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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서울문화재단

'여성'과 '사랑'에 대한 고찰 : 사진작가 황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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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재단의 ‘최초예술지원사업’에 선정된 젊은 사진작가 황예지. 그의 전시 <마고>가 지난 6월 18일에 시작해 오는 7월 20일까지 종로구 낙원상가 디피(d/p)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여성’과 ‘사랑’을 주제로 그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스냅 사진’을 전면에 내세웠다. 획일화된 사회적 강요에서 탈피해 주제에 대한 다층적 해석을 시도한 그의 작품들은 관람객에게 진한 물음표를 남긴다.

“작은 나는 엄마의 몸에서 일찍 떨어지고 싶어 했고 엄마는 나를 살리기 위해 다리를 묶어 올린 채 두 달을 살았다. 그 배에는 생명이 자주 오갔지만, 탄생은 적은 일이었다. 나는 세 번째로 태어났고 두 번째로 살아남았다. 첫 번째로 태어난 언니와 나 사이에는 삶이 하나 있었다. 삶의 주인이었던 이는 우리와 같은 여자였고 모두가 눈을 떼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실체를 마주한 적 없는 유령이지만 내게도 그랬을 것이다. 엄마에게 유령을 말하면 슬펐다고, 아주 슬펐다고 대답한다. 죽어가는 딸을 안고 달리는 시간은 내가 셈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열 달의 형상과 현상이 사라졌다. 이름은 없었다. 의사는 상실을 무뎌지게 하려면 누군가를 만드는 일밖에는 답이 없다고 했고 그 누군가는 내가 되었다. 나는 어떤 상실을 상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내가 몇 살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 시간의 축이 자주 흔들리는 것이 어쩌면 유령과 나의 접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내내 애도했다.”

작가노트에서 우연히 접한 이 글은 잔잔한 여운을 줬다. 몇 문장으로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고백한 경우를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겪었을 긴장, 분노, 탄식이 내게도 공명해왔음이 분명하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렇게 시작한 인터뷰를 통해 그가 지금부터 멀지 않은 과거에 사진을 전공한, 젊은 예술가임을 알았다. 전시 경험도 동료들과 함께했던 두어 번의 단체전이 전부일 정도로. 서울문화재단의 ‘최초예술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생애 첫 지원금을 손에 쥔 순간이 이번 전시의 방아쇠를 당겼을지 모른다. 전시 <마고>의 사진작가 황예지. 그는 이번 전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여성과 사랑에 대한 다층적 해석을 다룬 전시입니다.”

획일적인 방식과 사회적 강요에 반기를 들다

<신호>(Signal), 2019. 황예지 작가의 언니가 유리알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 <마고> 전시 전경.

<마고> 전시 전경.

그는 전시 주제를 ‘여성’과 ‘사랑’이라고 소개했다. 여기에 ‘다층적’이라는 전제조건을 붙였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렇고, 사랑을 대하는 방식도 ‘일방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그에 대한 해석이 ‘여럿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전시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는 “사회가 준 일방적인 감정을 가미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무엇을 강요받았기에 이토록 간절하게 말하는 것일까. 그는 전시의 제목을 <마고>라 지었다. 그런데 원래는 <러브 퓨어 게임>(LOVE PURE GAME)이었단다. ‘순수한 사랑’이라 일컬었던 이전 제목을 부제로 돌리면서 느낌만 살린 것으로 보인다. 마고. 이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남성 없이 인간의 시초를 만든다는 창조주 ‘마고할미’에서 따왔어요.”

 

인간을 만드는 데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남성 없이 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자웅동체도 아니고 엉뚱한 상상이리라. 하지만 이것은 전시의 주제와 연관이 깊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여성의 초상을 찍는 데 관심을 두었다. 17살부터 시작된 제도권 교육 아래의 사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주제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에 시작한 ‘여성 초상’이 ‘여성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단다. 물론 피사체는 엄마와 친언니로 시작했다. 그가 가족을 찍기 시작한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엄마가 집을 나갔어요. 집이 갑자기 힘들어졌고, 엄마는 몸이 아파 살기 위해 나갔죠. 간혹 연락이 오긴 했어요. 그런데 살갑게 받아주지 않았어요. 10년 동안 제 곁을 떠났던 엄마의 빈자리는 6살 위의 언니가 대신했어요. 얼마 전 엄마가 돌아왔어요.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말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요.”

 

10년 만에 모인 가족은 서로를 낯설어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순탄치 않은 가정사 때문에 평범한 접근(?)이 쉽지 않았다. 그렇게 부풀려진 어색함을 억누르기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사진이다. 엄마와 언니는 그렇게 작가의 피사체가 됐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 서기도. 마음을 여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래도 반복해서 찍으니 그들의 마음이 점차 열리기 시작했다.

 

유년기와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본인만의 성정체성이 새로이 확립됐다.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바이섹슈얼임을 알았다. 그때부터 획일화된 방식으로 사랑을 정의 내리는 사회에 저항했다. ‘여자가 어떻게 여자를 좋아할 수 있어?’라는 말은 그에게 사랑을 바라보는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을 증폭시켰다. 처음 시작한 ‘마고할미’의 어원으로 되돌아가보자. ‘남성 없이 인간을 창조할 수 있다’는 상상은 ‘반드시 이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회적 강요에 반기를 든 것이다. 작가는 ‘여성’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와 언니를 찍은 사진을 모아서 책을 냈어요. ‘아무도 없는 계절’이라 생각한 <절기>입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온도와 같을까요? 제게 보호자가 없다는 생각과 엄마의 역할을 대신한 언니의 존재를 담고 싶었어요.”

 

가족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대상이 여성으로 넓어졌다. 각자의 여성으로 살아온 시간들. 작가는 여기에 ‘숭고’라는 포인트를 주고 싶었다. 그는 ‘여성다움’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여성이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나요? 처연해야 하나요? 여성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사회가 준 감정을 가미한 것이죠. 강인한 여성을 보여주고 싶어요. 제 사진은 약간 어그러져 있어요. 가령, 튼 살들. ‘미’와 ‘추’의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숭고하게 다루고 싶거든요.”

 

<마고>는 ‘사랑’을 주제로 공간별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공간은 키워드에 맞춰 작가의 작업을 저장했다. 다른 곳에선 가족과 성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나머지는 동료들에게 유형학/주제론, 과거의 이미지 생산법을 제시해 사랑을 구현했다. 이는 사랑의 의미를 확장시킨 것이다. 사진계 안에서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행위를 무효화하고 젊은 사진의 역량을 호소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전시의 메인 공간은 작가가 겪고 동침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떠났던 엄마와 엄마 역할을 대신했던 친언니를 시작으로 학창시절을 지나 양성애자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사진으로 풀어냈다. ‘자궁, 히스테리아’라는 단어를 통해 그동안의 사랑을 미화하지 않고 픽션으로 조립했다.

 

전시의 대상이 ‘자궁을 가진 사람들’로 정해졌다. 역시 사랑에 대한 다층적 해석과 연관돼 보인다. 왜 그들일까. “엄마도 언니도 친구들도 저마다의 히스토리가 있어요. 여자로서 역사가 다르거든요. 역사를 모아서 또 다른 하나의 큰 역사처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는 옛것과 새것이 충돌한다고 믿는다. 이는 수고롭게 채집하면서 동시에 떠나보내는 일이다. 누구는 명징한 것 같으면서도 명징하지 않다고. “한국 사회는 획일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삶에 사랑을 포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 혹은 사랑하지 않음에 대한 죄책감을 자신의 시각에 대입하죠. 획일화된 사랑에 사소한 대항을 하고, 물음표로 끝나는 팻말을 관객에게 넘길 거예요. 사랑에 대한 탈피와 고찰을 작게는 개인이, 크게는 사회가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번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에피소드를 이렇게 공개했다.
“하나의 신화가 내 눈앞에서 일어났다. 태어난 순간부터 여자라는 이름의 연대기가 시작되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고 여자의 생을 빌렸고 여자를 사랑했다. 여자의, 여자라서, 여자인. 그 이름이 내게 드넓다. 숭고한 표정을 짓는다. 쓰러진 등줄기는 능선이 되었고 갈라진 피부는 개천이 됐다. 서로의 팔목을 잡고 원을 그린다.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우리야. 비릿한 만큼 창조야.”

사진의 ‘문장 구조’

소셜 네트워크의 등장으로 이미지를 생산하며 재현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지금은 대중이 이미지를 수집하기 쉬운 환경이 됐다. 게다가 사진은 손대기 쉬운 매체로 변했다. 반면 전시장 안의 사진은 속도감에서 조금씩 뒤처진다. “현재의 한국 사진 생태계는 기형적이고 불안정해요. 전시장에 걸리는 사진은 유형과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젊은 사진 사이에서는 ‘스냅’을 파괴하는 사진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대중만의 사진을 읽는 눈이라며, 이것을 가독성이라 말한다. 젊은 이미지를 전통의 잣대로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읽으려는 노력과 인정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현재의 ‘이미지 생태계’와 ‘사랑의 혼동’이 매우 흡사하다 한다.

 

‘사진은 예술이다, 혹은 아니다’라는 논쟁이 외국보다 한 차례 늦게 시작된 것처럼 현재 한국에서는 ‘스냅 사진은 예술이다, 혹은 아니다’가 쟁점이 되고 있다. 그것은 ‘스냅 사진’을 가벼운 존재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담화는 최근 몇 년간 암묵적으로 지속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젊은 사진가들은 전시장이 아니라 스크린 혹은 재생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가독성이 증가하고 있는 현대에 사진예술의 속도가 불어나는 것과 다채로워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마고>는 그가 찍은 14점의 사진을 비롯해 그동안의 작업 과정을 담은 짧은 영상, 어머니의 토템을 확장시킨 조형물을 전시한다. 고등학교 이후 줄곧 사진을 공부하면서 기성 교육을 받았지만 그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스냅’을 전면에 내세웠다. 사진 14점의 각각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다. 한 장씩 설명하던 작가는 이내 대답을 주저하며, “단편적인 이미지보다는 전체 사진들의 흐름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이는 연속된 이미지를 통해서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문장 구조’를 이해해달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것을 ‘조어술’이라 불렀다. “전시는 사진의 묶음으로 이뤄졌어요. 몇 문장으로 구성된 단편들이 배열된 것처럼요. 사진의 순서에 따라 문장의 어순이 정해지듯 말이죠.”

체감을 위한 변주

사진은 시각예술이다. 시각은 광각이 있어야 가능한데 사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시의 주제를 보다 명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또 다른 조건이 제시됐다. 그것은 작가가 전하려는 느낌이 관객과 충분히 공감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가 ‘체감’하길 원하는 이유도 어떻게 보면 ‘시각’적인 결과를 보완할 감각으로 ‘청각’과 ‘후각’이 필요했던 것이다. 작가는 주제와 어울리는 향을 준비했다. 여기에 공간과 작업 분위기를 해석하는 사운드 디자이너, 그리고 그가 직접 쓴 수필을 낭독할 성우까지 섭외하면서 관객이 본 전시에 적극적으로 빨려 들어가길 유도했다. 전통적인 독법과 다른 새로운 방법. 그는 변주를 고안하는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다.

 

“시각적인 정보들은 대중이 흥미를 잃었고, 이해를 돕기 위한 새로운 방법은 사진이나 사랑이나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글 이규승 서울문화재단 홍보팀장

사진 조현우

사진 제공 황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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