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던 앞차가 갑자기 푹 꺼졌다…연희동 싱크홀 사고 영상보니
29일 오전 11시 19분쯤 서울 연희104고지앞 버스정류장 인근 성산대교 방향 4차선 도로에서 싱크홀이 발생했다. 싱크홀 규모는 가로 6m, 세로 4m로 깊이는 2.5m였다. 이찬규 기자 |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깊이 2.5m 땅꺼짐(싱크홀)이 발생해 도로 위를 달리던 차량이 빠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 사고로 병원에 가던 노(老)부부가 중상을 입었다. 서울시와 소방당국 등은 지반이 내려앉은 원인으로 사고 지점 지하 12m를 통과하는 빗물펌프장 관로공사와 노후화한 상수도관 등에 무게를 두고 조사 중이다.
서울 서대문경찰서와 서대문소방서에 따르면, 싱크홀은 29일 오전 11시 19분쯤 연희104고지 전적비 인근의 4차선 성산로 중 성산대교 방향 길에서 발생했다. 싱크홀 규모는 가로 6m, 세로 4m로 깊이는 2.5m였다.
지반이 순식간에 꺼지면서 윤모(82·남)씨가 운전하던 흰색 스포츠유틸리티 차량(SUV) 티볼리가 왼쪽으로 기울다가 그대로 빠졌다. 동승자인 부인 안모(79·여)씨는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신촌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로 이송됐고, 윤씨도 갈비뼈를 다쳐 동대문구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졌다. 약 10분간 심장이 멈췄던 안씨는 심폐소생술을 받고 맥박을 회복했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소방과 구청 등 따르면 싱크홀 원인으로 노후 상수도관과 빗물펌프장 관로공사가 꼽혔다. 사고 지점에서 200m 떨어진 곳에서는 침수피해 예방을 위해 우수를 사천 빗물펌프장으로 유입하는 관로공사가 지난해 3월부터 진행 중이다. 이찬규 기자 |
두 사람은 이날 안씨의 무릎 관절 소염제를 받으러 은평구 불광동 자택에서 세브란스병원으로 다녀오던 길이었다고 한다. 공무원으로 일한 뒤 20년쯤 전 퇴직한 윤씨는 평소에도 무릎 때문에 고생하는 부인을 위해 정기적으로 병원에 동행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고 온 가족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둘째 아들 윤모(54)씨는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황당하다”며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엔 보이스피싱 연락을 받은 줄 알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가족도 “(어머니가) 올해 딱 팔순인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번 사고로 지하에 묻혀 있던 도시가스 배관이 터지는 등 대형 참사가 발생할 위험도 있었다. 소방 당국은 “사고 차량이 땅 아래로 떨어지며 도시가스 배관을 스쳤지만 누설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중앙일보가 확보한 빗물펌프장 유입 관로 설계도에 따르면, 관로는 성산로를 따라 싱크홀 발생 지점 인근을 지나갔다. 이날 중앙일보와 사고 현장과 공사현장을 같이 찾은 이수곤 전 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설계도면과 싱크홀 현장을 둘러보니 관로 공사에 의한 사고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찬규 기자 |
소방과 구청은 브리핑에서 싱크홀 발생 원인을 폐관(노후 상수도관)으로 지목했다. 서울시와 전문가는 인근에서 진행 중인 빗물펌프장 관로공사가 원인 중 하나라고 추정했다. 사고 지점에서 약 170m 떨어진 곳에선 지난 3월부터 침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빗물을 사천 빗물펌프장으로 유입시키는 관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공사 도면에 따르면, 해당 관로는 연희교차로 인근에서 사천교 교차로까지 이어지는데 싱크홀이 발생한 성산로에선 지하 12m 지점에 관로가 설치될 예정이다.
이날 사고 장소와 공사 현장을 찾은 이수곤 전 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도로 아래로 12m 떨어진 곳에서 공사하던 중 빈 곳에 흙과 물 등이 쏟아지면서 싱크홀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과거 관로 공사 중 기계 문제로 사천교에서 연세대 방향 일대에서 공사가 오랫동안 지연됐다”며 “해당 구역 토질이 복잡해 주변 흙과 물이 쏠리는 등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서울시는 지난 5월 이 도로에 대한 지표투과레이더(GPR) 탐사를 했지만, 당시 동공이 발견되진 않았다고 밝혔다. 서울시 관계자는 “땅 아래에 묻혀있는 지하 시설물에 이상이 없는지, 많은 비로 토사가 유실된건 아닌지 등도 살필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소방 관계자는 “정확한 사고 원인은 서부도로사업소, 서울도시가스 등 유관기관과 합동 조사해 밝힐 예정”이라고 밝혔다.
29일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에 발생한 땅꺼짐 사고현장에서 사고 차량이 견인되고 있다. 사고로 70대 여성이 심정지 상태에서 발견됐지만, 현재는 맥박이 회복된 것으로 알려졌다. 뉴시스 |
이날 경찰과 소방 등은 2차 사고를 막기 위해 도로를 전면 통제했다. 오후 12시 47분쯤엔 싱크홀에 빠져있던 차량을 견인했다. 떨어지면서 차 앞부분이 파손돼 꺼진 땅 아래에서 파편 일부가 발견되기도 했다.
신재민 기자 |
사고로 인근 도로가 심하게 정체돼 시민들의 불편도 컸다. 해당 도로를 지나는 버스는 손님들에게 “길이 막힌다”고 안내했다. 연희동에서 30년 동안 사업을 했다는 진정호(64)씨는 “보통은 출근·퇴근 시간에만 막히는 길인데 성산대교 방향에서 정체가 있었다”며 “다행히 경찰과 소방이 빨리 출동해 현장을 잘 수습했다”고 말했다.
일부 시민은 도심 한복판에서 땅이 꺼졌다는 소식에 불안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날 오전 11시30분쯤 사고 현장을 지난 7611번 버스 운전기사 이준희(68)씨는 “사고 지점 1m 정도 가까이 가서야 구멍이 보였는데, 흰색 차량의 오른쪽 창문밖에 안 보였다”며 “이 노선을 8년째 운행 중인데 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불안할 것 같다”고 말했다.
29일 오후 8시 서울시 관계자들이 서대문구 연희동 성산로 연희 104고지 부근에 발생한 싱크홀을 메꾸고 있다. 박종서 기자 |
황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토교통부‧국토안전관리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 싱크홀 사고(2019년~지난해)는 총 957건이었다. 전문가들은 싱크홀을 메우는 땜질식 해결 외에 발생 과정부터 후속 조치까지 이어지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원철 연세대 토목공학과 명예교수는 “싱크홀 사고 현장을 되메우기만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GPR 등을 이용해 지반이 제대로 다져졌는지 공사 뒤에도 지속해서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깊은 곳까지 땅을 파는 공사 등은 진행하기 전에 싱크홀 위험도를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찬규 신혜연 박종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