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서 죽음 기다리는 한국인 107명, 그들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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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낯선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스위스에 가서 안락사하고 싶은데 몇 가지 조언을 듣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말기 암을 앓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고 너무 고통이 심하여 이제는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했다. 목소리가 젊어 보여 다시 한번 생각하기를 권했으나 나이가 60을 넘었고 살 만큼 살았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스위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그가 원하는 답을 줄 수 없었다.
최근 스위스에서 한국인 두 명이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됐다. 기사를 읽으며 그가 생각났다. 혹시 그 후 스위스로 건너가 본인의 희망처럼 안락사로 삶을 마감한 것은 아닐까. 나이로 짐작건대 그는 아닌 것 같다. 스위스에서 안락사 돕는 단체에 의하면 이미 세상을 등진 두 사람 외에 107명의 한국인이 안락사를 준비하거나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왜 그들은 굳이 스위스로 건너가 안락사를 하려는 걸까. 용어의 혼동이 있지만 여기서 얘기하는 안락사는 의사의 도움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소극적인 안락사를 의미하며 의사조력자살이라고도 한다. 의사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여 도움만 줄뿐 환자 자신의 의지로 약을 먹거나 주사를 통해 삶을 마감하는 죽음 방식이다. 반면 적극적인 안락사는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약이나 주사를 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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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는 의사조력자살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안락사까지 허용하고 있다. 의사조력자살을 신청했다고 해서 모두 실행하는 것은 아니다. 약을 처방받은 후 먹지 않고 갖고 있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다. 의사들은 오히려 이런 사람의 만족감이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보다 높았다고 한다.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20세기 초 40세에 불과한 인간의 평균수명이 의학의 발달로 세기 중반 이후 급격히 늘어나 선진국은 80세에 달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도 부쩍 늘었다. 1970년도만 해도 남성의 평균수명이 60세가 안 됐는데, 지금은 79세나 된다. 여성은 더 높다.
하지만 평균수명이 늘어난 반면 남의 도움 없이 혼자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나이, 즉 건강수명은 66세에 불과하다. 10여년을 골골하며 살아야 한다. 더구나 생애 마지막 1년은 병원 신세를 지며 고통 속에 힘든 나날을 보낼 확률이 높다. 의료계에 의하면 생애 진료비 총액의 절반이 마지막 1년에 집중된다고 한다.
건강보험의 도입으로 병원 문턱이 낮아져 많은 사람이 병원을 찾고 있다. 병원 역시 의료가 산업화하며 환자를 유치하는데 열심이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는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을 마감할 사람이 병원에서 목숨만 연명하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사건으로 연명 의료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작년부터 각계각층의 사회적 합의를 연명 치료 중단이 일부나마 시행됐다. 그러나 무의미한 연명 치료 중단은 품위 있는 죽음의 필요조건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말기 환자를 위한 좀 더 포괄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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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1위다. 왜 우리나라 사람은 자살을 많이 할까.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음의 질이 낮은 것도 그 하나다. 탁월한 입담과 유머 감각으로 인기를 끌면서 스타 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최윤희 씨가 남편과 동반 자살해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항암 치료를 받던 80대 노부부가 집에서 함께 번개탄을 피워 놓고 생을 마감한 일도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법이다.
이런 사람들이 편안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이제는 죽음의 질을 높이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의사나 환자나 의료에만 집착하는 사고를 전환하고 선진국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극한상태에 내몰려 고통 속에 스스로 목숨 끊는 이들의 죽음만 줄일 수 있어도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떨어질 것이다.
백만기 아름다운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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