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감산만으로는 부족하다
CEO's Spirit 17. 삼성전자 반도체 실적 점검 및 전망
Keywords
-1분기 실적: 엎질러진 물
-마이크론&SK하이닉스: 풍전등화
-ASML&TSMC: 순망치한
-인텔&삼성전자: 절치부심
-2분기 실적: 가리워진 길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시작한 2023년의 1분기가 모두 지나 기업들이 하나 둘 성적표를 공개하고 있다. 현대차는 제품믹스 개선, 인센티브 감소, 환율 상승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며 역대 최대 1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LG전자는 가전에서 선방하고 전장에서 대박을 터뜨린 데 더해 비용 통제를 성공적으로 매니지먼트하면서 체질 개선을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실적을 기록하며 시장 예상치보다 저조한 실적을 공개했다. 일각에서는 업계 1위인 삼성전자가 감산에 동참했으니 조만간 업황이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하지만 공급 감소는 턴어라운드를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수요 증가라는 충분조건이 만족되지 못하면 삼성전자의 감산은 무의미하다. 이번 1분기 실적은 엎질러진 물이고 앞으로가 중요하다.
|1. 마이크론&SK하이닉스, 살아남는 게 먼저다.
마이크론은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실적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풍향계라고 불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1월부터 3월까지 집계해서 4월 말에 실적을 발표하기 전에 전년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집계해서 3월 말에 실적을 발표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트렌드와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이크론은 3월 말에 매출액 36억9300만 달러, 당기순손실 23억1000만 달러라는 저조한 실적을 발표하면서 추가적인 투자 축소를 시사했다. 기존에 최대 75억 달러까지 투자할 수 있다는 계획을 최대 70억 달러로 낮춘 것에 대해 감소 폭이 작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작년에 이미 대규모 투자 축소를 선언한 마이크론이 눈높이를 더 낮춘 것은 자존심을 지키기 힘들 만큼 재무 상황이 안 좋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SK하이닉스는 실적이 발표되기 직전까지 예상치가 끊임없이 내려가며 무시무시한 1분기를 보냈다. 이번에도 역시 마이크론을 따라서 매출액(5조881억 원)은 반토막 이상이 났고 영업손실(3조4023억 원)은 SK그룹 편입 이후 최악을 기록했다. 업계 1위인 삼성전자가 결국 감산에 돌입하면서 이번 컨퍼런스 콜에서는 추가적인 감산이나 투자 축소를 표명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업황 회복을 전망하지도 않았다. 단지 수익성이 높은 제품 위주로 판매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전할 뿐이었다.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는 경기에 민감한 메모리 반도체의 하락 사이클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당분간 투자를 늘리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동안 삼성전자를 기술적으로 많이 추격한 지라 아까울 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살아남는 게 먼저다.
|2. ASML&TSMC, 완전무결한 강자는 없다.
ASML은 반도체 한파에도 준수한 실적을 기록했다. 매출액(67억4600만 유로)은 전년 동기 대비 90% 이상 증가했으며, 당기순이익(19억5600만 유로)은 전년 동기 대비 무려 180% 이상 증가했다. ASML이 기록한 매출총이익률 50.6%은 물건 하나를 팔면 원가보다 많은 마진을 남긴다는 뜻인데 상황이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2분기에도 매출총이익률 50%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는 점이 새삼 놀랍다. 하지만 이런 ASML도 절대 무적은 아니다. 아직은 수주 잔고가 많더라도 반도체 업황 부진이 길어지면 오더 컷이 발생할 수 있고 중국 시장의 판로가 막히면 실적 타격이 불가피하다. 게다가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와 램리서치가 EUV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점도 ASML이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이유이다.
TSMC는 양호한 실적을 기록했으나 기대치가 너무 높았다. 매출액(5086억3000만 대만달러)과 당기순이익(2069억9000만 대만달러)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 3% 정도 상승했지만 전 분기 대비로는 각각 20%, 30% 정도 하락했다. 메모리 반도체는 적자가 얼마냐 난리인 와중에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이 상승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시장 심리는 인색하다. 심지어 아이폰 수요마저 꺾이면서 TSMC가 영업이익률 목표치를 1분기 45%에서 2분기 40% 수준으로 하향 조정하자 비관론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때마침 워런 버핏이 TSMC 매도 이유를 지정학적 우려라고 밝히자 언론은 중국 리스크를 부풀리고 나섰다. ASML과 TSMC 같은 슈퍼 을, 슈퍼 병에게도 약점은 존재한다. 경제가 박살나고 평화가 깨져도 잘나가는 완전무결한 강자는 없다.
|3. 인텔&삼성전자,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인텔은 실적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만 시장의 관심은 미래에 있다. 인텔의 매출액은 117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6% 감소했고 순이익은 81억 달러 흑자에서 28억 달러 적자로 전환되었다. TSMC와는 정반대로 시장이 인텔에 거는 기대치는 매우 낮아서 좋아지려는 노력만 조금 보여도 호평을 받는 상황이다. 인텔은 팻 겔싱어 CEO가 부임 3년 차에 접어들면서 IDM 2.0 전략을 가다듬고 이에 부합하지 않는 사업부는 구조조정하면서 부활을 위한 채비를 마쳤다. AMD가 글로벌파운드리스를 분사하고 엔비디아가 TSMC와 협업하면서 시스템 반도체는 팹리스 전성시대가 되어가는 듯 했지만, 끝까지 파운드리 서비스를 놓치 않은 인텔이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어서는 모습을 보인다면 시장은 왕이 돌아왔다는 찬사를 보내며 환호할 것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에서 크게 입은 상처를 스마트폰 사업으로 덮었다. 삼성전자의 매출액(63조7454억 원)은 2021년 수준으로 되돌아갔고 영업이익(6402억 원)은 초라했다. 갤럭시S23이 없었다면 대규모 적자(4조5800억 원)를 기록한 삼성전자 반도체는 레거시 공정 위주로 생산량을 하향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의 뒤늦은 감산 결정에 비판의 목소리도 높지만 경쟁사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눌러놓았다는 점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견해도 있다. 삼성전자만이 감당할 수 있는 마일드 치킨게임을 끝내고 시스템 반도체 비전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인텔과 삼성전자는 덩치가 커서 급격한 시장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백전노장처럼 이 둘의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대한민국에는 반도체 말고도 다양한 산업군이 존재한다. 특히 배터리와 바이오는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중심으로 실적 기여도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리고 기타 반도체 기업들이 대한민국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20%를 훌쩍 넘는다. 수출 주도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전체 수출액의 20% 이상을 책임지는 반도체가 좀처럼 반등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기업이 잘해도 경제가 살아날 수 없다. 안타깝게도 2분기 실적 전망도 밝지 않다. 하반기 반등을 전망하는 곳도 있지만 확신에 찬 곳은 없다. 결국 K-반도체에게 지금 필요한 건 인내와 혁신이다. 보일 듯 말 듯한 실적의 가리워진 길 속에서 반도체 수요를 폭발시켜 줄 새로운 디바이스나 어플리케이션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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