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되어가고 있는 중" 삶을 바꾸는 멋진 주문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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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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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겨울이었다. 오랫동안 근무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쉬던 때였는데,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지내야 할지, 지인과 가족들과는 어떤 식의 관계를 다시 만들어갈지 생각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일을 시작했고, 그 직장에서 24년을 근무한 후 처음 맞는 혼자의 시간이었다. 조직에 적응하며 성과를 내는 게 아닌 처음부터 토대를 쌓고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 모든 것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다음 스텝에 대한 고민의 폭도 컸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겠다’며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지만, ‘이 정도 했으면 이제 적당히 마무리해도 되는 것 아닐까’란 마음도 한 켠에 있었다. ‘사춘기에 돌입한 딸과 모처럼 같이 있을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집에 있는 동안만큼은 아이에게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와중에도 ‘이전처럼 바쁘게 워킹맘으로 지내는 게 지금의 나와 아이에게 의미가 있을까?’란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흥미로운 기사 한 줄을 읽었다. “여성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다고? 동시에? 에이, 거짓말이죠. 일에 몰두하면(lean in) 다 된다는 개똥 같은 소리(that shit)는 현실에선 작동 안 돼요”라고 말한 미셸 오바마의 코멘트였다. 8년간의 백악관 생활을 마친 후 출간한 자서전 『비커밍』의 북 투어 중 나온 이야기였다.
미셸 오바마가 8년간의 백악관 생활을 마친 후 출간한 자서전 '비커밍'. [사진 웅진지식하우스] |
‘Lean In’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라’는 말로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인 셰릴 샌드버그가 그녀의 책에서 전한 캐치프레이즈다. 여성은 유리천장을 뚫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직장생활의 의사 결정 과정과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라는 조언인데, 미셸 오바마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정도로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 결혼생활과 직장생활 어디서든 자신을 위해 주어진 환경이 있을 거라 기대하지 말라. 개인의 의지와 역량만으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을 버티고 이겨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삶을 위해 용기를 잃지 말고 한 발짝씩 나아가는 것! 이것이 자신의 지난 시간을 담은 자서전을 통해 그녀가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이었다.
움직이며, 변해가야,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진다! 그 기사를 읽으며 ‘BECOMING’이란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나 역시 끊어진 길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나를 위해 움직이는 과정에 있는 것 아닌가. 자신 없고 의심했던 마음을 털어 버리고, 하고 싶은 일에 다시 집중하자, 그렇게 상황을 정리했다.
돌이켜보면 이전에도 미셸 오바마를 통해 나를 돌아보았던 경험이 있다. 결혼한 지 5년 정도 되었을 때, 그녀의 책을 번역해보지 않겠냐는 의뢰가 들어왔다. 당시 나는 40대 초반이었고, 20~30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 〈코스모폴리탄〉의 편집장이었으며, 5살 딸을 키우는 워킹맘이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고 있을 때라 일정상 쉽지 않았지만, 그녀의 인터뷰와 연설문 등 직접 했던 말들을 모아 번역하는 작업이란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겼다(원서 제목 자체가 ‘In Her Own Words’다).
1년여의 시간을 들여 번역했고, 버락 오바마의 재선 캠페인이 시작되던 2012년에 『비판에 담담하게, 시선에 자유롭게』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첫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그리고 퍼스트레이디가 된 이후 미셸 오바마가 공식석상에서 했던 말들을 주제별로 나누어 정리했는데, 번역하면서 그녀가 마주한 상황과 그 말을 전한 속내를 곱씹어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을 통해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미셸 오바마는 자신을 사랑할 줄 알며, 자존감이 높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타협하고, 실망하지 않는다. 자신이 만들어 가고 싶은 세상과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명쾌한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워킹맘으로, 한 매체의 편집장으로, 숙제도 많고 고민도 많았던 때, 그녀의 이야기가 자극이 되고 조언이 되었던 건 당연했다. 그런 그녀가 어찌 보면 내 인생의 전환기인 2018년 겨울, 다른 방식으로 어깨를 두드려 준 것이다.
자서전 출간 이후 그녀의 행보 역시 흥미로웠다. 34개 도시를 돌며 북 투어 콘서트를 열었고, 그 시간 동안 많은 젊은 여성과 학생들을 만나 멘토링을 진행했다. 남편과 함께 넷플릭스 합작사인 콘텐츠 제작사 ‘하이어 그라운드 프로덕션’도 설립했는데, 작년 8월 넷플릭스에 선보인 장편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가 두 사람이 제작한 첫 작품이었다. 중국인이 미국에서 유리공장을 열고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그렸는데,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얼마 전 자신의 북 투어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은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을 2번째 제작 작품으로 출시했다. 반가운 마음에 넷플릭스에 올라오자마자 시청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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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카고 남부 출신이에요. 그 사실이 저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죠. 노동자층이 사는 전형적인 동네였어요. 저라는 사람의 극히 일부가 지난 8년간 만들어졌다면 훨씬 많은 부분이 그 전에 형성되었어요.”
흑인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여성과 소외 계층을 위한 삶을 지지하는 퍼스트레이디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솔직하고 당당하게 전달하며,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힘을 기를 수 있는 첫 번째라는 점을 강조한다. 주체적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다양한 여성들과 만나 자신의 삶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눈다.
다큐멘터리가 출시된 이후 다시 미셸이 주목받고 있다. 부통령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는 것은 물론 트위터에는 ‘#비커밍을 봐라(#WatchBecoming)’라는 해시태그가 올라온다. 자서전은 1000만부 가까운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이 책의 오디오북은 지난 그래미 시상식에서는 ‘베스트 스포큰 워드 앨범상(Best Spoken Word Album)’까지 받았다. 퍼스트레이디 이후 그녀가 선택한 삶은 이야기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그것을 통해 교육하고, 연결하고, 영감을 주겠다는 것이다.
“성장은 끝이 있는 과정이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서 더 나은 내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멋진 말 아닌가. 나 역시 하루하루가 흥미롭고 가치 있으며, 그 시간을 운영하는 내 모습에 만족할 수 있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기분 좋은 주문을 걸어 본다.
우먼센스 편집국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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