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미부터 천서진까지…김소연이 보여준 악녀의 모든 것
[토요판] 남지은의 토요명작 리플레이
⑮ 이브의 모든 것
20년 넘나들며 ‘역대급 악녀’ 맡아
‘펜트하우스’ 허술한 개연성에도
천서진 역 묘한 설득력 지닌 연기
의 허영미. |
‘순옥적 허용’. 현재 시즌3이 방영되고 있는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펜트하우스>의 허술한 개연성을 비판하는 말이다. 죽었던 인물이 살아 돌아오고, 이전 시즌에서 하차한 배우가 다른 인물로 다시 나오는 등 ‘정도껏’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더 황당하다. 시즌3을 앞두고 홍보사에서 직접 작가를 인터뷰해 기자들에게 뿌린 보도자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순옥적 허용’은 아마 개연성 부족 때문에 나온 말일 거다. 인정한다. 드라마가 많은 사건이 터지고 급작스럽게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다 보니, 캐릭터의 감정이 제대로 짚어지지 않고, 또 죽었던 사람이 좀비처럼 하나둘 살아나면서 시청자들이 많이 혼란스러웠을 거다. 부활절 특집이냐는 말도 들었다.(웃음) 저도 드라마 보면서 반성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고쳐야지! 절대 살리지 말아야지! 결심하다가도 또 저도 모르게 새로운 사건을 터트리거나 슬슬 살아날 준비를 하고 있더라.”
뭐지. 그럼 지금껏 알면서도 개연성을 무시해왔다는 소리인가. 여기서 뭔가 사건이 터져줘야 하는데, 모르겠다 살리자! 뭐 이랬다는 말인가? 말이 되나 안 되나를 고민하지도 않고? 애초 드라마를 시작하기 전에 전체적인 흐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소리인가. 이 이야기를 접한 한 드라마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 개연성 하나 때문에 몇날 며칠 잠 못 자고 고민하는 게 작가인데, 어쩌면 그 개연성이 드라마의 전부일 수도 있는데, 괜히 뭔가 억울하고 속상하다.” 한 평론가는 “시청률 지상주의가 낳은 현실을 보여주는 답변”이라고 혀를 찼다. 다행히(?) 시청자들도 한계에 다다른 듯하다. 김 작가는 “부족한 드라마를 감싸주고 변호해주려고 시청자들이 만들어준 신조어들에 감사하면서도 또 부끄럽다”고 했지만, 시즌1에서 30%에 육박했던 시청률은 시즌3이 시작되고 17%까지 하락했다. 여기서 우리는 교훈을 얻는다. 뭐든 ‘적당히’ ‘정도껏’ 해야 한다.
그래서 <펜트하우스> 지적질도 여기서 적당히! <이브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거면서 왜 계속 <펜트하우스> 개연성 운운이냐고? 재미있게 보는 사람도 있다고? 개연성 없는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개연성이 느껴지는 대목이 <이브의 모든 것>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펜트하우스> 천서진과 <이브의 모든 것> 허영미를 연기한 김소연 이야기다. <이브의 모든 것> 때나 <펜트하우스> 때나 김소연의 악역 연기는 시청자를 묘하게 설득시킨다. 악역이라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소리만 버럭 지르지 않고(물론 그럴 때도 있지만), 섬세한 표정, 눈빛까지 변화시키며 불완전한 욕망을 제대로 표현한다. 아버지 천명수(정성모)의 사망에 안색을 바꾸는 표정, 피가 묻은 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광기 가득한 눈빛은 압권이었다. 작가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펜트하우스>를 보면서 유일하게 칭찬해주고 싶은 점이다. 김소연의 악역 연기를 비로소 박수받게 해준 것.
2000년작 ‘이브의 모든 것’ 악역
현실서 “허영미” 불릴 만큼 명연기
캐릭터 아닌 김소연이 비난받거나
“군인이 싫다는 여배우”에 상처도
의 김소연. 허영미 때의 김소연과 달리 천서진을 연기한 김소연은 아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에스비에스 제공 |
. 프로그램 갈무리 |
천서진 이전에 허영미가 있었다
<펜트하우스> 천서진 이전에 <이브의 모든 것>의 허영미가 있었다. 2000년 방영한 <이브의 모든 것>의 허영미도 천서진만큼 화제를 모은 악녀였다. 그는 친구이자 라이벌인 진선미(채림)와 아나운서가 되어 일과 사랑을 두고 늘 대결했다. 하지만 화제의 방향이 달랐다. 요즘처럼 욕망에 충실한 악녀가 사랑받던 시절도 아니었고, 시청자들이 드라마에 푹 빠져 살던 당시에는 나쁜 역할을 맡으면 현실에서도 구박받기 일쑤였다. <이브의 모든 것>은 마지막회 시청률이 48%까지 나올 정도로 인기였지만, 드라마가 사랑받을수록 김소연을 향한 시청자의 미움도 커졌다. 한 시청자는 개인 블로그에 “당시 엄마와 앉아서 드라마 보며 허영미를 욕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김소연을 보면 본명보다 허영미라고 부른다”고 썼을 정도로 허영미라는 이름 자체는 악녀의 상징이었다.
기껏해야 <별은 내 가슴에>에서 남이 스케치한 그림을 훔치고, 거짓말을 하는 정도의 악행을 봐왔던 시청자들에게 허영미의 ‘만행’은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의 천서진을 보던 느낌과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천서진처럼 스케일이 크진 않지만, 자신의 성공을 위해 남을 곤경에 빠뜨리는 점은 비슷하다. 허영미는 학교 축제 진행자 경쟁에서 진선미한테 밀리자 선미 화장품에 몰래 아세톤을 넣는다. 바르는 순간 피부가 뒤집어지면 자신이 대신 진행을 맡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작전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다쳤다는 거짓말로 선미를 병원에 보내고 결국 자신이 2부 진행을 맡는다. 아나운서가 된 뒤 진선미가 자신을 제치고 ‘7시 뉴스’ 앵커가 되자 스튜디오에 휴대전화를 둔 뒤 방송 중에 전화를 해 결국 선미를 잘리게 만든다. 천서진은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단 하나, 실력에서 1인자가 되지 못했던 반면, 허영미는 실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에서 두 사람은 같다. 둘 다 아버지한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내게 하나는 해주고 가셨네요”라는 식의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그래서 둘 다 한 남자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남자를 출세의 도구로 활용하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당시 20살 정도였던 김소연은 이 역할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김소연은 10대 때인 1994년 청소년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데뷔하고 영화 <체인지>로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에는 10대 여자 스타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안 그래도 아이돌 그룹 멤버와 함께 음악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예능프로그램에서 만나기만 해도 힘든 일을 겪었던 김소연에게 허영미를 향한 질타는 상처로 남았다. 배우로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지만 그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다. 김소연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군인들마저 싫어하는 여자 배우 1위로 뽑힌 적도 있었다. 당시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회상했다. <이브의 모든 것> 이후 15년여간 악녀 역할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이리스> <가화만사성> 등 여러 작품을 거친 뒤 2016년 이후에야 다시 제대로 악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악역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만난 것이 천서진이다.
<펜트하우스>가 인기를 끌면서 오히려 지금 다시 <이브의 모든 것>을 정주행하는 이들이 많다. 요즘 시선에서 다시 보는 허영미는 어떨까? 젊은 세대들도 보는 내내 화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상대가 좀 다르다. 허영미가 아니라 진선미다. “실력은 허영미가 훨씬 좋은데 진선미는 ‘운빨’인지 몰라도 늘 허영미를 이겨. 아, 내가 허영미라도 화나겠더라” 등 시대 차이가 느껴지는 반응이 많다. 아마 허영미에게서 지금의 내 모습을 보는 게 아닐까.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 삶을 벗어나보려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진 ‘금수저’ 진선미를 이길 수는 없다. 게다가 진선미는 어떻게 저 실력으로 아나운서가 되고, 뉴스 앵커를 맡는지 시청자조차 신기할 정도로 승승장구한다. 허영미가 아니더라도 불공평하다고 느낄 만한 충분한 분위기다. 요즘 다시 <이브의 모든 것>을 본 이들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금수저 물고 태어난 이들을 이길 수 없는 현실을 과거 허영미에게서 본 것 같다”고들 한다. 김우진(한재석)을 잊으려고 떠난 미국 어학연수에서 우연히 알게 된 남자도 방송국 오너의 아들 윤형철(장동건)이라니.
악역으로 미움과 사랑 한몸에 받아
최근엔 ‘흙수저’ 허영미 재평가도
“김소연표 ‘두 악녀’ 비교시청 강추!”
2000년 방영한 의 허영미도 천서진만큼 화제를 모은 악녀였다. 그는 친구이자 라이벌인 진선미(채림)와 아나운서가 되어 일과 사랑을 두고 늘 대결했다. 프로그램 갈무리 |
‘입체적 악역’ 연기로 많은 사랑 받아
허영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입체적인 악역이기도 했다. 1990년대, 2000년대 트렌디 드라마에서 선악은 이분법적이었다. 가난하지만 착하고 밝은 여자 주인공이 선이라면,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서 남의 것을 또 빼앗으려는 막무가내형 캐릭터가 악이었다. <진실> 박선영, <토마토> 김지영, <미스터큐(Q)> 송윤아 등이다. 이들은 논리 없이 선을 괴롭혔다. 하지만 <이브의 모든 것>은 허영미의 복잡한 속내를 표현했다. 6살 때 어머니가 떠나고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평생을 암울하게 살았다. 그 아버지가 공사 현장에서 일어난 사고로 죽자 책임자인 진선미의 아버지가 마련해준 집에서 살면서부터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는 꿈을 꾼다. 드라마는 그저 늘 사랑받고 자란 진선미가 부러웠다는 허영미의 마음을 종종 드러낸다. “진선미…. 난 사실 네가 부러웠어” 같은 대사도 자주 등장한다. 마지막회에서 김우진(한재석)의 죽음에 죄책감을 안고 자살을 시도했던 허영미는 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이 된다. 6살 이전의 기억만 남아 있다. 6살은 엄마가 떠나기 전, 그러니까 가족이 모두 함께 살며 행복하던 시절이다. 허영미는 방법은 틀렸지만, 그저 행복하고 싶었을 뿐이다.
여기서 잠깐, 악녀의 변천사를 짧게 훑어보자면! 드라마 속 악녀도 시대상을 반영했다. 1970년대 <여로> 등에서 단골 악녀는 시어머니였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권력관계가 확고했던 사회상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들어서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본격화하면서 ‘커리어우먼’들이 악녀 역할로 등장했다. <미스터큐> 송윤아, <토마토> 김지영 등이다. 일과 사랑 모두 쟁취하려는 여성은 악독하다는 왜곡된 관념이 드라마 속에 녹아든 것이다. 반대로 가난한 집에서 착하게 자란 여성들을 선한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2000년대 들어서는 <러빙유> <유리구두>처럼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여성들이 악녀로 등장했다. 그래서 악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에는 <왔다 장보리>에서 악녀 연민정을 연기한 이유리가 연기대상을 받는 등 오히려 착하고 심심한 역할보다 욕망을 마음껏 표출하는, 연기적으로도 인물적으로도 속 시원한 악녀가 사랑받는 캐릭터가 됐다.
악녀가 미움받던 시절도 사랑받던 시절도 김소연은 모두 경험했다. 그런 시절을 견뎌낸 허영미가 기억에서 깨어나 2021년의 천서진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고 말하는 시청자들이 많다. 허영미와 달리 많은 것을 가지게 됐지만 여전히 아등바등 사는 ‘팔자’인 게 속상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허영미 때의 김소연과 달리 천서진을 연기한 김소연은 아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천서진으로 허영미까지 재평가되고 있으니 천서진이 허영미를 도운 셈인가. 허영미였고 천서진인 김소연의 배우로서의 연기는 제대로 빛나고 있다. 한 누리꾼의 댓글로 글을 마친다. “<펜트하우스> 천서진과 <이브의 모든 것> 허영미 캐릭터를 비교해서 보면 아주 재미있다. 강추!”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아나운서팀. 프로그램 갈무리 |
▶ <한겨레> 문화부 기자. 언제든 옛날 콘텐츠를 다시 볼 수 있는 시대. 세대 불문 되감기하면 좋을 대중문화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연출, 연기, 이야기 기본 3박자에 충실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옛 작품들이 콘텐츠의 본질을 일깨운다. 지금 시선에서 새 해석이 등장할지도. 제작진과 배우들의 비하인드 코멘터리도 담아보겠다. 3주에 한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