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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 목욕탕에 숨긴 간첩.... 거세진 '설강화' 민주화 훼손 논란

"우리 오빠 데모하다 잡혀가" 간첩 돕는 여주인공

"방송 중지" 청원 하루 만에 20만 넘어

박종철 기념사업회 "안기부를 피해자처럼 그려" 비판

세계시민선언, "방영 중지" 가처분 신청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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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설강화'에서 호수여대생인 정민(김미수·왼쪽부터) 설희(최희진) 영로(지수)가 기숙사 사우나에 안기부에 쫓기는 수호(정해인)를 숨겨두고, 뒤이어 찾아온 안기부 요원을 보고 겁에 질려 하고 있다. 세 여대생은 수호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 쫓기는 학생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남파간첩이다. JTBC 방송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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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설강화'에서 수호가 호수여대 기숙사 사우나실에서 숨어 있는 모습. JTBC 방송 캡처

JTBC 드라마 '설강화'가 부적절한 연출로 민주화 역사 왜곡 논란을 빚고 있다. 독재 타도를 외치는 대학생 시위 현장에서 남파 간첩을 추격하는 장면으로 민주화 운동의 본질을 훼손하고, 운동권 오빠를 둔 여주인공이 궁지에 몰린 간첩을 돕는 장면을 내보내 민주화 운동 희생자 유족에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엔 '설강화' 방송 중지를 요청하는 청원 글이 19일 올라와 20일 오전 정부 답변 기준을 넘어 24만여 명의 동의를 얻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드라마 시청 거부 움직임도 일고 있고, 역풍이 거세지자 일부 협찬사는 지원을 철회했다. 시대극에서 배경으로 역사를 끌어다 쓸 때 신중한 접근을 원하는 요즘 대중의 정서를 제작진이 간과했다는 지적이다. 앞서 3월, 역사 왜곡 논란으로 방송 2회 만에 사라진 '조선 구마사'와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는 분위기다. 청년단체인 세계시민선언은 22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설강화'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낼 예정이라고 이날 밝혔다.

고문 없는 세상에~ 깃발 든 데모 현장에 간첩 추격전

'설강화'는 올봄 미완성 초기 개요(시놉시스) 일부가 온라인에 퍼진 뒤 1987년을 배경으로 간첩과 여대생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고 알려져 제작 단계부터 비판을 받아왔다. 방송사와 제작진은 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안기부와 간첩을 미화하는 드라마가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18, 19일 1, 2회가 방송되자 "우려가 현실이 됐다"며 비판은 더 거세지고 있다.


1회에선 대학생들이 독재정권에 맞서 시위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안기부 요원 강무(장승조)가 수호(정해인)를 추격하는 모습이 함께 방송됐다. 간첩이 버젓이 거리에 활보하는 데 대학생들은 철없이 데모를 한다는, 당시 군부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 논리를 재생산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는 대목이다.


간첩이 쫓기는 장면에선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흘렀다. 이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은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군 사망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폭발하던 때다. 1 ,2회에서 여대생 영로(지수)는 미팅에서 만난 수호가 데모를 해 경찰(불심검문)과 안기부에 쫓기는 줄 알고 그를 두 번이나 구해준다. 그 이유로 영로는 "오빠가 데모를 하다 잡혀갔었다"며 "우리 오빠도 누가 도와줬으면 잡혀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설강화' 방영 중지 청원을 한 글쓴이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쓴 희생자들이 실존하는데 왜 이런 설정을 내세웠는지 의문"이라며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훼손하는 드라마의 방영은 당연히 중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현주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드라마를 보면 북한과 공작을 하던 우리 정부 고위 관계자가 간첩인 수호를 쫒는 안기부 요원에 수호를 쫒지 말라고 하고, 간첩 관련 교통사고가 언론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은 것을 억울해하며 안기부를 피해자처럼 그린다"며 "안기부의 폭력성에 면죄부를 주는 듯해 보는 내내 너무 괴로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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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설강화'에서 영로와 수호가 사복 경찰 앞에서 포옹을 하고 있다. 영로는 수호가 민주화운동을 하다 경찰에 쫓기는 줄 알고 연기를 하며 그를 구해준다. JTBC 방송 캡처

'관음적이고 팬시'...시대의 상처 활용 신중치 못해

일각에선 "남녀 주인공이 진짜 민주화 시위에 가담한 대학생으로 그려진 건 아니라 방송 초반부터 이 작품이 민주화운동을 훼손했다고 단정하기엔 이른 감이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방송을 본 적잖은 전문가들은 '설강화'의 방향성을 우려했다.


운동권 학생을 빨갱이로 낙인찍었던 시대의 상처를 여대생과 간첩의 애절한 사랑을 위해 불을 댕기는 땔감처럼 활용해 신중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정치적 격변의 시대인 1987년을 방송 초반 여대생 기숙사를 주 무대로 삼아 관음적인 시선으로 살피는 인상을 줬다"며 "어떤 의도로 이 드라마를 만들었는지 모르겠고, 보는 내내 불편했다"고 말했다.


드라마 평론가인 박생강 작가는 "영화 '써니'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가볍게 가도 될 얘기를 굳이 1987년대 무거운 서사를 얹어 코미디처럼 그려 황당했다"며 "1987년을 너무 소재주의로 팬시하게 다뤄 '이래도 되나'란 의문이 들었다"고 꼬집었다.


1987년 여대의 기숙사를 서양에서 귀족의 자제가 다닐 법한 곳처럼 웅장하게 만들어 놓고선, 정작 그 안에 사는 여대생은 너무 가볍게 그려 어색하고, 비현실적이란 의견도 많았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방송 전 역사 왜곡 논란으로 극중 인물을 영초에서 영로로 바꿨다고 해도 많은 시청자가 박정희 정권에 저항한 영초를 떠올리면서 볼 것"이라며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 드라마가 유명 K팝 아이돌 출연과 디즈니플러스란 세계적 OTT로 유통되면서 해외 시청자들이 현 남북 대치 상황이란 것만 보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까 우려스럽다"고 의견을 냈다. 윤영찬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이날 SNS를 통해 "전두환이 죽은 지 며칠 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 유족들의 한을 더하게 하는 망언들 또한 여전하다"며 "'설강화'의 인물 설정과 역사 왜곡이 더욱 우려스러운 이유"라고 드라마에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따르면 '설강화' 민주화 왜곡 등 심의 민원은 이날 오전 기준 542건 접수됐다. '설강화'는 '스카이캐슬'을 만든 유현미 작가와 조현탁 PD의 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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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설강화'에서 수호(오른쪽)가 미팅에서 만난 영로에게 팝송 카세트 테이프를 선물하고 있다. JTBC 방송 캡처

'철인왕후' '조선 구마사' 이어 또... 역사 극작 숙의의 실종

1년 새 '철인왕후'와 '조선 구마사'를 비롯해 '설강화'까지 역사 왜곡 논란으로 잡음을 내면서 시청자들의 방송사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지고 있다. 세 드라마 제작진이 모두 "역사 왜곡 의도는 없다"고 똑같이 해명했는데,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 방송사에서 역사의 재해석에 대한 숙의는 물론 자체 검증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다.


드라마 '녹두꽃'의 정현민 작가는 8월 비대면으로 진행된 '역사적 진실과 콘텐츠의 상상력'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사극 제작 환경이 나빠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역사보단 재미를 우선하는 관행이 있다"며 "고증에 대한 시청자들의 요구는 높아졌지만, 그 문제는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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