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을 홀린 한지의 마법 … 생명의 땅을 노래하다
전광영 작가 브루클린미술관 입성
한국 작가 처음으로 개인전 열어
삼각형으로 싸고 묶은 고서 조각
낯선 행성을 전시장에 옮겨온 듯
어린 시절 본 한약봉지에서 착안
“우리 정서로 세계와 만나고 싶어”
“고대 유물 마주하는 느낌” 호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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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봄, 며칠간 감기몸살을 앓던 그는 문득 그 한약 봉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플 때마다 자신을 등에 업고 한약방을 찾아갔던 어머니, 한약방에 진동하던 탕약 냄새…. 방안에 퍼지던 햇살과 함께 그를 사로잡았던 풍경은 추상화가로 작업해오던 그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한지로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하는 전광영(74) 작가 얘기다.
16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 그의 작품들이 나란히 걸렸다. 회화 작품이 아니다. 그 전환점 이후 탄생한 작품들이다. 작품을 유심히 살피던 관람객들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어메이징(amazing!)”. 한 백인 남성은 전시장에 있던 작가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너무 아름답다(so beautiful). 마음에 울림을 주는(so inspiring) 작품들이다. 감사하다”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날 개막한 그의 개인전은 ‘전광영: 집합(Kwang Young Chun: Aggregations)’이란 제목으로 내년 7월까지 무려 8개월 넘게 지속된다. 그가 뉴욕에서 개인전을 여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상업 갤러리가 아니라 미술관 전시란 점이 단연 주목된다. 전세계 작가들에게 문턱도 높고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 단단한 뉴욕의 미술관이 그를 위해 공간을 비우고 벽에 5점, 바닥에 설치 1점을 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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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가가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뉴욕 5대 미술관에서 전시를 연 것은 2011년 이우환(82) 작가의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 이후 7년 만이다. 앞서 5대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한국 작가는 백남준·이불 등 극소수다. 브루클린 미술관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한국 미술 상설 전시관을 갖춘 곳으로, 현재 이곳에선 ‘원 브루클린’시리즈의 하나로, 서도호 작가의 설치작품 ‘퍼펙트 홈 II’를 소개하고 있다. 일각에서 ‘브루클린이 코리안 모멘트(한국의 시대)를 맞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한지로 싼 꾸러미의 도발=전광영 작가의 ‘집합’ 시리즈는 고서 한지로 섬세하게 싸고 묶은 삼각형 조각들을 염색해 한 프레임 안에 촘촘하게 모은 것이다. 어린 시절 본 한약 봉지들과 보자기 문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면서, 한약 봉지의 재현을 완전히 뛰어넘은 것이 특징이다. 어떤 것은 대지 풍경을 담은 입체 추상화 같고, 또 다른 것은 낯선 행성에서 옮겨다 놓은 거대한 바윗덩어리 같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들은 그 매력으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층적 이야기를 뿜어낸다’는 점을 꼽았다.
브루클린 미술관 아시아 미술 수석큐레이터 조앤 M 커민스는 “작가가 한지로 감싼 조각들은 그 독특한 질감으로 한국적 감수성을 드러낸다”며 “주목할 것은 실험적이고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예술 조형물이 되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전광영은 (고서 한지를 다른 맥락으로 활용함으로써) 지나간 역사를 기념하며 동시에 그것을 해체한다. 과거로 돌아가는 수단이자 미래로 전진하는 통로와 같은 의미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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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작은 조각들과 그 조합으로 완성된 전체가 불러일으키는 대비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았다. 브루클린 미술관 앤 패스터낙 디렉터는 “전광영의 조각 작품은 혁신과 전통의 접점에 자리한다”며 “작품은 부분의 총합보다 훨씬 더 크고, 더 진보적”이라고 평했다. 소재와 질감, 그리고 독특한 제작 기법으로 자연과 문명, 전통과 현대, 개인과 집단, 융합과 충돌 등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전광영 “이제 시작이다”=전시장에서 만난 전광영 작가는 “작가에겐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하는 것 이상의 꿈은 없다”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 예술의 심장부인 뉴욕 미술관 전시는 내게 새로운 시작의 의미와 같다”고 말했다. 강원도 홍천 출신인 그는 1968년 홍익대 미대를 졸업, 71년 미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원을 나온 뒤 50년간 국내외에서 꾸준히 전시를 해왔다. 그는 “과거에 추상표현주의 회화 작업을 하며 ‘이건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항상 마주해야 했다”며 “한국적인 정서로 세계와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는데, 지금 소망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에겐 올해 특별한 일이 많았다. 작품 2점이 영국 브리티시 뮤지엄의 소장품이 됐다. 4·5월은 국내 전속 화랑인 서울 PKM갤러리에서, 5월은 뉴욕 첼시의 산다람 타고르 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렸다. 지난 10월엔 경기도 용인에 국내 작가 발굴을 위한 미술관 ‘뮤지엄 그라운드’를 열었다. 전용운 뮤지엄 그라운드 관장은 “이번 뉴욕 전시가 전 작가 개인의 성과로 끝나지 않고, 다른 한국 작가들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7월 브루클린에서 막 내린 뒤 오리건 주립대의 조던 슈니쳐 미술관에서 이어질 예정이다.
뉴욕=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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