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박정희 아들도 신청"…50주년 '장학퀴즈' 인기 이끈 이 사람

중앙일보

차인태 전 MBC 아나운서. 중앙포토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아들이 ‘장학퀴즈’에 출연 신청을 하다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중략)… 이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이름은 박정희. 금지옥엽 같은 그의 아들이 ‘장학퀴즈’에 출연신청을 한 것이다. 그것이 순전히 본인의 의지인지, 아니면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희망인지, 비서진의 충정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건 본인도 출연을 싫어하진 않았다는 사실이다.


─차인태 아나운서의 저서 『흔적』 중

시청자들은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 지만 씨가 TV 브라운관 속 다른 학생들과 퀴즈 대결을 펼치는 모습을 볼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는 그 시절 ‘장학퀴즈’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MBC에서 EBS로 방송사를 옮겨가며 올해 50주년을 맞은 국내 최장수 TV 프로그램 ‘장학퀴즈’의 화려한 인기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17년간 장학퀴즈를 진행한 초대 MC 차인태 아나운서다.


차 아나운서는 24일 전화 인터뷰에서 장학퀴즈 50주년 소감을 묻자 “참 감사한 일”이라며 짧게 답했다.


평안북도 출신으로 휘문고와 연세대를 졸업한 차 아나운서는 MBC 입사 4년 차였던 1973년, ‘장학퀴즈’를 맡게 됐다.


그는 2009년 자신의 인생을 담아 펴낸 책 『흔적』에서 이 프로그램 MC 제안을 받고는 “적잖이 실망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동시간대 인기 있던 프로권투 중계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첫 방송이 마지막 방송이 될지도 모르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진행하라니, 회사는 대체 나를 어찌 보고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차인태 전 MBC 아나운서 ( 현 경기대 교수 )가 장학퀴즈 방송당시 출연자들에 대한 특징과 인상을 적은 메모 . 중앙포토

하지만 방송 3주 만에 장학퀴즈의 인기는 차 아나운서도 체감할 만큼 치솟았고, 녹화일이면 정동 MBC 공개홀 앞엔 방청을 원하는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명문 고등학교 학생들의 출연 경쟁도 심했다. 당시 학교장 허락과 추천 없이 방송에 나갔다가 4위를 한 한 여고생은 학교의 명예를 실추했다는 이유로 정학 위기를 맞았다. 차 아나운서는 이 소식을 듣고 당시 PD와 학교를 직접 찾아가 교장선생님을 만났고, 학생의 장래를 위해 선처를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의 읍소 덕인지 다행히 그 여고생은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장학퀴즈의 인기에는 녹화 프로그램임에도 생방송 못지않은 박진감 넘치는 차 아나운서의 진행이 큰 몫을 차지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잡학박사’로 불릴 만큼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바탕으로, 작가나 AD도 없던 시절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방송을 준비했다고 당시 그와 함께 방송했던 아나운서와 PD들은 전했다. 그 역시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작은 일, 바로 그 일에 충실하라’는 말을 하나의 지침처럼 따른다고 했다. 신생 프로그램이었던 장학퀴즈에 임하는 그의 자세였다.


차 아나운서는 점점 유명해졌다. 그가 진행하던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엔 미모의 딸 사진과 함께 그의 남편감을 찾아달라는 한 어머니의 편지부터 ‘돈을 빌려 달라’, ‘가출한 18세 아들을 찾아 달라’는 등 각종 민원성 편지가 쇄도했다.


차 아나운서는 이후 제주MBC 대표이사 사장, 평안북도지사, 이북5도위원장 등을 지냈고 경기대·서울문화예술대 등 강단에 올라 후학을 양성했다.



중앙일보

차인태 전 MBC 아나운서. 중앙포토

최근에는 법조인·의사 등 전문직, 교수, 기업 CEO 등을 대상으로 스피치 강연을 하고 있다는 근황을 전했다.


차 아나운서는 “말하는 법뿐만 아니라 잘 듣는 법도 가르치고 있다”며 “남의 말을 잘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이 리더가 돼야 직장도, 사회도, 세상도 편해진다”고 했다.


실향민인 그의 마지막 꿈은 하나다. 이산가족 상봉을 정례화해 실향민들의 아픔을 달래주는 것. 차 아나운서는 “실향민들에게 남북정책이니, 남북화해협력이니 하는 말들은 너무 멀게 느껴진다”며 “월남해서 살아 있는 실향민들이 5만명도 채 안 될 거다. 이들이 추석이든, 설이든 지정된 장소에서 정례적으로 만나 자유롭게 손을 잡고 목놓아 불러볼 수 있도록, 대한적십자사 자문위원이 돼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를 실현하는 게 마지막 꿈“이라고 말했다.


20여분의 짧은 전화 인터뷰 동안 ‘레전드’ 같은 촌스러운 표현은 쓰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며 한 번도 자신에 대해 내보인 적 없던 그가 딱 한 가지 축하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차 아나운서는 “올해 손주가 대학에 입학한다. 살아있는 동안 손주가 대학에 입학하는 걸 보게 되다니 울컥하고 감격스러운 일”이라며 웃었다.



중앙일보

버추얼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장학퀴즈 특별방송에서 차인태 아나운서가 1973년 2월 장학퀴즈 1회 당시의 스튜디오로 돌아가는 장면. EBS

한편 지난 50년간 장학퀴즈를 거쳐 간 학생은 2만5000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는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로 유명한 고(故) 이규형 영화감독, 배우 겸 공연기획자 송승환 PMC프로덕션예술총감독,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 발라드 ‘마법의 성’으로 유명한 가수 겸 금융인 김광진 전 동부자산운용 투자전략본부장 등이 있다.


장학퀴즈가 50년간 미래 인재를 키워올 수 있었던 건 SK그룹의 전폭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은 “대한민국의 미래는 인재 양성에 있다”는 인재보국(人材報國) 경영 철학에 따라 장학퀴즈를 첫 방송 때부터 단독 후원했다.


EBS는 지난 18일 방영된 ‘장학퀴즈 50주년 특집–인재의 비밀’ 방송에서 최첨단 ‘확장현실’ 기법을 이용해 구현한 옛 장학퀴즈 스튜디오에서 당시 출연자와 현재 출연자들이 50년 시공을 뛰어넘는 퀴즈 대결을 펼쳤다. 차 아나운서도 출연했다.


이보람 기자 lee.boram2@joongang.co.kr

오늘의 실시간
BEST
joongang
채널명
중앙일보
소개글
신뢰할 수 있는 뉴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