리내린 것이다. 의외의 재미를 발견하게 하는 먹거리도 있다. 향어백숙과 곤드레와플은 정선 음식은 초라하고 심심하다는 편견을 깨는 음식이다. 이야기와 의외성이 있으니 맛 여행이 지루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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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등을 툭, 냄새가 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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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 여행에도 지름길은 있다. 정선에서는 ‘정선아리장시장’부터 들러 가는 게 순서다. 정선을 맛보는 가장 간편하고도 확실한 방법이다. 오일장이 서는 날(매월 끝자리 2‧7일)이면 밥집이며, 전집이며, 떡집이며 시장 곳곳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긴다.


모름지기 시장을 둘러보는 일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생생한 계절감이다. 이맘때 정선아리랑시장의 주인공은 온갖 봄나물이다. 곤드레‧취나물‧참나물‧명이나물‧두릅‧곰취 등등. 나물 할머니들의 좌판마다 갓 뜯은 햇것들이 싱싱한 색과 향으로 손님을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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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이야기’ ‘곤드레이야기’ ‘콧등치기이야기’ 등 정겨운 이름의 먹자골목이 시장 안에 조성돼 있다. 대략 60곳의 향토 음식점이 있는데, 대부분 한자리를 20년 이상 지킨 베테랑이다.


어느 골목으로 가든 ‘콧등치기’ 메뉴가 빠지지 않는다. 콧등치기는 메밀국수다. 면을 후루룩 빨아 당길 때 ‘면발이 콧등을 치고 들어간다’하여 붙은 이름. 호기심에 주문했다가 되레 구수한 된장 육수에 더 반하게 되는 음식이다. 냉면처럼 새콤한 맛을 강조한 냉콧등치기도 별미다.


온갖 부침 요리가 있으므로 간식 고민은 덜어도 좋다. 대부분의 식당이 가게 앞에 무쇠솥 뚜껑을 내놓고 즉석에서 전을 부친다. 들기름을 둘러 메밀전병과 수수부꾸미, 배추전 따위를 지져내는데, 냄새의 유혹을 참아내기가 쉽지 않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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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아우라지(여량면 여량리)는 정선아리랑이 태어난 장소다. 두 강물(송천과 골지천)이 한데 어우러지는 곳이어서 아우라지다. 먼 옛날 이 강물에 목재를 띄워 서울까지 운반했더랬다. 물길이 조양강을 지나 한강으로 나아간다.


뗏목 터는 사라졌지만, 이야기는 남아있다. 여량리의 ‘옥산장’은 정선 아우라지의 굴곡진 사연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아우라지 곁에서 평생을 산 전옥매(87) 여사가 주인장인 여관이자, 식당이요, 박물관이다. 아우라지에서 수십 년간 나른 희귀 수석들이 별채에 고이 모셔져 있다.


“이 물길을 보고 있으면 속이 풀어지고 차분해집디다. 그 덕에 평생 손님을 맞고 밥을 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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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하는 손님에게 내주던 음식이 입소문을 타면서 25년 전 정식으로 식당을 냈단다. 대표 메뉴는 예나 지금이나 곤드레밥이다. 심심산골 정선에서는 예부터 논이 모자라고, 쌀이 귀했다. 해서 들판에 널린 곤드레(고려엉겅퀴)를 섞어 밥을 지어 먹었단다. 곤드레가 웰빙 식재료로 급부상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곤드레는 4~6월 수확한 것이 억세지 않고 먹기 좋다.


옥산장의 부엌을 엿봤다. 쌀 위에 생곤드레 잎과 줄기를 얹고 들기름과 소금을 더해 밥을 지었다. 20여 분 뒤 고소한 향을 내는 밥이 상에 올랐다. 혹시나 하여 제육볶음과 더덕구이까지 곁들이는 정식(1만5000원)을 주문했는데, 밥에 간장양념만 쓱쓱 비벼만 먹어도 훌륭했다. ‘감자붕생이’는 이곳에서 처음 먹어봤다. 으깬 감자와 익반죽한 녹말이 어우러진 향토 음식이다. 보슬보슬하면서도 쫀득한 이것으로 전옥매 여사도 어린 날 주린 배를 달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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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지켜온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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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사람들에게 추천받은 향토 음식 가운데 가장 의외의 것은 향어백숙이었다. 향어는 민물고기다. 회로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민물고기이긴 하나, 찜이나 매운탕으로 먹는 게 보통이다. 마늘·고춧가루 같은 양념이 필수다. 민물고기 특유의 흙내를 없애기 위해서다. 한데 백숙이라면 국물이 하얗다. 괜찮을까.


정선읍 덕송리에 향어백숙 전문집 ‘전영진어가’가 있다. 개성 출신인 전영진(95) 할머니가 1976년 처음 백숙 형태의 향어 요리를 낸 이래 정선 전역에 뿌리내렸단다. 향어에 인삼과 황기를 넣고, 찰옥수수‧감자‧표고버섯‧생강‧우엉 등 20여 가지를 넣어 끓이는 방식이다. 90분가량 끓여 나온 향어백숙(6만원)은 멀건 듯 사골국처럼 진했다. 비린내는 느끼기 어려웠다.


가게는 딸에게서 손자로 어느덧 3대를 내려온다. 전 할머니도 가끔 주방에 든다. 간을 보고, 감자를 깎는 일을 돕는다. 3대 대표 유재진(42)씨는 “할머니 손맛보다 나을 리 없다. 그래서 한 팀씩 정성껏 모시기로 했다. 늘 정성이 중요하다고 배웠다”고 말한다. 빈말이 아니다. 예약 전화가 오면 손님 입맛까지 미리 취재해둔다. 일주일 안에 도정한 쌀로만 밥을 짓고, 식탁에 오르는 채소 대부분을 직접 재배하는 것도 결국 정성의 문제다. 식당은 한 번에 한 팀씩, 하루 8팀만 받는다. 처음엔 까다로운 집이라 생각했다. 차림을 보며 곡진하다 느꼈고, 그릇을 비울 땐 각별해졌다.



18번가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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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883m) 자락에 고한18리란 마을이 있다. 우리네 탄광촌의 역사가 모두 그렇듯, 고한의 과거도 극적이고 비정하다. 화려한 시절이 길지 못했다. 그 많던 탄광이 90년대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마을도 무너졌다. 돈을 보고 몰려들었던 광부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마을은 그렇게 죽어갔다.


‘마을호텔18번가’는 고한18리의 다른 이름이다. 폐광 이후 빈집투성이였던 마을을 주민들 힘으로 다시 꾸몄다. 골목을 치우고, 낡은 집에 색을 입히고, 빈집을 호텔(객실 3개)로 단장해 지난해 5월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이름만 호텔은 아니다. 마을 전체가 호텔 기능을 분담한다. 이를테면 호텔 옆 ‘수작’은 카페이자 조식을 위한 공간이다. 숙박 영수증이 있으면 마을 식당이나 세탁소‧이발소에서 10% 할인을 받을 수 있다. 마을회관 앞 ‘하늘기획’에서는 컴퓨터와 프린트 사용이 공짜다. 들꽃사진관에선 근사한 스냅사진(7500원)을 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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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는 어떨까. 마을 초입 ‘구공탄구이’는 옛 탄광촌의 명맥을 잇는 가게다. 그 시절 광부들은 목에 낀 탄가루를 씻어내야 한다며 뻔질나게 고깃집을 드나들었다. “삼겹살이나 한우를 연탄불에 구워 먹으며 피로를 풀었다”고 기억하는 안훈호(44) 사장 역시 광부의 아들이다. 그 시절의 추억이 없어도 연탄구이 삼겹살(200g, 1만4000원)은 맛있었다. 육즙을 가둬 고소했고 진한 불향이 났다.



나물 요리도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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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음식은 대개 볼품이 없다. 맛있게 먹을 순 있지만,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에 자랑할 만한 비주얼은 못 된다. 산촌에서 자란 나물과 약초가 주 식재료인지라, 음식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향토적이고 구수하다’와 ‘투박하고 촌스럽다’는 정말 한 끗 차이다.


정선 음식도 우아할 수 있다. 북평면 ‘파크로쉬’ 안에서만큼은 적어도 그랬다. 파크로쉬는 2018년 개관 때부터 ‘고품격 웰니스 리조트’를 강조하고 있다. 요가‧명상‧스파‧숲치유 등 다양한 웰니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무엇보다 먹거리 개발에 공을 쏟고 있다. 건강도 힐링도 잘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니 당연한 일이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로쉬카페’에는 곤드레 와플 세트(1만8000원)가 있다. 곤드레 분말을 넣어 만든 와플은 반으로 쪼개면 녹색 속살을 드러낸다. 씁쓸한 맛은 사라지고 특유의 향과 고소한 맛만 와플에 남는다. 시럽 대신 인근 농장에서 채취한 벌꿀 집을 올려 먹는다. 트뤼프 아이스크림과 잘게 부숴 구운 메밀도 곁들인다.


‘포르치니’라 불리는 이탈리아 야생 버섯에, 정선 표고와 이슬 송이 버섯을 곁들이는 ‘풍기피자(1만7000원)’도 있다. “곤드레도 표고도 맛과 향이 유별나다. 이런 식감과 향을 내는 와플과 피자는 어디에도 없다”고 신유섭 셰프는 말했다.


정선=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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