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객들 다 태우고 눈청소...그 뒤 꼭 지켜야 하는 시간 'HOT'
디아이싱 특수차량. 사진 대한항공 |
겨울철에 정상적인 항공기 운항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뭐니 뭐니 해도 '눈(snow)' 일 겁니다. 적은 양이면 괜찮지만, 폭설이라도 내리면 비행편이 대거 지연되거나 아예 취소되기도 하는데요.
눈이 오면 공항은 크게 두 가지 작업으로 분주해집니다. 우선 활주로와 유도로 제설작업을 해야 합니다. 도로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항공기가 이동하고 뜨고 내리는 데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인데요.
인천공항의 경우 제설작업이 필요한 면적만 국제규격 축구장(100m×70m) 1140여개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최첨단 제설장비를 동원한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활주로에서 제설작업을 할 때는 순차적으로 하나씩 활주로를 폐쇄하고 눈을 치우기 때문에 항공기 이착륙도 지연될 수밖에 없는데요. 평소보다 사용 가능한 활주로 수가 줄어드는 탓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작업은 바로 ‘디아이싱(De-Icing)’인데요. 항공기 표면에 쌓인 눈과 서리, 얼음을 깨끗이 제거하고 다시 얼어붙지 않도록 하는 작업입니다. 고온의 특수용액을 고압으로 항공기에 분사하는 방식으로 얼핏 '세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비행기 눈과 얼음 치우는 '디아이싱'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안전 때문인데요. 만일 비행기에 쌓인 눈과 얼음 등을 제거하지 않고 이륙을 시도하게 되면 날개 및 동체의 가동 부분이 제 기능을 못 하고, 항공기 날개의 공기역학적 특성도 지장을 받게 돼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특히 항공기는 날개의 위와 아래를 공기가 통과하면서 생기는 기압 차(양력)를 이용해서 이륙하는데 날개 표면에 눈이 얼어붙어 있으면 공기 흐름이 불규칙해져 제대로 양력을 얻기 힘들어 최악의 경우 추락 위험까지 있다고 합니다.
국토교통부가 만든 운항기술기준에 '항공기운영자는 항공운송사업을 위한 운항에 있어 서리, 얼음 또는 눈이 항공기에 부착되는 것이 예상되는 경우 지상에서 방빙 또는 제빙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항공기를 이륙시켜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디아이싱 작업 모습. 사진 대한항공 |
디아이싱 작업은 항공사와 계약을 맺은 지상조업사에서 담당하는데요. 지상조업사들이 갖춘 디아이싱 차량들은 특수기능을 가진 관계로 가격이 7억~12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비행기의 눈을 치우는 작업은 활주로가 아닌 항공기 전용 제빙처리장(제방빙장)에서 이뤄집니다. 항공기 위에 뿌리는 디아이싱 용액이 환경오염을 일으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폐수처리 시설을 갖춘 전용 처리장을 만든 건데요.
인천공항, 디아이싱 작업장 25개 운영
인천공항은 두 개의 여객터미널 사이와 활주로 옆 등에 모두 25개의 제방빙장을 두고 있습니다. 항공기별로 제방빙장을 배정하는 건 계류장 관제탑에서 담당합니다.
제방빙장에선 통상 항공기 한 대에 디아이싱 차량 2대가 동원돼서 작업하게 됩니다. 시간은 비행기 크기에 따라 대략 25분~35분 정도 소요된다고 하는데요. 디아이싱 장비가 충분치 않아 한대만 동원되거나 하면 시간은 2배 이상 걸릴 겁니다.
이 같은 디아이싱 작업은 승객을 다 태운 뒤에 시행하는데요. 그러다 보니 비행기 탑승에서부터 이륙까지 걸리는 시간이 좀 더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승객들 입장에서는 "승객이 타기 전에 미리 눈 다 치우고 오면 시간도 절약되고 할 텐데 왜 그렇게 안 하느냐"고 의문 또는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승객을 다 태운 뒤 눈을 치우는 이유는 바로 '방빙 지속시간(Holdover time)' 때문입니다. 줄여서 'HOT'라고 부르는데요. 디아이싱 작업 때 다시 눈이 얼어붙지 말라고 뿌리는 방빙액의 효능이 유지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만일 이 시간을 넘기도록 이륙을 하지 못하게 되면 다시 디아이싱 작업을 받아야만 합니다. HOT는 주로 미국연방항공청(FAA)의 기준을 따르는데 항공기 기종과는 상관없이 작업 때 쓰는 방빙액 타입과 혼합비율, 강수 종류, 항공기 표면온도 등에 따라 달라집니다.
HOT 초과 땐 이륙 못 하고 다시 제설
방빙액 타입은 1~4까지 있으며 대체로 숫자가 클수록 효능 지속시간이 길어집니다. 예들 들어 타입 1의 경우는 45분 정도 효과가 이어지지만 타입 4는 100% 원액을 쓰면 최대 12시간까지 HOT가 늘어납니다.
또 타입 4 방빙액의 원액과 물을 반반씩 섞어서 쓰는 경우 3시간으로 줄어듭니다. 같은 타입이라도 방빙액 브랜드에 따라서 효능이 차이 난다고 하는데요. 여기에 외부 기온도 영향을 미치는데 기온이 크게 떨어질수록 효능 지속시간도 단축됩니다.
대한항공에 문의했더니 기온이 섭씨 영하 5도에서 중간 수준의 눈이 내릴 때 타입 4의 방빙액을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약 1시간에서 1시간 50분가량을 효능 지속시간으로 잡는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세부적인 조건들에 따라서 이 시간도 유동적입니다.
이렇게 보면 승객을 태우기 전에 디아이싱 작업을 했다가 탑승절차와 이륙 대기 과정에서 예상외로 시간이 지체되면 다시 눈을 치우러 가야 하는 낭패를 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승객을 다 태운 뒤에 눈을 치우면 HOT에 좀 더 여유가 생기게 되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항공기가 일단 이륙을 하게 되면 안전에는 별문제가 없다고 하는데요. 비행기는 통상 구름 위를 날기 때문에 비나 눈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데다 항공기 자체적으로도 결빙을 막는 시스템을 장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눈이 내리는 날 항공기를 이용할 때는 제설작업과 디아이싱 작업 등을 고려해서 평소보다 좀 더 여유 있는 마음을 갖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