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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들판 뒤 다도해… 포로수용소의 상흔을 보듬다

바람의 섬 거제, ‘김치(Kimchi)5’의 평화 만들기는 계속된다

황금들판 뒤 다도해… 포로수용소의 상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30분 오르면 계룡산 정상에 닿는다. 전망대 아래로 거제면의 들판과 다도해 풍경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포로수용소의 통신대 유적도 남아 있지만 전쟁의 상흔이 느껴지지 않는다. 거제=최흥수기자

“거제(巨濟)는 크게 베푼다는 뜻으로 세 번이나 나라를 살렸습니다. 옥포대첩으로 나라를 구했고, 6ㆍ25 때는 피란민들을 살렸고, IMF 때는 거제의 조선산업이 경제의 버팀목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이름값을 한 셈이지요?” 신영희 거제문화관광해설사의 자랑이다. 거제도는 제주도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조선산업의 호황으로 일인당 국민소득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기초자치단체라고 자랑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인데, 지금은 반대로 그 때문에 휘청거리고 있다. 조선소를 제외하면 거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관광지가 남부면 ‘바람의 언덕’이다. 따지고 보면, 거제는 언제나 바람 타는 섬이었다. 남해 끝자락이라는 지리적인 특성과 맞물려 역사적으로도 가장 먼저 거센 바람과 맞닥뜨린 땅이었다.

거제의 또 다른 전쟁,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한국전쟁은 남북이 대치하는 전선과 멀리 떨어진 거제에도 큰 상흔을 남겼다. 당시 거제는 지금처럼 다리로 연결된 것이 아니어서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렸을 때도 전쟁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1951년 포로수용소가 들어서면서 주민들은 뒤늦게 전란에 휘말리게 된다. 현재 시청이 들어선 고현동을 중심으로 계룡산과 독봉산 일대 6개 마을 주민은 영문도 모른 채 살던 땅에서 강제로 내쫓겼다. 12㎢(360만평)에 달하는 땅에는 60ㆍ70ㆍ80ㆍ90 단위의 숫자로 구역을 나눠 포로수용소가 들어섰다. 이렇게 만들어진 28개 수용동에는 전쟁포로로 잡힌 인민군 15만명, 중공군 2만명 등 17만 3,000여명이 수용됐다. 수용소 시설을 지원할 비행장, 보급창, 병원, 도로, 탐조등도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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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남아 있는 당시 건물 외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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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모를 씌운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의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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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모형의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의 전시관.

애초에는 포로수용소 장소로 제주가 거론됐지만, 빨치산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와 최악의 경우 제주를 임시수도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제외됐다. 대신 육지에서 가까워 포로 이송과 물자 수송이 쉽고, 겨울에도 크게 춥지 않다는 이점 때문에 거제로 결정됐다.


20평 막사에 60~70명이 밀집해 생활했던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 유혈 살상이 빈발했다. 포로수용소 자체가 이념 갈등의 축소판이자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사령관이었던 도드 미군 준장이 포로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도드 준장은 후임 콜슨 소장이 반란 포로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문서에 서명하고 풀려날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둘은 대령으로 강등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흔히 무질서한 상황을 비유하는 ‘도떼기시장’이 ‘도드’ 준장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시끌벅적한 상황에서 비밀로 거래되는 비정상적인 시장을 뜻하는 말이니 의미가 크게 틀리지 않다. 포로수용소에 인공기와 김일성 초상화가 걸리고, 인민군 군가까지 울려 퍼졌으니 도떼기시장이 따로 있겠는가.


현재 계룡산 동쪽 자락에 조성한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는 당시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포로수용소가 폐쇄되자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강제로 내쫓겼던 주민들이 들어와 논밭을 일구고 다시 삶터를 꾸렸기 때문이다. 일부 남은 포로수용소 유적은 1983년에 경상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고, 1999년에야 미국까지 뒤져서 모은 1,300여점의 사진과 문서 등으로 유적관을 개관했다. 이럭저럭 묻힐 뻔했던 분단의 아픈 역사가 뒤늦게나마 다시 조명받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흥남철수작전과 김치파이브 형제의 평화만들기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크게 전쟁, 포로, 복원, 평화 존(Zone)으로 구분돼 있다. 동선을 따라 이동하며 찬찬히 보려면 1시간 넘게 걸린다. 공원에 들어서서 전쟁 존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흥남철수작전기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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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의 흥남철수작전 기념비와 메러디스 빅토리호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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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들이 흥남부두에서 메러디스 빅토리오에 오르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15일부터 열흘간 함경남도 흥남 부두에서 민간인 10만명을 성공적으로 후송한, 세계전쟁사에서 가장 인도주의적 작전으로 평가된다. 기념비 앞에는 그중에서도 전설적으로 작전을 수행한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에 오르는 피란민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원래 상선으로 사람은 승무원 60명만 태울 공간이 있었지만, 모든 화물과 자체 시설까지 버리고 흥남부두에 남은 1만4,000여명을 무사히 남쪽으로 수송했다. 이 작전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애초 부산항에 피란민을 내려 놓을 예정이었지만, 부산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러 거제로 방향을 틀었는데, 장승포항에 도착한 것이 마침 12월 25일이었다. 흥남에서 거제까지 3일간의 항해 도중 비좁은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 작전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마무리된다.

황금들판 뒤 다도해… 포로수용소의 상

피난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김치1’ 손양영(왼쪽)씨와 ‘김치5’ 이경필(오른쪽)씨가 올 4월 당시 선원인 벌리 스미스(왼쪽에서 두 번째), 당시 14세였던 원동혁(오른쪽에서 두 번째)씨와 함께 찍은 사진. 옥영태 Kimchi5평화통일연구회 대표 제공.

황금들판 뒤 다도해… 포로수용소의 상

이경필(왼쪽부터)씨와 손양영씨가 2016년 11월 서울역 앞 연세세브란스빌딩에서 열린 흥남철수작전의 영웅 현봉학박사 동상 제막식에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만나 대화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부모도 이들과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거제에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옥영태 Kimchi5평화통일연구회 대표 제공

태어난 순서대로 ‘김치(Kimchi)1~5’로 별명을 붙인 아이 중 ‘김치5’ 이경필씨는 지금도 장승포에서 가축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 원장의 부모는 거제에서 평화사진관, 평화상회, 평화식당 등을 운영했다. 이 원장의 병원도 애초에 ‘평화’ 가축병원이었다가 부친이 세상을 뜬 후에야 ‘장승포가축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모두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는 선친의 절절한 바람을 반영한 상호였다.


이 원장은 “흥남철수작전에 투입된 배가 미국에 4척이 남아 있는데, 한 대라도 들여와 인류애와 세계평화를 상징하는 독립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이 일생의 희망”이라고 밝혔다. 현재 포로수용소 공원의 일부로 취급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다섯 ‘김치 형제’ 중 지금은 이경필 원장과 서울에 살고 있는 ‘김치1’ 손양영 경동글로벌리소시스 대표만 확인되고, 나머지 3명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이 원장과 손 대표는 당시 한배를 탔던 사람들과 모임을 꾸리고 ‘한반도 평화 만들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동승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 화해 정책을 가속화하는 문 대통령과 ‘김치 형제’는 결국 ‘한반도 평화호’라는 같은 배를 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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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는 일부 건물의 외벽만 남아 있다.

포로생활관과 사상대립관, 폭동체험관 등으로 꾸민 ‘포로 존’을 지나면 당시 유적이 남아 있는 ‘복원 존’으로 연결된다. 경비대장 집무실과 경비대 막사, 피엑스(PX)와 무도회장 건물의 외벽 일부가 남아 있는데, 표시가 없으면 그냥 스쳐갈 정도여서 당시의 혼란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6ㆍ25 전쟁과 포로수용소의 배후 시설이었던 미군 통신대의 잔해 일부는 수용소 뒤편 계룡산(566m) 정상에 남아 있다. 계룡산은 거제도의 중앙에 우뚝 솟은 산으로 정상부의 바위 능선이 닭볏과 비슷하게 생겨서 이렇게 불린다. 충남의 계룡산과 이름이 같다. 고현동과 거제면에서 등산로가 나 있는데, 지난 3월 포로수용소공원에서 정상까지 ‘거제관광모노레일’이 개통해 한결 쉽게 오를 수 있다. 왕복 약 3.5km 구간을 6인승 모노레일이 4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올라갈 때 30분, 내려올 때 20분 정도 걸리는데, 솔숲을 통과할 때는 운치가 그만이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릴 땐 아찔한 스릴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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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3월 개통한 거제관광모노레일.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계룡산 정상까지 4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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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전망대에서는 다도해와 거제면 들판이 한눈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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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거제면 명진리 들판에 문재인 대통령의 생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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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정상에 남아 있는 포로수용소 통신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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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대에서 보이는 통영의 용초도와 추봉도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상부 모노레일에서 내려 능선으로 이동하면 거제의 서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거제에서 그나마 평야지대인 거제면의 황금들판 뒤로 다도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거제의 산달도와 통영의 한산도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떠 있는데, 통영의 용초도, 추봉도도 한때 포로수용소가 들어섰던 섬이다. 유엔군의 통신대와 부속 건물이 이곳에 들어선 이유도 거제포로수용소와 이 섬들 간 연락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통신대 건물도 수용소의 유적처럼 외벽만 앙상하게 남았는데, 전망대와 산책로는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내려다보는 풍경은 더없이 풍성하고 평화로워 전쟁은 이미 먼 이야기가 되고 만다.

승리와 패배의 역사, 옥포대첩기념공원과 칠천량해전공원

왜구 출몰 이래 거제는 언제나 한반도의 최전방이었다. 옥포대첩기념공원은 임진왜란 당시 첫 승리인 옥포해전을 기념해 조성한 공원이다. 옥포해전은 1592년 음력 5월 7일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연합 함대가 옥포만에서 왜선 50여척 중 26척을 격침시켜 이후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한 싸움이다. 무방비 상태의 조선이 일본 수군을 맞아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승전으로, 왜의 육로 전진을 지연시키고 아군의 사기 진작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사후에 올린 장계에는 왜군 4,080명이 죽고 아군은 2명이 부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제와 옥포를 ‘구국의 고장’이라 자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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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대첩기념공원의 옥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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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대첩기념공원에서 옥포만으로 눈을 돌리면 대우해양조선의 크레인과 대형 선박이 가득하다.

옥포동 산1번지에 조성한 공원에는 기념탑과 참배단, 이순신장군 사당 등이 들어섰다. 옥포루에 오르면 정면으로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기념탑에서 우측으로 내려다보면 옥포만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 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다지만, 대우조선해양의 대형 크레인과 건조 중인 선박의 웅장한 모습에는 여전히 힘이 느껴진다. 기념공원에 이르는 해안도로에서 펼쳐지는 전망도 시원하다.


거제에 승리의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옥포대첩 5년 뒤인 1597년에 벌어진 칠천량해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최대 패전으로 기록된다.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부산에서부터 밀리다 칠천량 앞바다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전함 180척 중 150척이 침몰하고, 1만여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으며 참혹하게 패했다. 부산과 통영을 잇는 칠천량 좁은 물길이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원균과 불화를 겪은 이순신이 삼군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되고, 두 번째로 백의종군하던 때였다.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한 후 그에게 남은 것은 칠천량해전에서 도망한 배설이 바친 12척의 배가 전부였다. 수군의 폐지를 명령한 조정에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고 한 비장한 결의의 근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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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의 참담한 패배를 재현한 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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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통영을 연결하는 물길인 칠천량 앞바다는 전쟁터였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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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공원에서 내려다 본 칠천량 앞바다.

칠천량해전공원은 지우고 싶은 패배의 역사를 담담하게 조명하고 있다. 전시관에는 임진왜란의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전시물 외에, 칠천량해전의 참혹한 장면도 모형과 3D로 재현하고 있다.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는 교훈을 되새기려는 듯, 출입구 유리는 검게 코팅돼 있다. 공원이 조성된 칠천도는 현재 거제 본 섬과 교량으로 연결돼 있다. 그날의 치욕을 뒤로하고, 공원에서 내려다보는 칠천량 앞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아름답다. 푸른 물결 위엔 양식장 부표가 가지런하고, 그 너머 마을과 산자락엔 맹종죽 숲이 연둣빛 봄처럼 일렁인다.

김영삼과 문재인, 담쟁이 휘감은 두 대통령 생가

거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고향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김영삼대통령 생가는 장목면 외포리에 있다. 몽돌해변이 마을 안쪽으로 둥글게 펼쳐진 아담한 포구다. 김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태어나 13세까지 생활했다. 1893년 지어 허물어져 가는 기존 생가를 해체하고 2001년 복원했다. 5동의 기와집 생가는 돌담으로 둘렀는데, 담쟁이가 운치 있게 뒤덮고 있다. 대청 마루 위에 ‘호연지기(浩然之氣)’라 쓴 김 대통령의 자필 현판이 걸려 있고 방에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찍은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바로 옆에 세운 기록전시관에는 생명을 건 단식과 6월 민주항쟁을 비롯한 정치인 김영삼의 인생 역정과, 금융실명제와 조선총독부건물 해체 등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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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가 운치 있게 덮고 있는 김영삼대통령 생가의 돌담. 오른쪽은 기록전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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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대통령 기록전시관 내부 전시물.

문재인 대통령 생가는 거제면 명진리에 있다. 계룡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제법 넓은 들판에 1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다. 생가는 북에서 피란 온 문 대통령 부모가 세 들어 살던 곳이다. 문 대통령은 이곳에서 7세까지 살다가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주했다. 당시 문 대통령의 탯줄을 끊은 집주인은 거제 토박이였고, 현재까지 이 집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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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면 명진리의 문재인대통령생가. 외지인의 출입에 시달린 주인이 담장을 치고, 가림막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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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리는 거제에서 제법 들판이 넓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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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대통령이 태어난 명진리는 소박한 농촌 마을이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 생가를 찾는 이들이 몰렸고, 집 주인으로선 불쑥불쑥 쳐들어오는 외지인이 반가울 수만은 없다. 현재 철제 울타리에 출입을 삼가 달라는 안내판을 달아 놓았다. 대신 출입문 바로 옆 정체를 알 수 없는 컨테이너에 ‘문재인 대통령 출생지’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슬레이트 지붕 흙집은 곧 허물어질 듯한데, 담쟁이가 빼곡하게 덮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니만큼 생가 복원이든 보존이든 지금으로선 앞서가는 조치다. 이곳이 어떻게 변할지는 전적으로 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시점의 평가에 달려 있다.


거제=글ㆍ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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