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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은 내게 평생의 멍에였다”

‘한라산’의 이산하 시인 신작시집 출간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잘 지기 위해서다”



한겨레
악의 평범성

이산하 지음/창비·9000원


시인 이산하(61)는 약관 스물일곱이던 1987년 제주 4·3의 비극적 진실을 담은 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한 일로 붙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년 남짓 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담당 검사가 황교안 전 국무총리였다. 당시 미국 펜클럽 회장이었던 수전 손택은 이산하를 미국 펜클럽 명예회원으로 위촉하고 이듬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 펜대회에 참석차 방한해서도 구치소로 그를 면회하려 했으나 정보 당국에 의해 차단당하기도 했다.


4·3항쟁 70주년을 기념해 2018년에 복간한 <한라산> 후기에서 이산하는 “<한라산>은 비명이자 통곡 (…) 내 27살 청춘의 암약”이었다며 “<한라산> 이후 내 삶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운구하는 것 같은 삶이었다”고 썼다.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출판사 창비 사옥에서 만난 그는 “<한라산>은 내 평생의 멍에였다”고 잘라 말했다. 그 멍에는 동시에 ‘명예’이기도 하지 않았겠냐는 질문에는 “그 때문에 덕 본 건 하나도 없다”고 되받았다. “8년 전에는 서북청년단으로 추정되는 자에게 백색 테러를 당해 서른 바늘이나 꿰매고 몇 달간 입원을 해야 했고, 그 때문에 오랫동안 애써 잊고자 했던 고문의 악몽도 되살아났다. 아직도 수시로 우울증 약을 먹는다. 지난 10여년간 거의 자폐아처럼 살았다”고 부연설명했다.


“요즘 ‘다음 차례는 너’라는 듯 지인들의 부고문자가 쌓인다./ 내 눈에는 내 잉여목숨의 고지서로 보인다./ 허공이 초점 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40대 중반 서교동 골목길의 교통사고와/ 50대 초반 합정동 골목길의 백색테러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반품된 후 모든 게 허망해지고/ 오랫동안 애써 부정하고 망각했던 고문의 악몽마저 되살아나/ 날마다 피가 하늘로 올라간다./ 우울증 알약으로 버티며 내 살점을 베어 멀리 이송하지만/ 그마저 반품되자 벼랑의 꽃처럼 더욱 조급하고 초조해진다.”



한겨레

제주 4·3항쟁을 다룬 서사시 <한라산> 으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른 이산하 시인이 22년 만에 신작 시집 <악의 평범성> 을 내놓았다.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 건물에서 만난 그는 “시를 쓰는 일은 흩어진 유골을 모아서 온전하게 만드는 일과 같다. 나는 여전히 유배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그가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이후 22년 만에 낸 새 시집 <악의 평범성>에 실린 작품 ‘버킷리스트’ 앞부분이다. 이 독특한 시의 뒷부분은 “수배 4년 동안 나를 ‘은닉’ 혹은 ‘묵인’해준 119명의 실명”을 가나다 순으로 적었다. “고마움을 잊지 않고자” 해서라고 시인은 덧붙였다. 여기에는 나병식, 박영근, 박종철, 전우익, 채광석 등 작고한 이들도 여럿 보이는데, 시인 기형도의 이름이 유독 눈길을 끈다. 기형도 이야기는 ‘멀리 있는 빛’이라는 별도의 시로도 시집에 들어 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박경리 소설 <토지> 한 질을 넣어 주었으며, 석방 뒤 그가 속한 동인 시운동이 마련한 환영회에서는 김영동의 노래 ‘멀리 있는 빛’을 축가로 불러주었다는 내용이다. 2일 인터뷰에서 ‘친구 기형도’에 관해 좀 더 청해 들었다.


“동갑인 기형도와는 대학 신입생 때 친구의 친구로 처음 만나 친해졌다. 짙은 눈썹에 기타도 잘 치고 목소리도 좋아서 노래를 정말 잘했다. 술은 잘 못했지만, 자신도 글을 쓴다는 사실을 수줍어 하면서 알려주더라. 내가 그에게 박상륭 선생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권해주기도 했다. 수배 시절에는 당시 중앙일보 기자이던 그와 비밀 인터뷰를 했는데, 신문에는 나가지 못하고 나중에 내가 구속된 뒤에야 기사로 실렸다.”


<악의 평범성>은 20여년 세월을 두고 쓰인 작품들을 모은 시집이지만, 그 기조는 일관되게 무겁고 어둡다. 알다시피 악의 평범성이란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나치 장교 아이히만을 가리켜 한나 아렌트가 쓴 표현. 홀로코스트와 같은 악의 집행자들이 성격 이상자들이나 반사회적 악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모범적이기까지 한 시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집에는 이 제목을 지닌 연작 세 편과 아우슈비치 등 유대인 수용소 이야기를 다룬 시들, 6·25 전쟁과 5·18 광주학살, 세월호 참사 등 현대사의 아픔을 천착한 작품들이 실렸다. “요즘 시집은 가볍고 달콤한 시구 같은 제목을 많이 쓰던데, 나는 우리가 그동안 감춰왔던 어둠에 대한 직격탄 같은 묵직한 제목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고 이산하 시인은 설명했다.


“세상은 불치병에 걸렸다. 못 고친다. 인간과 구조 자체가 불치병에 걸렸다. 내가 2014년과 2018년 두 차례에 걸쳐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 수용소들을 답사했다. 가서 보니, 나치 간부들이 모두 집에 가면 평범한 가장으로서 자식들을 걱정하고 가정의 행복을 중요시했던 착한 사람들이더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저 가끔씩 인간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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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만에 신작 시집 <악의 평범성> 을 낸 이산하 시인. 시집에 실린 시 ‘대나무처럼’에서 “60년 만에 처음으로/ 단 한 번 꽃을 피운 다음/ 숨을 딱 끊어버리는/ 그런 대나무가 되고 싶다”고 썼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5월 광주에서 희생된 주검들 사진과 함께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육질이 빨간 게 확실하네요’ 같은 댓글을 올려 놓거나, “세월호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된 게 아니라 진도 명물 꽃게밥이 되어 꽃게가 아주 탱글탱글 알도 꽉 차 있답니다~”는 글을 꽃게 사진과 함께 올려 놓은 페이스북 글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좋아요’와 댓글을 보며 시인은 절망한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다./ (…) /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악의 평범성 1’ 부분)


시인은 “4·3 막바지에 죽을 줄 알면서도 산으로 올라갔던 청년들처럼, 내가 시를 쓰는 이유도 잘 지기 위해서다. 이길 가능성은 없다. 조문하듯 시를 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마.”(‘나무’ 전문)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추모시로 청탁 받았지만 너무 짧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못했다는 시 ‘나무’는 패배와 죽음에서 건져올릴 수 있는 최소한의 희망의 근거를 보여준다. 지금 이산하 시인은 박정희 유신 시절 사법살인으로 악명 높은 인혁당 사건을 다룬 서사시를 쓰는 한편, <한라산> 필화 사건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상처는 정면으로 보지 않으면 낫지 않는다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에 따른 결정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온 날 밤, 시인이 시 같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20년째 사는 반지하 집의 부엌 쪽창을 열면 행인들의 발만 보이고 바닥에 떨어진 꽃만 보인다. 집 앞에 커다란 목련나무가 있어서 그 뿌리를 베개 삼아 베고 잔다. 집에 들어가다가 멀리서 보면 목련나무 꽃이 꼭 조등처럼 보인다. 꽃이 동백꽃처럼 툭툭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봄이면 나는 매일 상주가 된다. 불쑥불쑥 ‘이륭’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본명이 이상백인 그는 <죽음의 한 연구>의 소설가 박상륭을 흠모해 ‘이륭’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이산하’의 이름으로 <한라산>을 쓰기 전, 시운동 시절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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