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질문 귀찮아 무조건 "100엔"...균일가 비즈니스 성공 모델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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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히로타케 다이소 회장
야노 히로타케 다이소 회장. 다이소 홈페이지 |
‘1,000원 마트’ ‘1,000냥 하우스’ ‘1,000원 숍’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주머니가 가벼워진 서민들은 이런 간판을 달고 저렴한 균일가로 생활용품을 대량 판매하는 가게의 단골이 됐다. 1970년대 일본에서 처음 등장해 거품경제 시기인 1990년대 초 급성장했고 2000년대엔 한국, 대만 등 아시아 시장에 뿌리내린 새로운 유통사업이었다. 일본에선 ‘100엔 숍(2018년 100엔=996.5원)’으로 불리는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의 원조는 누구일까. 주인공은 세계 최대 100엔 숍 ‘다이소(Daiso)’의 창업주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야노 히로타케(矢野博丈ㆍ75) 회장이다.
다이소는 지난해 기준 일본에 3,278개, 해외 26개국에 1,992개 매장을 두고 4조5,000억원에 달하는 연 매출을 올린 유통업계의 공룡이다.(우리나라 다이소 매장은 일본 다이소가 지분(34.2%)을 투자한 국내 기업 아성다이소가 운영) 현재 7만 종 넘는 상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매달 500~800개의 신상품을 투입한다. 지난해 기준 전 세계에서 다이소 매장을 찾은 고객이 10억명으로 추산된다.
야노 히로타케 다이소 회장. 다이소 홈페이지 |
야반도주에 9차례 이직… 불운의 사나이
다이소 설립 전까지 야노 회장은 하는 일마다 망해 지독히 어려운 생활을 했다. 그는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중국 베이징에 의사 집안 아들로 태어났다. 히로시마 출신인 아버지는 당시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형들은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됐지만 그는 달랐다. 일본의 명문사립 주오대 이공학부의 토목공학과를 다니던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권투였다. 1964년 일본 국가대표로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한계를 느낀 야노 회장은 운동을 그만두고 사업으로 돈을 벌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첫 사업은 결혼 후 히로시마에서 장인에게 물려받은 방어 양식장이었다. 키우던 방어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돈을 바다에 버리는 심정이었다. 쌓여가는 적자에 아버지와 형들에게까지 손을 벌려야 했지만 양식장 경영은 갈수록 악화됐다. 결국 그는 700만 엔의 빚을 이기지 못해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선택했다.
도쿄로 도망 온 야노 회장은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볼링장 아르바이트, 책 세일즈맨 등을 전전하며 힘든 생활을 했다. 친구 소개로 백과사전 영업사원이 됐지만 실적은 항상 최하위권이었다. 야노 회장은 “양식장 사업이 망할 때만 해도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때부터는 능력도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일본 다이소 매장 전경. 다이소 홈페이지 |
‘귀차니즘’이 탄생시킨 성공 신화
히로시마로 되돌아간 그는 일용직 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돈을 벌었고, 이를 종잣돈 삼아 1972년 ‘야노 상점’을 창업했다. 도산했거나 자금 사정이 어려운 기업의 재고품을 저렴하게 매입해 2톤 트럭에 싣고 다니며 파는, 창업이란 표현을 쓰기엔 민망한 수준의 사업이었다. 날이 저물면 부인과 함께 수많은 제품에 일일이 가격표를 붙이는 것이 일과였다. 하지만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인은 더 이상 일을 거들 수 없었다. 귀찮고 힘들어진 야노 회장은 물건에 가격표를 붙이는 일을 관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손님이 물건을 고르며 얼마냐고 값을 물었다. 피곤에 지친 그는 가격 확인도 귀찮아 그냥 “100엔”이라고 답했다. 옆에 있던 다른 손님의 가격 문의에도 마찬가지로 “100엔”이라고 했다. 두 손님 모두 가격에 만족하며 물건을 구매하는 것을 보고 그는 ‘100엔의 힘’을 깨닫게 됐다. 상품마다 판매가를 정하기가 번거로워 100엔이라고 대답한 것이 뜻밖에 판촉의 단초가 된 것이다. 시쳇말로 ‘귀차니즘’(만사가 귀찮아 게으름을 피우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 그의 사업 성공을 이끈 셈이다.
경기 침체라는 천운을 움켜쥐다
야노 회장은 2톤 트럭에 갑작스러운 화재가 나 물건이 다 타버리는 사고를 겪은 후 히로시마의 대형 마트 내 매장을 빌려 100엔 숍을 꾸렸다. 다이소의 첫걸음이었다.
별다를 바 없는 출발이었지만 스스로를 ‘불운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에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일본의 경기 불황이었다. 1980년대 거품 경제가 꺼지고 1990년 초부터 일본 경제는 10년 넘는 장기침체에 빠져들게 된다.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았고 많은 백화점과 슈퍼마켓이 경기 부진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하지만 다이소에겐 경기 침체가 천우신조였다. 소비자들은 1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쓸만한 제품을 판매하는 다이소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다이소 매출은 수직 상승했다. 5,000만엔에 불과했던 자본금은 27억엔으로 급증했고, 2000년에는 ‘일본 벤처 오브 더 이어’를 수상했다.
다이소 매장은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판매하는 제품도 100엔 일변도에서 벗어나 200, 300, 400, 500엔짜리 제품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500엔을 넘는 고액(?) 제품은 다이소의 콘셉트와 맞지 않아 취급하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다이소는 해외시장 진출을 꾀하기 시작했다. 2001년 8월엔 대만, 9월엔 한국에 지분투자를 통해 첫 번째 매장을 설립했다. 이후 아시아 전역과 미국에도 매장을 냈다.
다이소는 상장기업이 아니다 보니 정확한 매출액이 공개되지 않는다. 야노 회장의 재산 규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본 재계에선 야노 회장의 재산이 2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방어 양식에 실패해 야반도주한 청년 사업가가 50년 간의 노력 끝에 100엔 숍이라는 새로운 사업을 개척한 억만장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1991년 당시 다이소 매장 전경. 다이소 홈페이지 |
운 없고 능력 없어 노력한다
야노 회장이 다이소를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일본의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약점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지혜가 성공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공은 운이나 능력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애초 운이라는 것은 무기로 내세울 게 아니라 감사해야 할 대상”이라고도 했다.
대기업 회장이라는 직함이 주는 무게와 달리 야노 회장은 솔직하면서도 다소 엉뚱한 언행으로 주목 받아왔다. 그는 거래처 사람을 만나 명함을 교환할 때면 다이소에서 파는 장난감 커터를 주머니에서 꺼내 손가락을 자르는 장난을 치기도 한다. 직원들이나 제조업체 담당자들을 만날 때도 다이소에서 판매하는 상품들로 분위기를 이끈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이어가는 다른 CEO들과 달리 몸을 낮추는 언행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2년 매장 디자인을 젊은 여성 취향에 맞춰 재단장한 이유를 묻는 한 언론의 질문에 “직원들이 정한 것으로 내 의견은 모두 무시됐다”며 “내 생각은 과거의 이론이라 지금 세상에서는 쓸모가 없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는 한 강연회에서 “과거 방어 사업이 잘돼 야반도주하지 않고 백과사전 영업에도 성공했다면 나는 지금의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 당시 쓴맛을 보고 자신감을 잃었던 게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야노 회장의 성공 뒤에는 결코 방심하지 않는 위기감, 불운을 노력으로 이겨낸 집념이 있었다.
다이소 로고 |
김기중기자 k2j@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