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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김 피디, 오늘 자막도 기발한데? 인정!!

젊은 시청자 사로잡는 예능의 자막 활용법


중장년층 낚시 예능 ‘도시어부’

1020 취향 애니·게임 드립 화제

‘유 퀴즈…’ ‘라디오 스타’ ‘삼시세끼’ 등

얼굴을 자음 삼아 글씨 만들기도


유튜브에서 티브이로 넘어온 유행

자막이 하나의 콘텐츠로서 프로그램 인기 견인

한겨레

“자막이 미쳤다!” 요즘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누리꾼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다. 요즘 “미쳤다”는 말은 발상이 기발해 감탄했다는 뜻처럼 쓰는데, 자막이 대체 얼마나 ‘미쳤다’는 걸까.


누리꾼들 사이 가장 화제를 모은 종합편성채널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채널에이(A))를 보자. 이경규, 이덕화 등 ‘아저씨’들이 출연하고 낚시가 취미인 중장년층을 겨냥한 예능인데, 자막에는 ‘젊은 감성’이 팔딱인다. 전갱이를 낚은 이만기가 허탕 치는 이경규를 향해 “행님, 아버지 불러봐요”라고 소리치는 ‘두 아저씨’의 대화를 자막은 이렇게 정리한다. “아버지 불러봐살법!” “(못받아치네)”


“아버지 불러봐살법”은 10~20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인사법인 ‘안녕하살법’을 응용했다. 일본 만화 <카구야님은 고백받고 싶어: 천재들의 연애 두뇌전>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인사 방법이다. “안녕하살법”이라고 인사하면 “안녕하살법 받아치기”라고 응수해야 한다. 친구끼리 우정을 확인하는 의미인데, 손동작이 재미있어서인지 비제이, 유튜버들도 따라 하는 등 2019년 신조어처럼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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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유행어를 사용애 젊은 시청자를 끌어들인 <도시어부>. 프로그램 갈무리

무협지, 축구, 게임 등 젊은 세대의 취향을 저격하는 ‘드립’도 거침없이 쏟아낸다. 물고기가 잘 잡히기를 염원하는 장면에서는 게임 <배틀 그라운드>에서 쓰는 ‘~메타’(생존을 위한 여러 방법 중 주력으로 하는 방법)를 응용해 “기도 메타”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운에 모든 걸 걸겠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이경규의 귀에서 피가 나는 모습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한 뒤 “과다 출혈 복붙신공으로 귀에서 피 줄줄”이라고 표현한 자막도 화제를 모았다. 소리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공에 당하면 귀에서 피가 흐르는 무협지에 나온 내용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복붙신공’(복사+붙여넣기)이라고 만든 것이다.


감각 있는 자막은 티브이를 떠나는 젊은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냈다. <도시어부>는 누리꾼들을 배꼽잡게 하는 자막이 입소문을 타며 전체 시청률이 4%대로 올랐는데 특히 20~49살 연령대의 시청률이 2%대로 뛰었다. 자막이 젊은 세대도 낚시 프로그램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누리꾼들은 <도시어부> 자막만 따로 모은 글을 포스팅하고 자막을 ‘짤’로 만들어 인터넷에 공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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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자 얼굴을 자막으로 활용한 <유 퀴즈 온 더 블록>. 프로그램 갈무리

최근 <유 퀴즈 온 더 블록>(티브이엔·tvN) 등 여러 예능들은 감각 있는 자막으로 화제를 모은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단어 혹은 밈(인터넷상에 재미난 말을 적어 넣어서 다시 포스팅한 그림이나 사진)을 적절히 사용해 자막 자체를 하나의 콘텐츠처럼 만든다. 자막이 하나의 재미 요소가 된 셈이다.


출연자 얼굴을 한글 자음으로 활용하는 자막도 최근 주목받는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는 사람들이 선물을 뽑고 유재석이 놀라는 장면에서 유재석의 얼굴을 ‘ㅇ(이응)’으로 활용해 ‘’이라는 자막을 완성했다. <라디오 스타>(문화방송·MBC)도 ‘우와’라는 자막을 김구라의 얼굴을 ‘ㅇ’으로 활용했고, <삼시세끼>(티브이엔)는 염정아의 두 눈을 ‘ㅇ’으로 사용해 ‘으음’이라는 자막을 완성했다. 영화 대사나 광고를 응용한 자막을 해당 배우의 얼굴과 함께 쓰는 것도 인기다. “꼭 그래야만 속이 시원했냐”라는 자막을, 영화 <해바라기>에서 이 대사를 한 김래원의 얼굴과 함께 쓰는 식이다. 요즘 자막은 크기를 키워서 문제를 일으킨 출연자를 가리는 용도로도 활용한다.


처음엔 상황과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 불과했던 자막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으면서 출연자의 행동에 대해 제작진이 화자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식으로 바뀌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한국방송·KBS2)은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말풍선에 넣었고, <마이 리틀 텔레비전>(문화방송)에서는 누리꾼들의 실시간 댓글을 자막으로 활용했다. 자막이 화려해지고 재미있어지더니 프로그램의 인기를 끌고 가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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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자 얼굴을 자막으로 활용한 <삼시세끼>. 프로그램 갈무리

제작진도 자막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다. <서울메이트>(티브이엔)는 시즌1부터 출연자들의 얼굴을 웹툰 작가에게 맡겨 각각 7~8개의 표정으로 만든 뒤, 이를 자막에 적절히 배치했다. <서울메이트> 관계자는 “이모티콘을 보듯 출연자들이 놀라고 땀 흘리고 하는 표정들을 활용했다. 출연자가 많아 여러 화면에서 활용할 때 요긴하다”고 했다.


자막은 주로 피디(연출가)들이 편집하면서 입히는데 15분 분량을 종일 제작하기도 한다. 한 케이블 예능 피디는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평소 다양한 매체를 통해 흐름을 알고 있어야 잘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장년층이 대상인 프로그램은 활자 크기를 키우는 등 자막도 타깃층, 상황, 내용 등을 따져 만든다. 편집 단계부터 자막을 생각하거나, 꼭 필요하지 않지만 자막을 넣어 활용하기 좋은 컷은 그대로 둔다. 자막이 편집에 큰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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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꾼들이 만든 메시 얼굴을 사용한 <유 퀴즈 온 더 블록>. 프로그램 갈무리

자막이 그 자체로 완결된 재미를 주는 콘텐츠로 위상이 높아진 것은 뉴미디어의 성장에셔 비롯됐다. 유튜브 등이 주류가 되면서 여기서 시도하는 것들이 다른 매체로 전파된다. 얼굴을 자음으로 활용한 자막은 <워크맨>과 <백종원의 쿠킹로그> 등 유튜브 콘텐츠에서 먼저 쓴 것이다. 케이블 예능 피디는 “유튜브 세대이자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피디들이 자막을 쓰면서 자연스레 젊은 감각이 배어나고 있다”고도 말한다. 실제 <도시어부> 피디들도 젊은 시청층을 끌어모으겠다는 전략보다 그저 자신들이 재미있어하고 관심 있던 것을 자막에 활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미와 감각에만 골몰하다보니 비문·비속어, 혐오성 단어 등을 여과 없이 쓰는 폐해도 생긴다. 방송 경력 20년인 한 예능 피디는 “자막이 좋으면 프로그램이 감각적으로 보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며 “제작진이 출연자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배려 없는 단어를 쓰게 된다. 포장(자막)이 과해서 알맹이를 죽이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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