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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금수강산 그 최남단…길이 끝난 곳, 다시 길이 시작됐다

다자우길⑨ 남파랑길 90코스
중앙일보

해남 달마산 도솔암. 미황사에 딸린 암자다. 멀리 보이는 바다가 땅끝 앞바다다. 도솔암 전경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비경이다.

2021년 달력도 한장 남았다. 한 해의 마지막 달, 이 땅의 끝까지 내려갔다. 달마산 미황사에서 한반도 최남단 표지석이 서 있는 해변 모퉁이 땅까지 걸었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땅에서 뒤를 돌아봤다. 지난 1년은 아쉽지도, 그립지도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미망(迷妄)의 나날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자주 멈칫거린 1년이었다. 무엇을 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안 할 수 없는 1년이 또 지나갔다.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시절, 주저앉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땅끝 모퉁이, 길이 끝나는 자리에는 종점 표식이 없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는 새 길의 이정표만 있었다. 낯선 이정표를 바라보다 결심했다. 그래, 지금부터는 이 이정표를 따라 걸어야겠다고. 이제 나도 희망을 노래하겠다고.

끝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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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땅끝탑. 한반도 최남단을 알리는 표식이다. 여기에서 남해안 종주 트레일인 남파랑길이 끝나고 서해안 종주 트레일인 서해랑길이 시작한다.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 사자봉 해안절벽 아래. 북위 34도 17분 38초 지점이 한반도 본토 최남단이다. 여기에서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시까지 삼천리 거리다. ‘삼천리 금수강산’이 말이 예서 나왔다. 해남 땅끝에서 남해안 종주 트레일 ‘남파랑길’도 끝난다.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시작한 길이 올록볼록한 남해안을 돌고 돌아 여기에서 마무리된다. 모두 90개 코스, 전체 길이 1470㎞의 대장정이 막을 내린다.


끝과 시작은 맞물리는 법이다. 남파랑길이 끝나는 자리에서 서해안 종주 트레일 ‘서해랑길’이 시작한다. 내년 3월 개통 예정인 서해랑길은 해남 땅끝에서 시작해 인천시 강화도에서 마무리된다. 현재 예상되는 서해랑길은 모두 110개 코스 1800㎞ 길이다. 남파랑길 이전에 조성된 동해안 종주 트레일 ‘해파랑길(50개 코스, 750㎞)’과 2023년 조성될 계획인 ‘DMZ 평화의길(코스 개수 미정, 약 530㎞)’을 합하면 대한민국을 크게 두르는 ‘코리아 둘레길’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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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종점에 걸린 서해랑길 시작점 표식.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 길이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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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에서도 마지막 구간인 90코스를 걸었다. 미황사에서 시작해 달마산 자락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 땅끝마을에서 끝나는 13.9㎞ 길이다. 코리아 둘레길 완도·해남 구간 지킴이 황세웅(56)씨는 “해안과 바투 붙은 여느 남파랑길과 달리 90코스는 산길이 대부분이어서 험한 편”이라고 소개했다. 솔직히 험하다기보단 심심했다. 후반부 코스는 땅끝전망대까지 숲길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남파랑길 90코스 종점에 다다랐더니, 종점 표식 대신에 서해랑길 1코스 시작점 표식이 붙어 있었다. 이건, 신선했다.

달마산 미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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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는 달마산 남쪽 기슭에 걸터 앉아 있다. 미황사에서 오른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 남파랑길 90코스가 이어진다.

길은 달마산 중턱 미황사 사천왕문 앞에서 시작한다. 미황사(美黃寺)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절이다. 삐죽삐죽 돋은 달마산 능선의 기암괴석을 병풍처럼 두른 산사가 사철 푸른 동백나무 숲에 파묻혀 땅끝 앞바다를 내다본다.


미황사는 천년고찰이다. 신라 경덕왕 8년(749)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19세기 이후 한동안 버려졌었다. 폐사지 같았던 미황사를 되살린 주인공이 있다. 1989년부터 차례로 주지를 맡은 지운, 현공, 금강 스님이다. 이들 스님은 지게로 바위를 나르고 손수 돌담을 쌓아 옛 가람을 다시 일으켰다. 특히 금강 스님의 노고가 컸다. 1989년 미황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금강 스님은 2001년부터 20년간 주지로 미황사를 이끌었다. 그 사이 미황사는 전국구 사찰로 거듭났다. 현재 미황사는 전국에서 템플스테이 참가자가 가장 많은 절이다. 코로나 사태로 미황사 템플스테이도 중단됐지만, 땅끝마을 작은 산사를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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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 대웅보전.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다. 내년 1월부터 해체복원공사에 들어간다.

금강 스님은 지난 1월 미황사를 떠났다. 현재 미황사 주지는 2월 취임한 향문 스님이다. “미황사를 와 봤느냐” 묻길래 “밥이 참 맛있었다. 잠도 푹 잤다”고 답했다. 향문 스님이 아리송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똥 잘 싸고. 우리가 잘 사는데 뭐가 더 필요할까요?”

길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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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90코스는 땅끝전망대까지 숲길이 이어진다. 굴참나무와 동백나무가 우거진 남도의 숲길이다.

10년쯤 전 미황사에서 금강 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스님이 달마산 옛길에 관하여 말한 적이 있다. 미황사가 암자 열두 개를 거느린 큰 절이었던 시절, 암자를 잇는 옛길이 있었는데 그 길을 다시 잇고 싶다고 했다. 불교에서는 길을 걷는 것도 수행이다. 포행(布行)이라 한다. 길을 걷는다고 깨달음을 얻을까 싶지만, 적어도 세상사 시름 따윈 잊게 된다.


2017년 드디어 그 길이 열렸다. 17.74㎞ 길이의 달마고도다. 미황사를 출발해 달마산 자락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다. 흔한 데크로드 하나 없는 순전한 숲길이다. 길은 미황사에서 냈지만, 현재 운영은 해남군청에서 주도한다. 코로나 사태에도 거의 매주 주말 걷기 행사를 진행했고, 스탬프 프로그램을 운영해 완주 메달을 나눠줬다. 해남군 김향희 축제팀장이 “완주 메달을 받아간 사람만 1만 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남파랑길 90코스 전반부 약 5㎞가 달마고도 4코스와 고스란히 포개진다. 미황사 오른쪽으로 난 숲길로, 너덜지대와 삼나무숲을 차례로 지나 몰고리재까지 이어진다. 여기서부터 땅끝전망대까지 내리 숲속을 걷는다. 물고리재를 지나기 전에 억지로라도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도솔암이다. 도솔암은 남파랑길도 아니고, 달마고도도 아니다. 길에서 약 1㎞ 떨어져 있다. 그래도 가봐야 한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 위에 작은 암자가 박혀 있다. 천하의 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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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경은 남파랑길의 풍경이 아니다. 서해랑길의 풍경이다. 땅끝마을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되는 증도가 보인다. 동해안을 잇는 해파랑길이 뜨는 해를 보고 걷는 길이라면 서해랑길은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걷는 길이다.

이윽고 땅끝이다. 땅의 끝에서 길도 끝난다. 비쭉 솟은 삼각탑이 뜬금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땅끝이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돌아보니 오래 먼 길을 걸어왔다. 서쪽으로 난 해안 산책로에 여태 보지 못했던 노란 리본이 걸려 있었다. 서해안 종주 트레일 서해랑길을 알리는 표식이다. 리본이 펄럭인다. 다시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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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90코스 지도. 지도 한국관광공사

해남 글ㆍ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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