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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보다 비싼 식물…이효리가 파스타에 넣자 다들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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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4~5월 제주고사리 꺾기 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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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고사리를 따는 손길.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3일 오전 11시 한라산 중턱의 북쪽 벌판. 관광객 등 10여 명이 해발 600m 산등성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고사리 꺾고 있었다. 작업을 하던 강모(66·서귀포시 중문동)씨는 “이맘때 봄비를 맞으며 자라는 고사리가 가장 연하고 맛이 좋다”고 말했다. 최근 제주 산간의 벌판과 오름(작은화산체) 등지에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다. 제주 사람들은 4~5월 잦아지는 봄비를 ‘고사리 장마’라고 부를 정도다.


제주산 건조 고사리는 소매가로 1㎏당 10만 원이 넘는다. 고사리를 말리면 무게와 크기가 10~20배 줄어들기 때문에 귀한 대접을 받는다. 고사리철 막바지인 최근에는 12~13만 원에도 팔린다. 2만 원대인 수입산에 비해 5~6배 비싸다.


“고사리는 맛과 가격도 좋지만, 채취 작업 자체에 묘한 손맛이 있다”는 말이 있다. 손으로 꺾을 때마다 “똑”, “똑”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서다.

“맛있는 고사리는 그늘을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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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고사리를 듬뿍 넣아 끓여낸 제주고사리 육개장. 프리랜서 장정필

고사리 꺾기 ‘고수’는 숨겨둔 자신만의 ‘포인트’를 찾아간다. 이날 자신의 명당에서 연신 허리를 굽혀 고사리를 꺾던 김길남(58·제주시 조천읍)씨는 “통통하게 생긴 맛있는 고사리는 주로 그늘진 풀숲 밑에 산다”며 “제주에선 고사리 명당은 딸이나 며느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고사리는 나물무침 자체로도 훌륭한 일품 요리지만 돼지고기 등과 함께 먹을 때 맛이 더 좋아진다. 최근 가장 인기인 메뉴는 고사리육개장이다. 담백한 돼지고기 뼛국물에 고사리를 풀어 넣어 끓인 고사리육개장은 제주를 대표하는 향토음식이다. 국물에 메밀가루 넣어 걸쭉한 식감을 내는 게 특징이다. 타 지역의 육개장이 고추기름을 넣어 국물이 붉은 것과는 달리 연한 갈색을 띤다.

끓이고, 굽고, 무치고…다양하게 즐기는 제주고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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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향토요리 전문가 오순행씨가 직접 말린 제주고사리를 들어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제주도는 사면이 바다여서 옛부터 물고기보다 육고기가 귀했다. 그래서 잔칫날 돼지를 잡으면 마을사람들과 나눠먹기 위해 고사리를 넣어 국을 끓였다. 쌀도 귀해 메밀 등을 함께 넣어 죽처럼 걸쭉한 육개장이 끓여졌다. 돼지고기 육수가 고사리 특유의 향과 합쳐져 씹을 때마다 묵직하고 구수한 맛을 낸다.


국물에 녹아들어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로 풀어진 고사리는 흡사 소의 양지고기 같다. 적당히 찰기가 있으면서 죽죽 늘어나고 결대로 찢기는 식감도 일품이다. 제주향토요리 전문가 오순행(64)씨는 “고사리 육개장 맛의 비결은 원재료인 제주 고사리와 돼지고기의 빼어난 품질에 있다”고 말했다.

고사리육개장, 소 대신 돼지고기 넣은 담백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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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고사리를 부재료로 넣은 이탈리아식 샌드위치인 파니니. 최충일 기자

제주에서는 돼지고기를 구울 때 고사리를 함께 곁들여 먹기도 한다. 최근에는 요리연구가 백종원이 구운 흑돼지 삼겹살과 그 기름에 볶은 고사리를 함께 먹는 방법을 방송에서 소개해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고사리는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지만 서양에서는 독초로 분리해 거의 먹지 않는다. 때문에 고사리를 재료로 서양음식을 만들면 그때마다 새로운 요리가 탄생한다. 이중 볶은 고사리를 각종 치즈와 함께 치아바타 등의 빵에 싸 구워낸 파니니(이탈리아식 샌드위치) 요리는 치즈의 풍미와 고사리의 식감이 어우러져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최근엔 가수 이효리가 한 방송에서 파스타에 고사리를 넣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임금님에게 진상하고 약학서적에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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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고사리는 과거 궐채(蕨菜)라 불렀다. 참새가 다리를 오므린 모양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고사리는 단백질·칼슘·철분·무기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제주산 고사리는 과거 ‘궐채(蕨菜)’라는 이름으로 임금께 진상하기도 했다. ‘고사리 궐’(蕨)자는 고사리가 처음 날 때 잎이 없고 참새가 다리를 오므린 모양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 전라도편에는 제주산 감귤과 함께 고사리가 진상품으로 나온다. 고사리는 『동의보감』, 『본초강목』 등 약학서적에도 소개됐다. 열을 내리는 효과가 있어 해열제와 소변을 잘 나오도록 하는 데 쓰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1만8000신 무속신앙, 유교 제례에도 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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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따낸 제주고사리. 프리랜서 장정필

제수용 고사리 나물인 ‘고사리탕쉬’는 1만8000여 신들이 있다는 제주도의 무속신앙과 깊게 관련돼 있다. 고사리의 끝부분이 ‘아기손’처럼 생긴데다 9번 꺾어도 새로 자랄 정도로 생명력이 질겨 건강이나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강하다.


고사리는 제주의 무속신앙 외에도 유교식 제례에 올리는 ‘소울푸드’이기도 하다. 줄기가 지게처럼 ‘Y자’ 모양이고, 고사리로 만든 전은 보따리 모양이어서 옛부터 음식을 편하게 가져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고사리가 잘 자라는 곳이 무덤이 많은 오름이나 한라산 중턱이어서 혼인에는 잘 쓰지 않았다.

백이·숙제 절개 상징하는 음식으로 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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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따낸 제주고사리. 프리랜서 장정필

고사리를 먹는 행위는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사마천의 『사기』 백이열전(伯夷列傳)에는 ‘춘추시대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 굶어 죽었다’고 돼있다. 우리 역사에서는 고려 후기 충신 정온이 고려가 망하자 지리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고사리는 프타퀼로사이드(ptaquiloside)라는 독 성분 있어 생으로 먹으면 안된다. 삶고 말린 후 여러 번 씻어 먹어야 한다. 제주에서는 생고사리를 민물에 담궈 최소 12시간 독을 빼내는 작업을 한 후 봄볕에 바짝 말린 뒤 두고두고 보관해 먹는다.

“4만년 전부터 섭취”…삶고 말려 제독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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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담궈 독을 빼낸 제주고사리. 프리랜서 장정필

전문가들은 제주도에서 고사리를 처음 먹기 시작한 시기를 약 4만년 전으로 보고 있다. 제주 향토음식 전문가인 한라대학교 오영주 교수는 “학계에서는 4만년 전 구석기시대 유적인 제주 빌레못 동굴에서 타제(打製) 석기를 쓰던 원시인들이 한라산 자락의 고사리를 비롯한 식물 줄기나 뿌리를 먹어 탄수화물 보충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최충일 기자 choi.choo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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