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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맛본 바닐라, 가짜예요

이용재의 세심한 맛

한국일보

바닐라 아이스크림에서 느껴지는 바닐라 향과 맛은 사실 원물인 바닐라 빈이 아닌 진짜로부터 향을 우려낸 바닐라 추출액이거나 합성 대체품(바닐린)일 가능성이 높다. 게티이미지뱅크

아침으로 프렌치 토스트를 즐겨 먹는다. 우선 식빵 두 쪽을 냉동실에서 꺼내 토스터에 굽는다. 냉동 식빵이라고 센 불, 즉 토스터의 해동 모드에 단숨에 구워 버리면 안 된다. 그럼 식빵이 골판지처럼 말라 비틀어져 버린다. 다시 촉촉하게 적셔 줄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빵이라야 가능한 것, 골판지라면 가망이 없다. 따라서 토스터의 화력 조절이 1~6단계로 나뉘어 있을 경우 2~3에서 두 번 연달아 구워 준다. 그래야 빵의 수분이 적당히 날아가면서 달걀물을 딱 적당하게 빨아 먹는다.


빵을 굽는 사이 달걀물과 팬을 준비한다. 일단 팬을 약한 불에 올려 천천히 달구고, 넓고 우묵한 접시에 달걀을 깬다. 빵이 두 쪽이라면 노른자도 두 개분이 필요하다. 흰자는 달걀 상태에 따라 갈린다. 유난히 묽고 처진다면 전부 버리고 우유로 대체한다. 괜찮다 싶으면 한 개분은 남긴다. 소금 한 자밤과 설탕 두 자밤을 더하고 포크나 거품기로 전체를 잘 풀어 섞은 뒤 마지막으로 이것 한 방울을 더한다. 바로 바닐라 추출액이다.


그냥 바닐라 빈도 아니고 추출액이라니, 가짜를 쓰는 건 아닐까. 바닐라 빈도 유행처럼 쓰는 곳이 많아지면서 자잘한 알갱이가 콕콕 박혀 나와야 제대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아이스크림부터 케이크, 과자 등 단맛의 음식에서 거의 빠짐 없이 바닐라 향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음식을 통해 얻는 느낌과 실제 사이에는 사실 엄청나게 큰 괴리가 있다.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음식 가운데 진짜 바닐라를 써서 만든 건 전체의 단 1%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단맛 음식의 세계는 사실 가짜 바닐라가 꽉 쥐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현실이 부당하지는 않은 걸까. 글쎄, 바닐라가 리소토 등에 쓰는 사프란에 이어 두 번째로 비싼 향신료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생각이 조금씩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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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일대가 원산지인 바닐라는 덩굴과 식물로 꽃이 딱 한 송이만 피어 씨앗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게티이미지뱅크

㎏당 수백 달러 호가하는 바닐라 빈

그렇다면 진짜 바닐라는 왜 그다지도 비싼 걸까. 부득이하게도 역사를 잠깐 엿봐야 한다. 1519년 스페인 정복자들이 중앙아메리카의 아즈텍을 침공한 이후 바닐라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손에 의해 동향의 식물인 초콜릿과 함께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후 프랑스나 영국 등지의 식물원에서 재배됐지만 꽃은 피되 다음 단계인 깍지와 씨앗, 즉 우리가 아는 바닐라 빈으로는 넘어가지 않았다. 궁금증은 300년도 더 지난 1836년 벨기에의 원예학자 샤를 모렌에 의해 풀렸다. 멕시코에만 서식하는 메폴리나 벌이 없이는 바닐라 꽃의 수정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식물이야 저항을 원래 하지 않으니 가져올 수 있지만 동물, 그것도 벌처럼 작은 곤충을 바닐라 교배를 해 달라며 설득해 데려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1841년, 인도양의 프랑스령 레위니옹 섬의 노예 에드몽 알비우스가 인공 수정법을 고안해 낸다. 바닐라는 난과의 식물인데, 특이하게도 덩굴로 자라는 한편 꽃이 딱 한 송이씩만 피어오른다. 덩굴에 여러 송이의 꽃이 달렸다고 해도 딱 한 송이씩만, 그것도 아침에 피었다가 오후면 져 버린다. 이렇게 기회의 창문이 잠깐 열릴 때 하나씩 사람 손으로 꽃을 갈라서 암수 생식기를 노출시킨 다음 이쑤시개의 끝으로 둘을 접촉시켜 수정시킨다. 수정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꽃받침의 덩치가 커지면서 녹색 바닐라 빈의 깍지로 자라나고, 실패한 꽃은 곧 덩굴에서 떨어져버린다. 참으로 만만치 않은 과정이기에 바닐라 재배는 주로 3, 4대에 이어져 내려오는 가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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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의 대표적인 향을 뽑아내 합성한 모조 바닐라는 원물보다 향이 훨씬 강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수정에 성공한다고 바닐라 빈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확 이후의 가공을 잘해야 정말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초콜릿이나 커피와 마찬가지로 바닐라 또한 깍지를 수확한다고 바로 특유의 향이 나서 우리가 아는 용도에 쓸 수 있는 식재료가 되지 않는다. 수확한 뒤 일어나는 발효를 멈추기 위해 깍지를 일단 뜨거운 물로 한 번 데친다. 그리고 36~48시간 동안 따뜻하고 수분이 많은 환경에 보관하면 녹색에서 짙은 갈색으로 변하며 특유의 향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후 낮에는 말리고 밤에는 다시 따뜻하고 촉촉한 환경에 보관하기를 한 달 정도 되풀이하면 가공이 끝난다.


이런 과정 때문에라도 바닐라의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근의 사건사고로 바닐라 산업이 타격을 입기도 했다. 2017년 바닐라의 최대 산지인 마다가스카르를 사이클론 이와노가 덮쳐, 주요 재배지역에 80~100%의 손실을 입혔다. 사이클론의 출연 이전 몇 년 동안은 산지가 가뭄에 시달려 왔던 터라 타격이 컸다. 5, 6년 전만 해도 ㎏당 10달러였던 게 최고 600달러까지 치솟아 올라 은보다 비싸지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생산량이 회복세를 보이며 올해에는 30~50%까지 가격이 떨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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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 등 단맛이 강한 음식에는 거의 필수적으로 바닐라 향이 첨가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아직도 바닐라의 가격이 많이 올라 있는 상태이므로 업장에서 쓰는 규모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소위 ‘각’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차원이라면 적절한 수준의 가격대에서 단 한 개의 깍지만으로도 향을 경험해 볼 수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깍지 1개당 최저 3,000원부터 다양한 가격대의 바닐라 빈이 등장한다. 정말 3,000원이라면 어떤 단점이 있더라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지만 대체로 이런 물건은 ‘벌크’, 대량 포장 제품을 소분해 파는 것이다. 이런 바닐라 빈을 많이 사서 아이스크림도 만들고 쿠키도 구워 본 입장에서 경험담을 공유하자면, 원래 포장에서 꺼낸 이후에는 정확하게 밀봉이라 하기 어려운 상태로 팔기 때문에 이미 일정 수준 말라 있거나 곧 꼬들꼬들하게 말라 버린다.


바닐라 빈을 고르는 첫 번째 요령이 ‘마르지 않았는지 확인하기’임을 감안한다면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깍지 두세 개 정도를 유리관에 밀봉 포장해 파는 다음 단계의 제품을 고려할 수 있다. 제조업체의 상표와 더불어 원산지도 확실히 표기돼 있으므로 품질 자체는 좀 더 믿을 만할 수 있지만 가격대는 벌크를 소분한 것에 비해 훨씬 더 높다. 더군다나 이런 포장 방식 역시 최선이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관을 흔들어 상태를 반드시 확인한다. 유리관 벽에 부딪혀 딸각거리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바닐라 빈이 말랐다는 의미이니 피한다. 원래 바닐라 빈은 가공이 끝난 상태에서도 통통하고 부드러워 매듭을 지어 묶을 수 있을 정도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수준은 아니더라도 씨를 긁어내기 위해 칼로 반을 가를 때 깍지가 딱딱해서 유난히 힘이 많이 들어간다거나 아예 끊어져 버린다면 이미 최선의 상태는 지난 것이다.

원물 대신 추출액이나 모조 바닐라도 무방

바닐라 빈이 기본적으로 비싸고 소분 혹은 소량 판매 제품 또한 품질을 확실하게 보장받지 못한다면 적절한 타협안을 찾는 게 차라리 나을 수 있다. 상태가 균일하며 바닐라 빈 원물보다는 경제적인 데다가 오래 두고 쓸 수 있는 등 헤아려 보면 단점이 썩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대부분 액체 상태인 타협안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진짜로부터 향을 우려낸 바닐라 추출액이다. 바닐라 빈을 섭씨 35도 이상의 알코올에 우려낸 추출액은 타협안이라 폄하하기엔 향의 섬세함을 웬만큼 갖추고 있다.


100㎖ 안팎의 추출액 한 병이 2만~3만원대라 ‘이것도 사실 비싼 거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웬만한 쓰임새에는 한두 방울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오래간다. 병에서 바로 따라 내지 않고 4분의 1에서 2분의 1 티스푼 분량의 계량 숟가락으로 옮기면 많은 양을 쏟아부어 낭비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추출액 만들기가 정말 간편하므로 보드카나 럼 등의 도수 높은 리큐어에 바닐라 빈을 담가 직접 만들어 쓸 수도 있는데, 의외로 결과물이 기성품보다 못마땅하니 권하고 싶지 않다. 그저 술은 술대로, 추출액은 추출액대로 사서 마시고 쓰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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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븐에 굽는 과자나 케이크라면 모조 바닐라를 써도 원물에 비해 맛과 향의 차이가 미미하다. 게티이미지뱅크

두 번째 액체는 진짜 정말 타협안이다. 바닐라의 합성 대체품인 바닐린이 주원료인 모조 바닐라(Imitation Vanilla)다. 천연과 인공 혹은 합성 착향료의 접근 개념은 향과 무관하게 같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우리가 느끼는 천연향이 수십에서 수백 가지 향 화합물의 집합이라면, 합성 착향료는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면서 주도권을 잡은 향 몇 가지만 골라, 감각을 한껏 집중하지 않는 이상 차이를 잘 못 느끼는 수준에서 화학 합성을 통해 만들어 낸다. 따라서 바닐린도 바닐라의 두드러지는 향 몇 가지만 담고 있는데, 요즘은 주로 과이어콜이나 리그닌으로 만든다.


진짜 정말 타협안은 정말 정말 타협안에 불과한 걸까. ‘그렇다’는 대답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같은 액상의 바닐라를 놓고 비교해 보면 섬세함은 떨어지는 한편 대표적인 향은 한층 더 강하게 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아야 1작은술 정도의 분량을 몇십 배는 많은 액체나 반죽 등에 희석해 쓰는지라 결과물인 음식만 놓고 보면 큰 차이를 못 느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아이스크림의 경우라면 차이를 느낄 수도 있지만 오븐에 구워 만드는 과자나 케이크라면 미미하다는 게 비교 시식을 통해 형성된 중론이다. 따라서 베이킹을 열렬한 취미, 혹은 그 이상의 수준으로 한다면 진짜 추출액보다 한참 저렴한 모조 바닐라를 선택해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믿을 만한 가짜는 원래 없어야 맞지만, 그나마 존재하는 몇 가지를 꼽는다면 모조 바닐라가 꼭 포함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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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과 및 제빵을 할 때 반죽의 마무리 단계에서 바닐라 설탕에 굴리면 맛을 배가 시킬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맛 풍성하게 해주는 바닐라 설탕

가격이 요즘 같은 수준이 아니었던 시기에도 속살을 발라내고 남은 깍지까지 알뜰하게 쓰는 게 바닐라 빈을 향한 예의였다. 그래서 크림이든 뭐든 향을 우려내는 재료에 담갔다가 건져 낸 깍지마저 허투루 버리면 안 된다. 단지 재료가 아깝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도 힘이 좀 더 남아 있으니, 깍지를 물에 살짝 헹궈 완전히 말린 뒤 설탕에 꽂아 두면 너무나 간단하게도 바닐라 설탕이 된다. 바닐라 향을 좋아한다면 커피나 음료부터 베이킹까지, 모든 보통 설탕의 자리를 대신 꿰찰 수도 있다. 특히 집에서 손수 제과 및 제빵을 하는 이라면 사블레처럼 간단한 쿠키 반죽을 마무리 단계에서 바닐라 설탕에 굴려 맛을 두 단계쯤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사실은 다 소모되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도 힘이 충분히 남아 있어 설탕에 지나치게 많이 더하면 향이 비호감 수준으로 강해질 수도 있으니 조금만 재활용하자.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밀폐 용기 하나에 가득 채워 담은 설탕이라면 4분의 1에서 2분의 1 깍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음식평론가 이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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