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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중앙일보

육사의 청포도 익어가는 고장 어디?…안동·포항 싸움 흥미진진

중앙일보

경북 안동과 포항이 이육사의 대표작 '청포도'가 제 고장에서 쓰인 시라고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이른바 '청포도 전쟁'이다. 누가 이기든, 문학 작품을 소재로 한 원조 논쟁이 흥미로워 보인다. 사진은 지난 14일 안동에서 촬영한 청포도. 해마다 8월 말에 수확한다. 손민호 기자

이런 싸움은 재미있다. 아니, 되레 권장할 만하다. 과거 경북의 갯마을 영덕과 울진이 대게 원조 고장을 놓고 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다. 소송까지 갔었는데, 결국 동해의 겨울 별미 대게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이 싸움도 경북의 두 고장 안동과 포항이 맞선다. 안동과 포항의 대결은 대게 놓고 벌이는 다툼보다 고상해 보인다. 국민 애송시로 통하는 이육사(1904∼44)의 ‘청포도’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어서다. 포항은 일제 강점기 육사가 포항의 포도원을 방문했다가 ‘청포도’ 시상을 얻었다고 주장하고, 안동은 ‘청포도 익어가는 내 고장’을 그리는 시니 당연히 육사의 고향인 안동 것이라고 말한다.


싸움을 지켜보는 입장에선 흥미진진하다. 저마다 주장에 일리가 있어서다. 안동과 포항이 제 고장의 ‘청포도’를 알리려 애쓰는 모습도 기특하다. 육사가 ‘청포도’를 발표한 1939년은 음력을 쓰던 시절이다. 하여 ‘청포도’에서 ‘7월’은 지금의 8월이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안동과 포항의 ‘청포도 전쟁’ 실황을 중계한다. 이참에 문화 콘텐트를 활용한 지역관광이 활성화하기를 바란다.

■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원전주해 이육사 시전집』, 박현수, 예옥, 2008

포항의 청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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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영일동 '청포도 문학공원' 주변의 마을 풍경. 담벼락에 청포도 그림을 그려 넣었다. 손민호 기자

육사는 시인이기 전에 독립운동가였다. 그것도 항일무장투쟁단체 의열단 소속이었다. 육사는 의열단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 출신이다. 의열단에서 육사는 권총 사격은 물론이고 폭탄 제조 및 투척, 심지어 변장술도 배웠다. 1927년 처음 옥살이를 한 뒤 1944년 중국 베이징의 감옥에서 쓸쓸히 숨을 거둘 때까지 육사는 무려 17번이나 감옥 생활을 했다.


하여 청년 육사는 한국에 머무를 때 요양을 하거나 자주 여행을 떠났다. 특히 포항과 인연이 두터웠다. 포항에는 집안 형님도 계셨고, 문학을 하는 벗도 여럿 있었다. 1930년대 육사가 포항을 자주 들렀던 건 여러 기록에서 나오는데, 특히 1936년의 포항 여행이 중요하다. 그때 포항의 포도원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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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옛 미쯔와 포도원 자리는 현재 해군 부대가 들어섰다. 해군 부대가 운영하는 골프장 3번 홀의 이름이 '이육사홀'이다. 청포도 시비도 세워놨다. 손민호 기자

당시 포항에는 동아시아에서 제일 큰 포도원이라는 ‘미쯔와(三輪) 포도원’이 있었다. 여기에서 일제가 와인을 생산했다고 한다. 포항시 동해면 도구리 일대의 포도원은 한때 약 60만 평(약 2㎢)이나 됐었고, 3만2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일을 했었다. 옛 포도원 땅 대부분에 지금은 해군 부대가 들어섰다.


바로 이 포도원에서 육사가 ‘청포도’를 떠올렸다고 포항문인협회는 주장한다. 육사가 단순히 포도원을 방문했다는 사실보다 포항에서 더 중요하게 여기는 건 육사가 부린 문장이다. ‘청포도’ 3연 1행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라는 시구를 보자. 바다가 등장한다. 안동에는 바다가 없지만, 포항에는 있다. 미쯔와 포도원은 바다가 지척이다.


지난 13일. 지금은 해군 골프장으로 활용 중인 옛 포도원 자리를 방문했다. 해군이 골프장 3번 홀을 ‘이육사홀’이라 이름 짓고 3번 홀 어귀에 ‘청포도’ 시비를 세워 기린다는 사실을 포항 시인 윤석홍(68)으로부터 전해 듣고 해군의 취재 협조를 받아냈다. 현장에 나온 골프장 관계자가 “옛날에는 3번 홀이 골프장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었다”며 “영일만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전망 포인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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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대표 명소 호미곶에 설치한 청포도 시비.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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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동해면사무소 앞에 설치된 청포도 시비. 손민호 기자

그 바다가 공교롭게도 연오랑세오녀 전설이 내려오는 바다다. 연오와 세오 부부가 일본으로 건너가자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는 신라 설화의 현장이 옛 포도원에서 내다보이는 갯가라는 사실은 의외로 중요하다. ‘청포도’를 다시 읽자. 2연 1행에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라는 시구가 나온다. ‘이 마을 전설’이 연오랑세오녀 설화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포항에서는 철석같이 믿는다.


포항의 ‘청포도’ 사랑은 진심이다. 군부대 골프장은 물론이고, 옛 포도원 자리 끄트머리의 동해면사무소 앞에도 ‘청포도’ 시비가 있다. 포항 최고 관광지 호미곶에도 ‘청포도’ 시비를 세웠고, 해군 부대 건너편 일월동에는 ‘청포도 문학공원’을 조성했다. 문학공원은 실제 청포도를 키우고, 공원 주변 집 담벼락에 청포도 그림을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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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기자

안동의 청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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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이육사문학관 어귀에 있는 이육사 동상. 안동은 육사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이다. 손민호 기자

육사가 ‘청포도’를 제 고장 포도원에서 얻었다는 포항의 주장에 안동은 어떻게 생각할까. 결론은 간단하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입장이다. 육사는 안동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안동 시인이기 때문이다.


이육사는 진성 이씨 집안이다. 퇴계 이황(1501~70)의 14대손이다. 육사가 어릴 적 살았던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됐지만, 옛 원촌마을 근처에 지금도 진성 이씨 사람이 모여 산다. 이육사문학관, 퇴계종택 다 가까이에 있다. ‘육사(陸史)’는 필명이다. 본명은 이원록이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배달사건에 연루돼 육사가 첫 옥살이를 했을 때 수인번호가 ‘264’였다는 데에서 연유했다.


육사 집안의 내력을 줄줄이 읊는 이유가 있다. ‘청포도’가 포항 시라는 주장은 일제 강점기 안동에는 청포도가 없었다는 전제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안동과 달리 포항은 일제 강점기 대규모 포도원이 있었으니 ‘청포도’는 포항에서 착상된 게 맞다는 논리다. 포항의 주장에 대해 안동 시인 안상학(62)은 조선 시대 자료와 탐문 취재를 통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육사는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 육사가 일제 포도원을 갔다가 ‘청포도’를 썼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육사는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시라고 밝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안동에도 청포도가 있었다. 안동 토박이는 다 기억한다. 옛날 마을 우물가에 청포도 넝쿨이 드리웠던 풍경을. 몇몇 명문가는 집 마당에서 청포도를 길렀다. 그 어릴 적 기억에서 육사 필생의 역작이 잉태했다. 육사의 원촌마을에도 청포도가 있었다는 진성 이씨 사람의 증언도 확보했다. 안동에는 ‘접빈객’ 문화라는 게 있다. 손님이 오면 절대 그냥 보내지 않았다. 귀한 손님이 오면 귀한 음식을 내놨다. 청포도도 은쟁반에 담아 대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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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을 앞둔 청포도. 안동의 청포도 밭에서 촬영했다. 손민호 기자

실제로 조선 시대 안동에서 청포도를 길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1799년 안동 하회마을의 류의목(1785∼1833)이 지은 『하와일록』에 ‘양주 할아버지가 청포도 5송이를 가지고 와서 주었다. 아버지가 수차례 달게 씹어 먹었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하회마을에서 청포도를 길렀으니, 통혼과 학맥으로 이어진 안동의 다른 명문가도 청포도를 길렀다는 게 안 시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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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청포도와인 네 종류. 세상의 어떤 시는 술을 낳기도 한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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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청포도와인은 '광야' '절정' '꽃' '한별' 등 육사의 시에서 이름을 받아온다. 손민호 기자

일제 강점기에는 눈에 잘 안 띄었을 지 몰라도, 시방 안동은 청포도밭 천지다. 약 3만5000㎡ 면적의 청포도밭에서 연 40t의 청포도가 생산된다. 2019년 판매를 시작한 ‘264청포도와인’ 덕분이다. ‘264청포도와인’을 운영하는 이동수(63)씨도 육사의 친척, 그러니까 진성 이씨 집안이다. 264청포도와인 와이너리와 청포도밭도 이육사문학관 근처에 있다. 264청포도와인은 모두 4종류다. ‘절정’ ‘광야’ ‘꽃’ ‘한별’. 모두 육사의 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다.


안상학 시인이 포도나무 아래로 가보라고 했다. 포도알 주렁주렁 열린 포도나무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포도나무 그늘에서 고개를 드니 알알이 맺힌 포도알 너머로 바다처럼 푸른 하늘이 비쳤다. 저 하늘이 육사의 하늘이었을까? 그럼 전설은? 안 시인은 “전설은 안동에도 넘쳐난다”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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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기자

안동ㆍ포항=글ㆍ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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