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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막장' 찍는 지상파…김치·된장 '싸대기' 만족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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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명품’ 대우를 받는 K-드라마지만 내세우기 민망한 드라마가 하나 있다. 바로 지상파의 일일드라마다. ‘막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지 어언 10여년. 그 불명예스러운 허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일일드라마 제작발표회에 가보면 늘 “막장 드라마 아니냐”는 질문이 나오고, 그때마다 제작진은 “결코 막장이 아니다”고 답한다. 하지만 드라마를 막상 보면 어김없이 개연성 없는 전개와 선정적 설정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간 부단히 반복돼온 촌극이다.


슬프게도 이 상황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나도 엄마야’ ‘비밀과 거짓말’ ‘끝까지 사랑’ 등 지난해 초부터 현재까지 지상파 3사(SBSㆍKBS2ㆍMBC)가 방송한 일일드라마 14편을 살펴보니 진부한 설정이 약속한 듯 반복됐다(근현대사 배경 드라마 TV소설 제외). 대표적으로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증’ ‘불륜’ ‘불치병’ ‘살인(청부)’ 등이다. 물론 이들이 나온다는 것 만으로 ‘막장’이라 규정할 수 없지만 반복 빈도는 그 상투성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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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은 가장 많이 나오는 일일드라마의 ‘단골’이다. 14편 중 무려 13편(93%)에서 등장했다. 자신을 보살펴주던 어머니가 알고 봤더니 계모였단 사실을 ‘뜬금없이’ 알고 충격 받거나(KBS2 ‘차달래 부인의 사랑’), 손녀가 핏줄이 아닌 입양아였단 사실을 20년 만에 안 대기업 회장이 손녀를 내쫓는 식(MBC ‘비밀과 거짓말’)이다. 출생의 비밀만큼이나 불륜ㆍ살인도 각각 12편(86%)에 등장하며 반복됐다. 지난 4월 방송된 SBS ‘해피시스터즈’에는 아내에게 내연녀와의 불륜을 들킨 남편이 아내 지시에 따라 직접 내연녀 자궁을 적출하는 장면이 담기기도 했다. 심지어 이 드라마는 청소년시청보호시간대인 오전 8시40분에 방송됐다.


오후 7시 50분 방송 중인 KBS2 ‘끝까지 사랑’에서는 욕망으로 점철된 악녀 강세나(홍수아 분)가 살인ㆍ납치ㆍ폭행 등 온갖 악행이 저지르며 ‘폭주’하는 중이다. 애청자 신모씨는 KBS 홈페이지에 “국민의 시청료로 운영하는 방송사가 납치ㆍ폭력ㆍ살인이 즐비한 저질 방송을 방송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기억상실증’(10편·71%)과 ‘불치병’(6편·43%) 또한 자주 반복되며 설득력 없는 전개를 이끈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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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가 이처럼 자극적이고 설득력 없는 설정을 반복하는 이유는 뭘까. 드라마 보조작가 신모(31)씨 얘기다. “방송 기간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일일드라마는 보통 100~120회로 5~6개월 방송한다. 한 달분을 미리 찍고 방송에 들어가도 작가는 매주 일주일 치 대본을 뽑아야 한다. 조금씩 밀리다 보면 '쪽대본'을 날리기도 하는데 그런 촉박한 상황에서 주인공이 상황을 풀어나갈 '멋진'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 같은 설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생방송’ 수준으로 이뤄지는 드라마 제작 구조가 이를 부추긴다는 얘기다.


시청률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20년 경력의 지상파 드라마 PD는 “시청률 답보 상황에 있을 때 회심의 카드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 곧장 시청률이 오른다”며 “기획 단계에서 막장 하지 말자고 합의해도 시청률 부담이 오면 슬금슬금 '누구를 죽여야 하나' 하면서 넣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논문 ‘드라마제작 과정에서 벌어지는 생산자 사이의 갈등연구’(김미숙·홍지아)에서 심층 면접에 응한 익명의 일일드라마 작가도 논문에서 “드라마가 빨리 터져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 정신적 여유가 없다. 일상성을 쓰면 채널이 돌아갈까 봐 마음이 급했다”고 말했다. 40~50대 고정 시청층이 있다는 점 또한 참신한 스토리를 개발할 필요성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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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막장드라마=악'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조건 나쁜 건 아니라는 목소리도 있다. 일일드라마의 유래를 좇다 보면 1920년대 시작된 미국 라디오 통속극(Soap opera)에 이르는데, 가사 일을 하면서도 집중할 수 있는 단순한 플롯과 자극적인 이야기의 통속극을 통해 당시 주부들이 일상의 고단함을 달랬다. 배우 원기준은 2014년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아침 드라마는 다른 일 하면서 귀로 듣는 경우가 많아 오디오가 굉장히 중요하다. 화를 낼 때 소리를 질러줘야 본다"고 말했는데 이와 같은 맥락이다.


한 작가는 “연륜 있는 작가가 일일드라마를 맡는 경우가 많은데 글 못 쓰는 분들이 아니다. 클리셰는 복잡하지 않게 몰입을 돕는 일종의 약속이라고 볼 수 있다”며 “분명한 선악 구도와 권선징악을 통해 오락적 기능을 수행하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드라마평론가)는 "정말 악랄한 악인과 그 악인이 시원하게 단죄되는,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은 상대적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낀다"며 "'막장'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마냥 동화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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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클리셰와 선정적 설정을 개연성 없이 반복하는 일일드라마를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게 다수 의견이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예전에 비판받던 막장 요소들이 이제 극의 기본 구성이 된 지경에 이르렀다"며 "결국 세대가 바뀌는 과정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을 텐데 그 과정에서 출구 전략으로 더 강한 자극을 불러와 드라마 시장을 오염시킬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장 지금 구조를 유지하며 노동 시간 52시간제를 맞으면 어떻게 될지 걱정스럽다"고 덧붙였다.









실제 일일드라마 시청률은 3사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하락하고 있다. 지난해 초 방송한 드라마와 현재 드라마를 단순 비교했을 때 KBS2는 23.7%(닐슨코리아)에서 15.7%로, SBS는 14.5%에서 10.3%로 떨어졌다. MBC는 비슷한 수준이지만 당시 '행복을 주는 사람'(10.9%)이 흥행에 실패한 뒤 잇따른 후속작 '돌아온 복단지'와 '전생에 웬수들'이 각각 14.3%, 12.4%를 기록했다. 현재 '비밀과 거짓말'은 10.5%다. 물론 모든 TV 시청률이 하락 추세지만 일일드라마는 '고정' 시청층의 이탈이기에 위기감의 농도가 다르다.

지상파 측은 전체 드라마 대비 일일드라마가 적어 부정적 영향이 작다지만 편성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지상파 3사는 서로 방송 시간대를 비켜가며 고정 시청층을 '나눠 먹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전 7시50분 시작하는 MBC '비밀과 거짓말' 재방송이 끝난 뒤 오전 8시40분 SBS '나도 엄마야'가 시작하고, 이 드라마가 끝날 때쯤인 오전 9시 KBS2 '차달래 부인의 사랑'이 시작되는 식이다. 저녁 시간대도 상황은 비슷하다. 특히 MBC는 지난 3월 아침 드라마를 폐지했지만 그 자리에 저녁 일일드라마를 재방송하고 있다. 즉 일일드라마 시청자는 매일 3편 이상 일일드라마를 챙겨보게 된다는 얘기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일일극에서 반복된 출생의 비밀 설정이 계부·계모 등 재혼 가정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키기도 했다"며 "일일극의 역할을 수긍하지만 모두가 하나 같이 선정적·폭력적 클리셰를 반복하는 방법론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때 일일드라마를 했던 tvN 등 유료방송이 왜 지금은 하지 않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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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진호의 이나불]은 누군가는 불편해할지 모르는 대중문화 속 논란거리를 생각해보는 기사입니다. 이나불은 ‘이거 나만 불편해?’의 줄임말입니다. 메일, 댓글, 중앙일보 ‘ 노진호’ 기자페이지로 의견 주시면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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