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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물생심] 나무인데 나무보다 더 예뻐…옻칠 아트의 마법

옻칠 공예 작가 정은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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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어느 때보다 청결과 위생이 염려되는 때, 선조들의 지혜를 빌려보는 건 어떨까. 예부터 옻나무에서 얻은 수액(칠)을 바른 목기는 광택이 나며 썩지도 않는다고 알려졌다. 방충·방수·방습 효과로 내구성도 높고, 아름다운 칠색 덕분에 장식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때문에 옻칠을 한 목기는 고급스러운 제품으로 인식돼 왔다.


정은진(46) 작가는 옻칠 공예 작가다. 전통공예기법이 현대인의 일상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게 ‘JL Contemporary’라는 이름의 공방을 열고 나무 소재의 옻칠 아트 수저 세트와 다양한 크기의 컵을 만들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 감각에 맞게 색과 디자인은 경쾌하고 발랄하다.


“아래가 볼록한 컵 디자인은 아버지가 예전에 만드신 걸 제가 보완해서 쓰고 있어요. 선사시대에 사용했던 토기 모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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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작가의 아버지는 옻칠 아티스트 정해조 선생이다. 전통 공예와 현대 미술을 완벽하게 접목시킨 작품으로 국내외에서 유명하다. 정 선생의 작품은 ‘협저태’라는 명칭의 전통 칠기 공법으로 만든다. 나무로 몰드를 만들고 그 위에 모시나 삼베를 얹어 옻칠 액으로 굳혀가는 방식으로, 일반적인 칠 작업보다 기술도 까다롭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여기에 오행사상을 상징하는 오방색을 입힌 다음, 나무 몰드를 파내 완전하게 삼베와 옻칠로만 존재하는 작품을 완성시킨다. 정해조 선생의 작품은 전 세계 공예인들이 주목하는 2018년 ‘로에베 크래프트 프라이즈’ 파이널 리스트 30인에도 올랐다.


정 작가는 어려서부터 옻칠 공예를 하는 아버지를 옆에서 보고 자랐다. 자연스럽게 대학에서 옻칠 공예를 전공했지만 졸업 후에는 꽤 오랫동안 손을 뗐다고 한다.


“부모님의 일일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15년 넘게 전혀 다른 일을 하다가 2007년 대학원에 입학해 옻칠 공예를 다시 배우면서 ‘아, 나도 이걸 평생 해야겠구나’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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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부터는 개인 작품 활동과 함께 일상에서 쓸 수 있는 옻칠 아트로 젓가락과 컵 만들기를 시작했다.


크고 작고, 넓고 좁은 다양한 종류의 컵들은 어떤 나무를 사용할까. 정 작가는 물푸레나무를 사용한다고 했다. 바이올린을 만들 때 주로 쓰인다는 나무다.


“단단하고 나이테의 모양도 예쁘고, 무엇보다 가격이 합리적이죠. 개인적으로는 느티나무를 더 좋아해요. 나이테 무늬가 훨씬 예쁘니까요. 하지만 다른 용도로 더 많이 쓰여서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이 너무 비싸서 생활용품 만들기엔 적당치 않죠.”


디자인대로 나무를 깎고 건조시키는 것은 함께 일해 온 파트너 공장에 맡긴다. 옻칠을 하려면 건조가 가장 중요하다. 건조 방법도 일반 나무와 다르다. 열을 가해 후끈하게 나무를 쪄서 일부 모양을 깎고, 다시 건조시킨 후 깎아야 한다. 한 번에 다 깎고 건조할 수 없는 이유는 최대한 나무가 가진 수분의 양을 줄여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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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싹 말리지 않은 나무에 옻칠을 하면 칠이 잘 발리지도 않고, 사용할 때 갈라지고 형태가 비틀어지거든요.”


옻칠 목기의 내구성이 좋기로 유명한 것은 나무 건조 과정부터 별다른 정성과 시간을 들이기 때문이다. 박달나무를 사용하는 젓가락도 만들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다. 너무 단단해서다. 당연히 옻칠도 만만치 않다. 옻칠은 최대한 칠을 얇게 많이 할수록 좋다. 칠을 하고 말리고 다시 칠을 하고 말리고를 반복하면서 수많은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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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을 한 번 바른 다음에는 말려서 그 표면을 갈아줘야 해요. 그래야 새 옻칠을 입힐 수 있거든요.”


한 걸음 전진했다가 반보 후진, 그리고 다시 일보 전진하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걸으면 짧은 시간 동안 빨리도, 멀리도 나아갈 수 없다.


“아버지의 협저태를 만들려면 80~100번 정도 칠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래야 1cm 정도의 두께를 겨우 가질 수 있죠.”


옻칠 자체도 비싸다. 칠은 옻나무에 상처를 내서 나오는 수액을 한 방울 한 방울 받아서 얻는다. 불순물만 걸러낸 상태를 ‘생칠’, 따로 전문 장인에게 맡겨 원하는 상태로 만든 것을 ‘정제칠’이라고 한다. 원주 옻나무에서 얻은 100% 칠액은 1관(3.75kg)에 300만원 이상을 호가한다. 이마저도 선생님들이 먼저 찜하시기 때문에 정 작가 같은 젊은 작가들은 쓸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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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진 작가의 옻칠 수저 세트 가격은 한 벌에 10만원이다. 나무 수저 세트치곤 너무 비싼 것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만드는 과정을 알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2만~3만원 짜리도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칠을 적게 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해요. 1~2년 동안 버리고 새로 사고를 여러 번 하느니 10년 동안 안심하고 쓸 젓가락을 사는 게 더 낫겠죠. 저는 보통 옻칠을 20번 정도 하는데 보이진 않지만 음식과 닿는 부분은 더 신경 쓰죠.”


정 작가에게 사실 수저 세트, 컵 판매는 본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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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이라고 하면, 나무나 도자기 표면을 광택 나게 하는 마감재 정도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 그 이상의 가능성이 많은 공예 기법이에요.”


요즘 그가 관심 있는 건 다른 재료들과 옻칠이 어우러졌을 때 서로의 매력이 함께 발산되는 것이다. 나무 컵을 만들 때도 겉은 칠로 다 덮고, 안쪽은 투명 칠을 얇게 발라 물푸레나무의 예쁜 나이테를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든 이유다. 칠과 나무가 가진 물성의 장점을 모두 잘 살리기 위해서다.


요즘 정 작가가 관심 있게 테스트 중인 건 유리 위에 옻칠을 하는 방법이다. 유리 컵 표면에 옻칠을 할 때와 컵 안쪽에 옻칠을 할 때의 느낌이 전혀 다르게 나온다. 컬러의 발색과 투명도 역시 그때그때 달라서 옻칠 유리의 매력에 한껏 빠져 있다.


“옻칠이 이런 느낌을, 이런 색을 낼 수 있구나. 나무가 금속이 유리가 이런 느낌도 낼 수 있구나. 이런 감각적인 기쁨을 만들고 싶어요.”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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