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관 꽃길’ 사양하고 시골판사 택한 박보영 前대법관
소액건 맡는 여수 시-군 판사 지원
‘非서울대-싱글맘’ 대법관으로 이목
변협 “임용 거부하지 않길…” 환영
박보영 전 대법관. 한국일보 자료사진 |
올 1월 퇴임한 박보영(57ㆍ사법연수원 16기) 전 대법관이 선택한 ‘인생 2막’이 법조계 안팎에 울림을 주고 있다. 수억원대 수임료가 보장되는 대형 로펌이 아닌 서민의 애환이 담긴 생활 법정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해서다. 법조계에 뿌리깊은 전관예우 관행을 극복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례라는 평가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박 전 대법관은 최근 법원행정처를 통해 전남 여수시 시ㆍ군법원 판사에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ㆍ군법원은 3,000만원 미만 소액심판 사건이나 즉결심판 사건 등을 다루는 소규모 법원이다. 법원은 1995년부터 법조 경륜이 풍부한 원로 법조인들이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의미로 시ㆍ군 판사로 근무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해 왔다.
하지만 이제까지 대법관 출신이 지원한 사례는 없다. 임기 6년을 마치면 새로운 ‘꽃길’이 기다리는 전직 대법관이 중소도시에서 판사직을 다시 하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은 그만큼 이례적인 셈이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은 전관예우 관행의 정점에 있다. 대법원 상고심은 최종 판결이 이뤄지는 곳인 만큼 전관들 몸값이 그만큼 올라갈 수밖에 없어서다. 대법관 출신으로 로펌에 들어가거나 개업을 하면 ‘이름값’(도장값)만 3,000만원, 수임료는 최소 1억원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실제로 안대희 전 대법관은 퇴임 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5개월간 16억원을 번 것이 알려져 국무총리 후보자에서 낙마했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대법관을 마친 후 변호사로 5년간 활동하며 60억원의 수임료를 받은 게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대법관 퇴임 후 변호사로 전직하는 관행은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대법관 등 최고위직 전관에 대해 변호사 등록과 개업을 2년간 제한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2년이 지난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은 경우는 김영란ㆍ전수안ㆍ박시환 전 대법관 등 손에 꼽을 정도다. 현직 중에는 김재형, 박상옥, 조재연 대법관이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박 전 대법관의 독특한 이력 역시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18년동안 판사로 재직하다 2004년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2012년 대법관 임명 과정에서 ‘비서울대’(한양대) 출신에 ‘싱글맘’으로 화제가 됐다. 불교에 심취한 남편의 출가로 이혼한 뒤 세 자녀를 혼자 키워온 사연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대법관 퇴임 후 사법연수원과 한양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그는 고향(전남 순천)에 내려가 법조 경륜을 활용할 길을 찾다 시ㆍ군 판사에 지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현 대한변협 회장은 “변협이 대법관들의 변호사 개업을 반대해 온 것은 대법관 퇴임 후에 바로 이런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라며 “대법원이 다른 대법관 눈치를 보느라 임용을 거부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법관인사위원회와 대법관회의 동의 절차를 거쳐 시ㆍ군 판사 임용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박 전 대법관은 법관임용신청 여부에 대한 한국일보의 확인 요청에 “아직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다”고 밝혔다.
유환구 기자 redsu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