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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상가에 틈입한 책방 ‘200/20’

좋아하는 것들의 매개자가 되자

‘200/20’을 처음 만난 것은 SNS에서였다. 한눈에 보증금과 월세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수년 전 홍대 앞에 ‘1000/60’이라는, 한 시각예술 작가의 작업실을 알고 있었다. 작업실 이름만큼이나 작가의 작업이 솔직하고 재치 있던 걸 기억했기에 200/20에도 호기심이 생겼다. 서울에서 보기 드문 보증금/월세의 공간은 보기 드문 즐거움을 담고 있을 것 같았다.

청계상가에 틈입한 책방 ‘200/20

200/20은 청계상가에 있는 서점이라고 했다. ‘청계상가가 어디더라….’ 게시물 중엔 ‘대림상가’를 언급한 것도 보였다. ‘대림역 근처에 있는 것인가….’ 조금 더 찾아보니 ‘800/40’과 ‘300/20’이 그의 이웃이며 각각 그들의 근거지가 대림상가와 세운상가임을 알 수 있었다. ‘여긴 대체 뭘 하는 곳이지?’ 유일하게 아는 키워드 ‘세운상가’도 힌트를 주진 못했다. 다만 청계상가(세운청계상가. 이하 ‘청계상가’)와 대림상가가 세운상가와 이웃한 형님 아우 격의 건물이라는 것을, 서울 생활 15년 만에 알게 됐다.

청계상가의 200/20, 대림상가의 800/40, 세운상가의 300/20

세운상가는 혹자의 표현에 따르면 ‘서울의 섬’ 같은 곳이다. 1960년대에 도시계획에 의해 ‘최신식 주상복합맨션’을 모토로 종묘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규모로 건립된 세운상가는 근대 이후 서울도시개발의 민낯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다. 1970년대까지 대규모 복합상가로서 활황을 누리다가 1980년대에 용산전자상가 건립 이후 빠른 속도로 슬럼화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녹지 조성을 이유로 철거가 예정되었다가 사업성 유무와 각종 민원으로 계획이 표류됐다. 서울의 한가운데에서 45년 넘게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로 나이 먹으며 화려한 과거의 유령과 재개발의 유령이 기싸움을 하는 곳. 그런데 몇 년 사이 이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렴한 임차료의 영향이 컸다. 200/20도 그중 하나다.

 

200/20은 서점이다. 그런데 일반 서점과는 조금 다르다. 헌책도 있고 새 책도 있다. 독립 매거진도 있고 기성 출판사의 책도 있다. 판매는 기본이고 전시도 한다. 이곳은 그해 하나의 주제를 정해 그에 부합하는 책들을 들여놓는다. 누군가 주제에 맞게 컬렉션을 구성할 수 있다면 전시도 가능하다는 것. 중요한 건 모든 활동의 공통분모인 ‘텍스트’다.

 

200/20의 지향점은 책이라는 물리적인 상품보다는 ‘텍스트’를 파는 것이다. 김진하 운영자는 200/20을 “텍스트 중심의 개인 출판물과 아트워크, 아카이빙 작업물 등을 함께 판매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학창 시절부터 책 욕심이 커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는 책을 가지고 있기보다 ‘정말 잘 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서점을 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텍스트의 매개물 중 하나로 볼 수 있고, 그래서 김진하 운영자는 또 다른 매개방식을 꾸준히 모색한다. 그중 한 가지 방법은 공간에서 이야기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강연이나 대화. 4월 13일에 심보선 시인을 초대해 진행한 ‘어초문답(漁樵問答)’은 그 첫 번째 시도다. 어초문답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익지(益之) 이명욱의 그림 <어초문답도>에서 힌트를 얻은 주제다. 나무꾼과 어부가 강가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그곳의 일들에 대해 문답을 주고받음으로써 세상의 이치에 대해 논하는 장면. 김진하 운영자는 사전에 참여를 원하는 이들로부터 심보선 시인과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의 질문을 받았다. 세운상가를 바라보며 문답을 나눔으로써 세상의 이치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 것이다. 사실 ‘어초문답’의 힌트를 준 것은 이웃인 800/40의 김양우 공동운영자였다.

청계상가에 틈입한 책방 ‘200/20

저희는 세운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가 좋아요

800/40, 300/20은 각각 대림상가, 세운상가에 자리한 전시 공간이다. 한 가족 같은 ‘보증금/월세’ 이름을 처음 간판으로 내건 것은 800/40이다. 이문동에 있던 800/40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며 관계를 넓히기 시작했고, 인연을 맺었던 작가가 세운상가에 ‘300/20’으로 둥지를 틀었다. 800/40 역시 이문동 자리에서 임대차계약이 끝나자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근처 대림상가로 들어왔다. 2월 말에 문을 연 200/20 김진하 운영자도 실은 800/40에서 전시를 열었던 작가. 세운상가-청계상가-대림상가가 이웃해 있듯 이들 역시 형님, 아우 같은 공간으로 느슨하게 이웃해 있다. 그리고 페스티벌 <세운상가 좋아요 대림상가 좋아요 청계상가 좋아요>(3. 28~4. 18)를 열었다.

 

이들 공간이 ‘액면가 그대로’이듯 페스티벌도 이름 그대로다. 이들은 세운상가가 좋다. 페스티벌 프로그램으로는 ‘청계천 사생대회: 점선면 좋아요’, 각 참여 공간에서의 작품 전시 및 퍼포먼스, 그리고 이들 상가에서 수십 년 점포를 운영한 상인을 모시고 이야기 나누는 ‘선생님 좋아요’ 등으로 꾸렸다. 공간 운영자들은 이곳에 온 지 1년 남짓 되는 동안 상인회 회의에도 나가고 관공서 사람도 만나며 조금씩 ‘상가 사람’이 돼갔다. 최근에는 페스티벌을 준비하며 상인 분들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이들이 이해를 넓히는 만큼 이웃들 역시 작가들의 활동을 전보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30년 안팎을 지키며 세운상가의 흥망성쇠를 겪은 이들은 할 말이 많기도, 세운상가가 싫기도 하다. ‘선생님 좋아요’는 페스티벌 중 준비하기 가장 힘든 프로그램이었지만 그들에게 가장 많은 것을 남겼다. 참여 작가와 ‘선생님들’의 못다 한 이야기는 페스티벌을 2회, 3회 지속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으로 남았다.

좋아하는 예술의 매개자들

‘선생님 좋아요’에서 만나지 못한 이야기 중 일부는 서점 200/20에 가면 들어볼 수 있다. 차마 여러 사람 앞에 서는 것을 꺼렸지만 세운상가 45년의 산증인인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공간 운영자들만 듣고 덮긴 아까웠기 때문에 녹취 파일을 남겼다. 이것도 200/20이 이야기·텍스트를 쌓아가는 방식 중 하나다. 솔직하고 독특한 서점은 텍스트를 전하고 팔 수 있는 방법을 조용히 고민하며 ‘상가 책방’으로 자리 잡고 있다. 김진하 운영자는 틈틈이 자신의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두 달 남짓 서점을 운영하며 다른 이들과 관계를 확장해가는 것은 큰 소득이다. 관계 속에서 텍스트의 괜찮은 매개자가 되길, 이웃한 전시 공간 역시 그들이 바라듯 작가와 작품의 좋은 매개자가 되길 기대해도 좋겠다.


글 이아림 | 사진제공 200/20, 800/40, 3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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