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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로이 실사판 ‘진짜파스타’가 퍼뜨린 ‘나눔의 클라쓰’

삶도

오인태 대표


프랜차이즈 갑질에 신물, 4,500만원 들고 창업

2호점도 생겼지만 여전히 ‘반지하 생활’

결식아동은 최고 VIP… 모든 음식이 ‘공짜’

한국일보

파스타를 팔며 나눔으로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고 있는 오인태 ‘진짜파스타’ 대표. 오 대표를 9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진짜파스타’ 본점에서 만났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그는 갑자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그것도 마주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터뷰의 깊이와 묘미는 예상치 못한 말에 있는 법이지만, 당황스러웠다. 창업 반년 만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게 된 대박집, 게다가 결식아동과 소방공무원들에게는 파스타를 무료로 대접하는 나눔의 가게다. 그에 동참하겠다는 사업장이 7개월 만에 전국 540여 곳으로 늘어나면서 ‘선한 영향력’ 전도사가 됐다. 그는 그 파스타집의 대표다. 나이 서른다섯에 괄목할 인생의 열매를 맺은 그는, 그런데 무척 지쳐 있었다.


그는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다”, “나는 착한 사람 아니다”는 말을 반복했다. 시작은 “화가 나서”였다. 그는 디저트 카페, 샌드위치 전문점 같은 국내 프랜차이즈 기업에서 잔뼈가 굵었다. 가맹점 매니저부터 시작해, 본사 슈퍼바이저를 거쳐 팀장까지 했다. 프랜차이즈 업체의 슈퍼바이저는 가맹점 개설 허가 사항을 점검하고, 매장 준비와 교육, 관리, 사후 교육을 총괄하는 역할이다. 본사와 점주 사이의 다리이기도 하다. 관리하는 매장이 52곳에, 한 달간 개설시킨 매장이 7~10곳에 이르는 때도 있었다. 통상의 배를 뛰어넘는 수준이었으니 일 중독자였다.


그렇게 업에 몰두하면서 알게 된 건 ‘갑질’이었다. 본사는 하늘, 점주는 땅. 점주들에게 이윤을 더 안겨주려고 물건을 더 싸게 떼어와도 본사는 되레 더 높은 가격으로 가맹점에 팔았다. 인테리어는 물론 사후 관리나 교육 명목으로 받는 비용에는 거품이 잔뜩 끼어 있었다. 점주들은 대개 인생의 마지막 선택으로 창업한 건데, 본사에 댈 돈이 너무 많으니 소위 ‘진상’으로 전락하는 이들도 있었다. 본사의 속내도, 점주들의 사정도 두루 아는 그는 점주들에게로 마음이 기울어 회사와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일터를 옮기기도 했다. “프랜차이즈업은 점주들의 고혈을 빨아 클 수밖에 없는 건가 싶어 크게 실망했어요.”


업계에서 일한 지 5년 만에 사표를 냈다. 뜻이 맞는 친구 세 명과 의기투합해 창업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목표는 ‘공정하고 공평한 프랜차이즈’였다. 투자와 대출을 받아 4,500만원으로 시작했다. 이게 가능하다고? 심지어 매장은 홍대 근처다. 그가 말했다. “저도 의아스러웠는데, 심지어 창업자금 중에서 500, 600만원 남기고 오픈했어요.”


하지만 현실은 혹독한 것. 6개월간 평균 하루 매출은 10만원이 안 됐다. 월세, 관리비, 식재료비를 감당하려면, 따로 몸을 쓰는 ‘고액 알바’를 뛰어야 했다. 그러던 차 우연히 트위터에서 그의 가게가 입소문을 타며 손님이 몰리기 시작한 거다. 그때 그는 동업자들과 애초 마음 먹었던 나눔을 시작했다. “오늘 시작할 수 있는데 안 하면 편히 못 자잖아요.” 그래서 자영업이었나. “눈치 보지 않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박서준)가 생각났다. 박새로이의 동력은 소신의 대가가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복수심인데, 현실의 박새로이 오인태(35) 대표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서울 마포구 상수동 4층짜리 건물 2층에 들어선 ‘진짜파스타’에서 9일 그를 만났다.

창업하고 나도 놀랐다 ‘이 돈으로 된다고?’

한국일보

‘진짜파스타’는 매장 크기가 60㎡(18평)으로 아담하다.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공정하고 공평한 ‘진짜 프랜차이즈’를 하고 싶어 2016년 12월 창업헸다. 서재훈 기자

코로나19 여파가 없을 수 없죠.


“타격이 커요. 2호점은 70% 정도, 여기 본점도 30%쯤 손님이 줄었어요.”


문을 연 지 얼마나 됐나요.


“2016년 11월 25일에 사업자등록을 했고, 그 해 12월에 매장을 오픈했어요.”


창업이 보통 일 아닌데요. 가장 어려운 게 종잣돈 아닌가요?


“맞아요. 돈 주고 인테리어를 맡길 여력이 안 돼서 저희 손으로 다 했죠. 바닥부터 페인트칠까지 전부요. 친구들 두세 명과 인천에서 자재 사다가 장을 짜고, 소파도 만들었죠. 전문가한테 맡긴 건 에어컨과 전기공사 정도예요. 창업할 때 가장 많이 드는 비용이 인테리어거든요.”


친구들이란 그의 동업자들이다. 외식업계 경력자, 공장 노동자, 애플리케이션 개발자 같은 다양한 직종 출신들이다.


자금 얼마로 시작한 건가요?


“저까지 네 명이 시작했는데, 친구들이 500만원에서 많게는 2,000만원까지 투자를 했죠. 저는 돈이 없어서 대출로 나머지를 충당했고요. 자금 4,500만원으로 시작했어요. 보증금 내고 남은 2,500만원으로 각종 장비, 집기, 인테리어를 해결했죠. 오픈할 때 보니 500, 600만원이 남았더군요.”


4,500만원 쥐고 시작했는데, 심지어 거기서 남겼다고요?


“제가 기존 프랜차이즈 업체에 속된 말로 ‘엿 먹어봐라’하는 게 이런 거예요. 이 정도 평수(18평ㆍ60㎡)의 매장을 개설하려면 1억~1억5,000만원쯤 들거든요. 본사에서 비싸게 받는 비용들이 많으니까요. 아껴서 오픈을 해보자 마음 먹긴 했지만, 저도 충격 받았어요. ‘와, 이거 밖에 안 들어?’ 싶었죠.”


원래 회사를 다녔다고요.


“네, 커피나 샌드위치 같은 걸 파는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팀장까지 했어요. 그러다 전수창업 프랜차이즈를 하려고 그만뒀죠.”


전수창업은 레시피, 매장 관리 같은 본사의 운영 노하우를 전수해 가맹점을 여는 창업의 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걸 본사 방침에 따라야 하는 일반 프랜차이즈 가맹점과 달리 인테리어나 식자재ㆍ물류 구입처나 방식은 자율에 맡긴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나요?


“서른 살에 팀장을 달았는데, 그러고 나니 본사의 ‘갑질’을 많이 알게 됐어요. 대리나 과장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죠.”


어떤 갑질인가요.


“점주들한테 하는 갑질이죠. 예를 들면 ‘물건 밀어넣기’ 같은 거요. 대리만 되어도 원가를 다 알게 되거든요. 저는 새로운 거래처를 뚫어서 물건을 더 싸게 떼어 오는 걸 잘했어요. 그러면 점주들이 할인된 가격에 물건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열심히 일했죠. 그런데 본사는 오히려 가격을 올리더라고요. 저는 점주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분들의 가정사까지 꿰고 있었거든요. 늘 제게 ‘오 팀장만 믿고 일한다’고 하는 분들인데, 계속 그런 방식으로 실망시킬 수는 없었어요. 그렇게 해서 밥 벌어먹고 살고 싶진 않더라고요.”


업계에서 일할 때 느낀 게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희 회사(진짜파스타)가 좀 더 잘 되면 재단을 설립하고 싶어요. 기업들은 기부도 눈치를 보면서 하잖아요. 세금을 내야 하니까. 그런 걱정 없이 기부할 수 있는 재단을 만드는 게 목표예요.”


동업자들도 그에 동의를 했고요.


“그럼요. 공동의 목표죠. 고향 친구도 있고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친구도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전부터 그런 고민, 얘기를 많이 나눠왔죠. 그래서 그에 동의해서 모이게 된 거예요. 애초에 돈을 엄청 많이 벌 수 있는 구조를 지향하는 게 아니란 것도 알고 있고요.”


갑질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요.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가맹점을 내주면서 대개 인테리어 비용에서 수익을 남겨요. 장비나 집기에서 로열티를 받는 곳도 있고요. 음식의 소스 같은 걸 공장에서 납품 받게 하는 식의 물류대로도 수익을 남기죠. 저희는 그런 식의 마진(수익)이 없어요. 노하우를 100% 공개하죠. 레시피나 소스 비법도 공유하고 전수해요. 하지만, 매장 인테리어를 어떻게 할 지, 식재료나 물류는 어디서 떼어올 지 같은 건 점주들에게 맡겨요. 대신 본사 교육이 한 달이에요. 설거지부터 매장 운영, 접객 서비스를 배우도록 해요. 대신 개설 이후엔 가맹점에 나가서 검사나 교육을 하지 않죠. 요청이 있을 때만 나가요. 보통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그런 사후 관리나 교육 명목으로도 돈을 받거든요. 본사가 돈 챙기는 게 목적인 구조가 아니라 가맹점과 공정하고 공평한 관계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맹점주에게 설거지부터 교육하는 이유

한국일보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가맹점을 관리하는 슈퍼바이저를 거쳐 팀장까지 한 그가 알게 된 건 점주를 쥐어짜는 본사의 ‘갑질’이었다. 서재훈 기자

그의 프랜차이즈는 지난해 10월 첫발을 뗐다. 2호점을 개설한 거다. 일반 프랜차이즈 업체는 창업을 할 때 교육비, 간판사용료, 가맹비 같은 명목으로 본사에 내야 하는 돈이 상당하지만, 그는 그 액수를 1,000만원으로 정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받지 않고 되레 800만원을 지원해줬다고 했다.


왜 그랬나요.


“고마워서요.”


뭐가요?


“가맹점을 내고 싶어 찾아왔다가도 설거지부터 배워야 한다고 하면, 다들 싫어하거든요. 영업을 하면서 꼭 지켜야 하는 사항도 몇 가지 있죠. 점주가 하루 최소 6시간은 매장에 있어야 해요. 사장이 매장에 있을 때와 없을 때 매출 차이가 크거든요. 또 월요일은 휴무고, 장사가 잘 되는 일요일도 오후 5시 30분까지만 영업을 해야 해요. 주말에 하루는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요. 명절도 외식업의 큰 대목이지만 휴무를 해야 해요. 직원들의 여름ㆍ겨울 휴가도 보장해야 하고요. 본사에서 하는 나눔(이벤트)도 70%는 따라야 하죠. 저희가 해온 나눔이 좀 많거든요.”


헌혈증을 가져오면 파스타 한 그릇을 제공해주고 그렇게 모은 헌혈증을 기증해왔다. 또 일본에서 전시를 막아 논란이 일었던 ‘평화의 소녀상’과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면 파스타를 무료로 주는 챌린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후원 팔찌 무상 배포가 그 예다. 가장 유명한 건 소방공무원과 결식아동은 파스타를 무상으로 먹을 수 있게 한 나눔이다.


설거지부터 배우게 하는 이유가 있나요?


“제가 처음 가맹점 매니저로 취업해서 일할 때 두 달간 설거지만 했거든요. 그때 알바생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알았어요. 그래서 함부로 하지 못했죠. 저희 직원 유니폼에 곤룡포 무늬를 넣은 데도 그런 의미가 있어요. 직원도 왕이다, 손님도 직원도 동등한 관계다라는 뜻이죠.”


그는 2호점뿐 아니라 다른 사업장에서 요청하면 무료로 컨설팅도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런 매장이 20곳쯤 된다.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해주는 건가요?


“아뇨. 요청하면 다 해드려요.”


아니, 왜요?


“저를 찾아온 분들은 다 절박해서 온 거거든요. 대부분 자영업자들은 생계형인데, 부담을 드리면서 돕고 싶진 않았어요. 언젠가 한 분은 제 덕분에 장사가 잘 됐다면서 1,000만원을 주고 가기도 했죠.”


그런 때 기분은 어떤가요.


“되게 기쁘죠. 그 분이 먹고 살만해졌다는 뜻이니까. 요새는 힘들어서 그것도 잘 못하지만요.”


무엇 때문에 힘든가요.


“마음이요. 저는 원래 별로 (외부 요인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닌데도 그렇더라고요. 저는 그대로인데 저를 두고 정치 성향을 짐작해서 욕설을 하거나, 반대로 저를 너무나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거나 하는 게 힘들고 부담스러워요.”


정치 얘기는 왜 나오는 건데요?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께 편지를 받은 뒤부터죠.”


당시 김 여사는 결식아동에게 무료로 음식을 주는 ‘진짜파스타’ 얘기를 알게 된 뒤, 청와대 행정관 편에 편지와 수박을 보내왔다. 김 여사는 편지에서 오 대표에게 “우리 곁에서 어떤 아이들이 겪고 있을 배고픔의 고통을 환기시켰다”며 “제도가 채 갖지 못하는 온기를 불어넣는 것은 우리들 각자가 가진 반듯한 마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대표님이 뿌린 씨앗들이 또 누군가의 가슴에서 착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바람도 전했다. 기사로도 널리 보도됐다.


그런데 이걸 두고 악플이 많았던 건가요?


“그렇죠. ‘종북 빨갱이’, ‘종북 파스타’ 같은 말 외에도 별별 소리를 다 들었죠.”


제일 상처가 된 말은 뭔가요.


“‘요즘 굶는 애들이 어딨어’. 그건 죽어도 못 잊어요.”


그런 사람들은 이곳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맛있게 먹는 지를 봐야겠네요.


“맞아요, 봐야 해요! 아이들이 얼마나 눈치를 많이 보고 들어오는지도. 여기에 오는 것도 아이들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에요. 물론 칭찬도 많아요. 그런데 저는 그것도 힘들어요.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진짜… 저는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착한 사람도 아니에요. 시작했으니 책임지고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제가 장사꾼인지 봉사활동가인지 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한번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인터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러던 차, 내가 섭외를 한 거였다.


그 말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뭔가요.


“삶이 힘들어서요. 결식아동 꿈나무카드(18세 미만 결식 우려 아동에게 지급되는 급식 카드로 지방자치단체별로 이름은 다르다) 보도를 보고 우리는 카드 없이, 금액 제한 없이, 아이들이 눈치보지 않고 먹을 수 있게 하자고 시작한 건데 그것이 ‘선한 영향력’ 프로젝트가 돼서 동참하는 매장이 540군데로 늘었어요. 미용실, 안경점, 세탁소, 옷집, 볼링장, 도배업체, 학원까지 종류도 많아졌죠. 9개월간 이 일을 하면서 하루도 쉬지 못했어요. 아, 작년 10월에 결혼하고 딱 3일 쉬었네요.”


그럼 신혼여행은요?


“아예 못 갔죠. 돈도 없었고. 하하. 아내도 공연계에서 일을 해서 바빴어요. 축의금에서 비용 낼 것 내고 남은 건 기부를 했거든요. 또 의류업체에서 저희를 통해 아이들에게 패딩점퍼를 기부하고 싶다고 해서 전달하는 일도 해야 했고요. 그래서 협회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적임자에게 제가 해온 일도 물려주고 싶고요.”


말하자면, ‘선한 영향력 프로젝트’의 여러 업무를 도맡아 할 사단법인이다. 협회가 만들어진다면, 번아웃 직전인 그도 조금은 숨을 쉴 수 있게 될 테다. 그가 갑자기 “이건 꼭 써달라”며 말을 이었다.


“정부와 은행권이 꼭 만들어줬으면 하는 게 있어요. 기부문화가 얼어붙은 게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데다 가끔씩 터지는 횡령 사고 때문이잖아요.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내역이 회원들에게 100% 공개되는 통장을 개발하도록 정부가 지원해주고 은행권이 만들면 좋겠어요. 카카오뱅크의 모임통장이 있긴 하지만 참여 멤버 한도가 100명이거든요.”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진다면, ‘선한 영향력 사단법인’(가칭)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 테다.

칼까지 든 알코올 중독 조부와 산 10대

한국일보

그가 결식아동들에게 꿈나무카드 같은 급식카드를 받지 않고 파스타를 대접하는 건 밥 못 먹는 서러움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재훈 기자

어릴 땐 꿈이 뭐였어요?


“사업가요. 아버지가 건축회사를 했는데 멋있어 보였죠.”


여섯 살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다고 들었어요.


“네, 열여덟 살까지요. 어머니도 가게를 해서 두 분 다 바쁘셨거든요. 저보다 네 살 많은 형은 공부 때문에 부모님과 살고 저는 집에서 멀지 않은 할아버지 댁에서 지냈죠.”


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러니 어린 시절이 녹록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란 강연에서 그 얘기를 처음 꺼낸 적이 있다.


할아버지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폭력도 쓰셨으니까요.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막아내기엔 힘이 없었고요. 할아버지의 폭력으로 무기력에 학습된 상태였죠. 그러니 할머니도 너무 불쌍했어요. 제가 일곱 살 때인가, 할아버지가 칼을 들고 저와 할머니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위협한 적도 있죠. 맞는 건 뭐, 많이 맞았고요.”


부모님은 그걸 알았나요.


“제가 한번도 얘기하지 않았어요.”


왜요.


“도와달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어요.”


그런 지경이라면 부모님한테 함께 살고 싶다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반면에 나라도 할머니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겠네요.


“맞아요. 실제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까 엄마가 이제는 집으로 가자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때도 저는 힘이 없었지만, 할아버지 때문에 무슨 상황이 벌어지면 수습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제가 군에 입대했을 때 할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서 몇 년 누워계시다 돌아가셨는데도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어요. 돌아가시고 나니 후회가 되더라고요.”


할아버지가 사과를 한 적은 없나요.


“그런 얘기는, 없었죠.”


그런 상황에서 숨쉴 곳이 있었나요.


“(경기 파주시) 문산읍에 살았는데 동네에 성당이 하나 있었어요. 2층 벽돌집 같이 생겼는데 2층으로 가면 테라스 같은 곳이 있었죠. 거기 오르면 동네가 좍 보였어요. 안경을 벗고 불빛을 보면 불꽃처럼 느껴졌죠. 그렇게 한참 앉아있다가 내려오곤 했어요. 그런 (할아버지)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죠. ‘세바시’에서 말하기 전까지.”


왜 그랬을까요.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던 게 싫어서인 것 같아요. 어릴 때 할아버지는 제게 권력자였으니까요. 그 생각을 하면, 사회생활에서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죽어도 못 하겠더라고요. ‘당신들 잘못하고 있다’고.”


부당하다는 말을 처음으로 해본 게 언제예요?


“고등학교 1학년 때요. 할아버지한테 처음으로 그러지 말라고 반항을 했죠. 그 때도 술 드시고 집기를 집어 던지고 했던 최악의 상황이었어요. 집에 들어가니까 이미 할머니는 주방에 쭈그리고 앉아 있고요.”


할아버지도 놀라셨겠네요.


“그렇죠. 그때까지 아무 소리도 못하던 애가 갑자기 그러니까. 그런데 그러고 나서는 할아버지가 폭력을 쓰는 일이 없어졌죠.”


본인한테도 의미가 있는 사건일 것 같아요.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엇나갔어요. (미소)”


어떻게요?


“머리 염색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오토바이도 타고, 작지만 몸에 문신도 하고요. 미성년자니까 하지 말란 걸 해도 별 게 없네 하는 생각이 들었죠. 처음으로 해본 일탈이에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친구의 조언이 그를 바로잡아줬다. 수시전형으로 대학 호텔경영학과에도 입학했다. “그는 대학에서도 다행히 그런 나를 예쁘게 봐 주시는 교수님들을 만났고 군대도 다녀오면서 천천히 사람이 됐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첫날 매출 8,000원, 6개월 뒤엔 10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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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쉬는 날 없이 힘들게 일하면서도 ‘선한 영향력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이유다. 하지만, 그는 무척 지쳐있었다. 사진은 매장 한편의 거울에 비친 인터뷰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서재훈 기자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데 변한 거네요.


“음, 성격은 변하지 않아도 사회성이 쌓이니까요. 어릴 때는 화를 제대로 내는 법을 몰랐다면, 사회생활을 해 나가면서 배우게 된 거죠. 제가 고등학교 때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집안 사정이 힘들어졌을 때도 아버지는 나쁜 일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 등을 보면서 컸으니 저도 제 자식한테 비겁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은 거죠.”


“자식은 부모 등짝 보며 자란다”는 ‘이태원 클라쓰’의 대사가 생각났다.


집이 얼마나 어려워졌었나요?


“대학에 올라갈 때쯤엔 폭삭 망했죠. ‘빨간딱지’(차압)를 처음 봤어요. 아주 작은 주공아파트로 온 가족이 들어가 살았죠. 7층이었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뛰어내릴까 생각이 든 적도 있다고 나중에 말씀하시더라고요. 많이 힘드셨죠. 그때 아버지 말씀이 기억 나요. 돈이 없어서 불편하긴 해도 불행하진 않다고. 지금 저도 그래요.”


‘진짜파스타’ 첫날 매출 기억하나요?


“그럼요. 8,000원어치를 팔았죠.”


그럼 한 팀도 아니고 한 명이 와서 먹은 것 아닌가요?


“그렇죠. 6개월 동안 하루 평균 매출이 9만원이었어요.”


월세며 관리 비용은 어떻게 충당했어요?


“그래서 ‘노가다’(건설현장 노동)도 하고, 전선공사도 따라가고, 청소 알바나 곰돌이 탈 쓰는 알바도 했죠. 고정지출이 수백 만원이거든요. 그렇게 고생하다가 이듬해 5월 들어서 갑자기 대박이 났어요.”


왜요?


“날짜도 기억해요. 5월 4일부터였어요. 3일까지 15만원어치를 팔았거든요. 그런데 4일이 되자 갑자기 매상이 80만원으로 오른 거예요. 나중에 알아보니 손님 중 한 분이 트위터에 ‘싸고 맛있는 파스타집’이라며 올린 글이 30만 건 넘게 리트윗(공유)이 됐대요.”


손님들이 2층 매장 입구부터 계단, 1층까지 줄지어 기다려 먹는 맛집이 된 거다.


장사가 잘되면 빚 갚는 데 먼저 쓸 것 같은데 나눔을 시작했네요.


“지금 안 하면 나중에도 안 할 거라는 게 저희 생각이었거든요.”


매장 곳곳에는 맛있는 파스타 한끼를 선물 받고 돌아간 소방관들의 사인과 아이들의 편지가 붙어있었다.


가장 유명한 게 결식아동들에게 꿈나무카드를 받지 않고 식사를 대접하는 건데요.


“네, 사실 열 받아서 시작한 일이에요. 꿈나무카드가 있다는 걸 알고 참여 신청을 하려다가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한끼 식사비용이 5,000원 밖에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서울에서 5,000원으로 어떻게 밥을 먹나요. 게다가 공무원이 그 카드를 자기가 임의로 발급해서 1억 4,000만원을 쓰다 적발됐다는 기사까지 보게 됐죠. 우리는 그 돈 받지 말고 아이들이 마음대로 먹게 하자 했죠.”


처음 온 아이 기억하나요?


“그럼요. 초등학생 두 명에 미취학 아이까지 셋이서 서울도 아니고 경기도에서 2시간 걸려서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왔더라고요. 그날 마지막 손님이었어요. 저녁 8시쯤 가게에 들어왔죠. 그런데 정말 미안했어요.”


그건 또 왜요.


“꼴랑 파스타 하나 때문에 멀리서 오게 만들어서요. ‘들어가도 되나요’하면서 와서는 셋이서 파스타 두 개를 시키더라고요. 그래서 ‘삼촌이 하나는 잘못 만들었다. 하나 더 먹어줄래’하면서 세 접시를 내줬죠.”


아이들이 눈치를 보는 게 싫었군요.


“실제 꿈나무카드 가맹점 중에 눈치를 주는 곳들이 있대요. 어른들 책임이죠. 음식 적게 시키라고 한다거나, 바쁜 시간에는 오지 말라고 하거나 한다는 거예요.”


그는 아이들이 공짜로 먹는다고 미안해하거나 눈치 보게 하고 싶지 않아 아이들을 위한 ‘VIP카드’도 만들었다. 매장에서 고객에게 주는 쿠폰처럼 생겼다. 모바일 앱도 개발 중이다. 자신이 결식아동인 고등학생의 재능 기부를 받아서다. 선한 영향력 가게들에서만 쓸 수 있는 카드를 앱에 저장해두는 방식이다. 아이들이 보다 마음 편하게 먹고 갈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궁리하는 거다.


지금까지 아이들이 대략 얼마나 다녀갔나요.


“그건 말씀 드리지 않을게요. 그러면 아이들이 부담을 갖게 돼요.”

대박 났지만 여전히 돈은 없다, 그래도 나눈다

한국일보

가게 곳곳엔 파스타를 먹고 남긴 아이들과 소방공무원들의 감사 메시지가 붙어있다. 또 파스타 레시피를 전수해준 동업자 이민혁 티앤엠푸드 대표가 받은 세계 요리대회의 상장도 전시돼 있다. 한 그릇에 8,000원 안팎이라고 해서 맛도 저렴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서재훈 기자

밥을 챙겨준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요.


“밥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죠. 다른 생명을 죽여서 내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이기도 하고요.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20대에 너무 가난하게 살면서 한끼의 소중함을 알게 됐어요. 한 달에 87만원 받으면서 일할 때라서요. 지금도 그래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못 먹어요. 냄새 맡으면 바로 속에서 올라와서.”


얼마나 먹었기에 그 정도인가요.


“5년 정도? 가끔 친구들이 고기 사줄 때 빼고는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먹었죠. 유기된 고양이를 구조해서 데리고 살면서는 굶기도 많이 했어요. 사료를 사고 나면 제가 3, 4일은 굶어야 했죠. 군대에서 훨씬 잘 먹었어요. 하하.”


못 먹는다는 건…


“되게 서러운 거죠. 스무 살 넘은 성인도 그런데 아이들은 오죽하겠어요. 결식아동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도 그런 기억을 지워주고 싶어서죠. ‘우리 동네에 이런 아저씨가 있어서 내가 그래도 밥은 먹고 다녔네’ 하는 생각이 들도록요. 이렇게까지 크게 될 줄 몰랐지만.”


잊지 못하는 밥이 있나요?


“밥은 아니고 토마토요. 입대 전날 할머니한테 인사 드리러 갔는데, 밭에서 키운 토마토를 따다 주셨어요.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하셨죠. 그거 먹으면서 저도 울고, 할머니도 한참 울었어요. 잊히지가 않아요.”


손수 키운 토마토. 그 때 할머니가 손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음식이었을 거다.


그래도 대박집 사장인데, 형편은 많이 나아졌나요.


“결혼하고 나서도 반지하에 사는 걸요. 하하. 그나마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서 좀 나은 반지하 집으로 이사를 했죠.”


대박 났는데 왜 돈이 없어요?


“음, 저희가 이번에 음료수 가격을 올렸는데요. 450㎖잔에 800원이에요. 원래는 400원이었죠. 사실 손해예요. 무한리필이거든요. 파스타도 처음엔 5,200원부터 시작했어요. 그간 물가 인상 같은 요인 때문에 네 번을 올렸죠.”


지금도 ‘진짜파스타’ 메뉴 대부분은 7,000~8,000원대다. 그렇다고 요리 수준이 낮은 게 아니다. 세계 여러 요리대회에서 20여 차례 수상 경력이 있는 이민혁씨가 레시피를 전수했다. ‘진짜파스타’의 동업자이기도 하다. 이민혁씨는 현재 터키 디저트 수입업체 티앤엠푸드 대표다.


왜 그렇게 가격을 잡았나요.


“학생들이 주로 먹으니까요. 게다가 파스타가 비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희가 생각하는 맛의 정의는 좀 달라요. 음식뿐 아니라 값, 서비스, 편안한 분위기도 모두 맛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대표님은 수익도 가장 적게 가져간다면서요.


“쭉 (한 달에) 100만원 남짓 가져갔죠. 올해 들어서 130만원 정도로 좀 늘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하하. 책임자는 항상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대신 알바비는 다른 데보다 많이 주려고 해요. 저희는 시급이 9,000~9,500원이에요.”


법정 최저임금(8,590원)보다 많네요.


“무조건 더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릴 때 알바를 하루 8시간씩 해도 한 달에 50만원 밖에 못 받았어요. 법정 시급보다 덜 준 거죠. 그게 정말 부당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제대로 대우해주면 주인의식을 갖지 말라고 해도 갖게 돼요.”


그의 가게 테이블 수는 2인용 8개, 4인용이 1개다. 대형 매장이 아닌 다음에야, 싼값으로 음식을 팔면 수익을 크게 내기 어려운 구조라는 그의 설명이 이해됐다.

‘진짜 프랜차이즈’가 목표다

한국일보

그가 시작한 ‘선한 영향력’ 프로젝트에 자극 받아 동참을 선언한 사업장은 전국 540여 곳으로 늘어났다. 이런 에너지는 가없이 확산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가 ‘선한 영향력’ 매장 스티커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서재훈 기자

가게 이름을 ‘진짜파스타’라고 지은 이유가 있나요.


“처음 생각은 일종의 ‘시리즈물’이었어요. 진짜파스타, 진짜밥집, 진짜커피 이렇게 프랜차이즈를 만들자는. 각인이 쉽기도 하고요. 매일 저에게 상기시키려는 이유도 있죠. 제 명함 뒷면에 이런 문구를 새겼거든요. ‘당신의 진짜는 무엇입니까.’ 너는 진짜 뭘 하고 싶으냐, 무엇에서 진짜가 되고 싶으냐 같은 제게 하는 질문이죠. 아직도 계속 찾아가고 있어요.”


왜 나누며 사나요.


“어른이니까. 아이가 넘어져서 울고 있으면 일으켜줘야 하잖아요. 그런 마음이죠. 대단한 의미를 두고 시작한 게 아니에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켜온 삶의 도가 있다면요.


“약속한 건 지키는 거요. 근데 내뱉은 말 지키는 게 제일 어렵더라고요. 못 지킨 적도 물론 있지만 어떻게든 하려고 해요. 또 못 지켰을 때는 핑계대지 않고요.”


지금 붙들고 있는 약속은 뭔가요.


“선한 영향력 프로젝트의 뿌리를 튼튼하게 만드는 일, 그리고 아내에게 한 약속 그렇게 두 가지예요.”


작은 매장의 벽 한편에 붙은 편지가 들어왔다. ‘진짜파스타’의 테이블 종이에 연필로 삐뚤지만 가득 적어 내린 편지였다. ‘엄지척’ 그림과 함께. 편지는 “사장님, 치우시기 전에 꼭 읽어주세요! 일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진심의 편지를 보내요~ 그러니까 같이 봐주세요!”라고 시작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전 사장님 덕분에 VIP가 된 김○○입니다. 예전에 한번 왔을 때도 정말 맛있게 먹고 갔는데 역시 오늘도 상상 이상으로 맛있었어요. 그리고 사장님과 직원분들이 너무 친절하셔서 안 좋은 일 있어도 금방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진짜파스타’의 사장님과 직원분들 덕분에 마음이 편해져요. 다음엔 친구들이랑 같이 올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 올림- PS. 시골 다녀와서 김치를 드릴게요. 맛이 사장님 가게 파스타처럼 죽여줍니다!”


편지에 담긴 ‘진짜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니 ‘진짜파스타’에선 그냥 파스타만 먹을 게 아니다. 나는 밥 한끼의 소중함을 나누며 살고 있는지, 내 인생의 맛은 어디에 있는지 음미해 볼 일이다.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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