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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문서위조학과 통했다…봉준호가 넘은 '1인치 장벽'

[강혜란의 사소한 발견] 영화 살리고 망치는 자막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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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의 장벽, 장벽도 아니죠.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 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통역: "Once you overcome the one inch tall barrier of subtitles, you will be introduced to so many more amazing films.")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 101년 사상 최초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한 말이다. 트로피를 한 손에 든 봉 감독의 의미심장한 한마디는 즉각 인터넷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그날 밤의 가장 훌륭한 수상 소감이었다” “이 세상 90%, 아니 영어사용자 90%에게 한방을 먹였다” “같은 급이라도 비영어권 영화들이 히트하려면 10배 이상 노력하는 건 맞다”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더불어 봉 감독이 영어권 사용자들에게 ‘자막 장벽’을 거둘 것을 호소한 예전 인터뷰도 소환되고 있다. 한 해외 트위터 사용자가 올린 영상 캡처본에 따르면 봉 감독은 “한국에서 외국 영화는 더빙 되느냐”는 질문에 “한국 사람들은 자막 읽는 데 능숙하다. 더빙되는 일은 없다”고 답한 뒤 “아마 서구 관객들도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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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 특히 미국인들은 자막 읽기를 싫어한다. 할리우드 스타 헬렌 미렌도 2014년 ‘로맨틱 레시피’(The Hundred-Foot Journey)를 찍을 때 이를 거론한 바 있다. 이 영화가 프랑스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데도 대사가 영어로 이뤄진 것과 관련해 “대다수 미국 대중은 자막으로 된 영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오하이오에 사는 사람들도 가서 영화를 봐야 할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자국 영화와 TV드라마에 익숙한 미국인들이 굳이 자막까지 달린 외국어 영화를 보는 수고를 하지 않을 거란 의미다.



'문서위조학과' '짜파구리' 맛깔난 번역


이런 상황에서 ‘기생충’의 수상과 흥행에 한몫 한 게 맛깔 나는 번역 자막이라는 덴 이견이 없다. 지난해 5월 칸영화제 출품에 맞춰 이뤄진 번역은 한국에 20년 이상 거주한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의 솜씨다. 이미 봉 감독의 주요 작품 번역을 해온 바 있는 그의 실력에다 ‘봉테일(봉+디테일)’이라고 불리는 봉 감독이 세심하게 행간을 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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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칸영화제 때부터 화제가 된 게 ‘서울대 문서위조학과’와 ‘짜파구리’ 번역이다. 딸 기정(박소담)의 가짜 졸업장 제작 솜씨에 반한 아버지 기택(송강호)이 “야…. 서울대학교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거 없나?”고 묻는데 영어론 이를 “Wow, does Oxford have a major in document forgery?”라고 옮겼다. 서울대를 세계적인 명문대 옥스퍼드로 바꿔서 이해도를 높였다.


연교(조여정)가 충숙(장혜진)에게 전화로 하는 질문, “저기 아줌마, 짜파구리 할 줄 아시죠?”는 “Listen, do you know how to make ram-don?”으로 옮겼다. 의역된 ‘람돈’(ram-don, 라면+우동)이 신기했는지 영화 개봉 후 ‘람돈 만드는 법’이라는 유튜브가 줄줄이 올라왔다. 다행히 ‘람돈’이 실은 한국의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합친 ‘짜파구리’(jjapaguri)라는 점도 함께 소개됐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에선 어떻게 번역됐을까. 국내 배급‧투자사인 CJ엔터테인먼트 측은 “영어 자막은 국내에서 작업해서 넘겼고, 영어권이 아닌 국가는 영자막에 기반해 자국 배급사가 번역했다”고 설명했다. 즉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 바탕의 중역이 이뤄졌단 얘기다.


실제로 ‘사소한 발견’이 해외 거주 페이스북 유저들을 통해 알아본 결과 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 등 대부분이 ‘옥스퍼드대’와 ‘람돈’을 그대로 사용했다. 예외적인 곳이 일본이다. 10일 개봉한 일본에선 각각 ソウル大学 文書偽造学科, 즉 ‘서울대학교 문서위조학과’와 ジャージャー. ラーメン(짜짜라멘)이란 자막이 나왔다고 한다. 한국 짜장면을 ‘짜짜면’으로 부르는 일본이다보니 ‘람돈’보다는 짜파구리에 가깝게 옮긴 편이다. 상호 간의 문화 이해 덕에 가능한 직설적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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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로 시작, '목소리'가 쌓은 장벽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의 근대 영화를 시연했을 때 짤막한 흑백 이미지엔 어떤 소리도 담겨있지 않았다. 현실의 복제라는 의미에서 영화에 영상과 소리를 동시에 담기까진 수십년이 더 걸렸다.


1926년 미국 워너브러더스 영화사가 처음으로 이 동기화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음악과 음향이 삽입된 첫 영화가 '돈 주앙'이다. 1927년엔 사람 목소리가 담긴 '재즈 싱어'가 나왔다. 유성영화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 찰리 채플린도 말년엔 ‘위대한 독재자’(1940), ‘라임라이트’(1952) 같은 유성영화 걸작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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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영화는 곧 ‘바벨탑’이 됐다. 각자 자국어 영화를 만들면서 애초 이미지로 통하던 영화에 ‘언어 장벽’이 생겼다. 유럽 같은 영화예술의 본산, 미국 같은 영화산업의 중심부에서 자막은 거추장스러운 ‘관람 장벽’이 된다. 이렇다 보니 미국·프랑스·이탈리아 등에선 외화 상영 때 자국어 더빙 선호도가 높은 편이다. 자막 상영을 오히려 찾기 힘들 정도다.


이것도 번거로우면 판권을 사서 자국어로 리메이크 한다. 한국 영화의 경우,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미국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만들어진 것을 비롯해 ‘엽기적인 그녀’가 ‘마이 새시 걸’((My Sassy Girl)로, ‘장화 홍련’이 ‘안나와 알렉스: 두 자매 이야기’(The Uninvited) 등으로 바뀌어 제작됐다. ‘기생충’도 조만간 미국 HBO에서 드라마로 제작된다고 하니 과연 한국적인 '느낌적 느낌'이 제대로 살지 주목할 일이다.



'어벤져스' "가망이 없어" 오역 논란


한국은 봉 감독이 얘기한대로 영화 자막에 익숙할 뿐 아니라 오역을 잡아내는 ‘매 같은 눈’도 발달했다.


최근에 영화 덕후(매니어)들을 가장 들끓게 한 사례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법을 통해 타노스와의 전투를 미리 본 후 아이언맨에게 “We're in the endgame”이라고 한 대사가 상영관 자막에서 “가망이 없어”라고 나왔다. 마블 팬들은 이게 “우리는 엔드게임에 진입했어” 혹은 “이제 최종단계야”로 옮겨져야 했다며 영화의 맥락 전체를 뒤흔드는 오역을 한 번역자를 퇴출시켜달라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겨울왕국2’에서도 오역 논란이 제기됐다. 극중 안나가 엘사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긴 ‘charade’라는 단어가 자막 버전에서 '가면 무도회'로 번역됐지만 또 다른 의미인 '제스처 놀이'가 돼야한다는 주장이다. 극 초반 제스처 놀이를 즐기는 자매의 모습이 이미 나왔던 데다 똑같은 단어가 더빙 버전에선 ‘제스처 놀이’로 번역된 게 근거다.


한편 넷플릭스 제작‧배급 영화인 ‘두 교황’에서도 오역 지적이 나왔다.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한 베네딕토 16세가 베르골리오 추기경(훗날 프란치스코 교황)과 바티칸 성당에서 대화하던 중 “Silence!”를 외치는 장면이다. 신을 믿고 기도했는데 “신의 응답이 없었다”고 옮겨져야 할 대사가 영화에선 추기경을 향해 “조용히 해”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나왔다. 종교를 뛰어넘은 두 인간의 성찰이 담긴 대화가 훼손되는 아쉬움이 있다.



한국 좀비물 '킹덤' 11개 외국어 더빙돼


앞서 언급했듯, 요즘은 한국 작품도 영미권을 비롯해 해외로 널리 퍼지고 있다. 전 세계 190개국에 서비스되는 넷플릭스는 그 주요 플랫폼 중 하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된 한국형 좀비물 ‘킹덤’은 무려 27개 언어로 자막이 들어갔다. 한국어 외 11개 언어로 더빙도 됐다. 자막을 읽기 싫어하는 외국인들을 위한 서비스다. 유튜브(youtu.be/iiki76Fg7Vc)에 올라온 하이라이트만 봐도 나라별 색채가 물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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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양한 언어로 재현되는 조선 좀비물을 보고 있노라면, ‘미드’를 보면서 영어 실력을 키웠던(혹은 키우려 한)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봉 감독이 말했듯 아무리 우리가 '시네마'라는 하나의 언어를 쓰고 있다 해도 소통엔 서로 노력이 필요하다. 요즘은 미국에서도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외국어 구사력을 키우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데, 그런 의미에서 BTS(방탄소년단)의 전 세계 ‘아미’ 여러분, 한국어 공부를 응원합니다. 파이팅!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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