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밥상에는 누구의 눈물도 없어서 아름다웠다
[토요판] 마을살이
지리산에서 페미니즘을(하): 나의 채식 이야기
새끼 잃은 소 눈물 본 어린시절
우는 존재는 먹을 수가 없었다
시골로 와 짙은 채소맛에 눈떠
채식 억지스럽다 비난·타박도
고기 즐기며 축사 싫다는 모순
밥상에 누구의 눈물도 없기를
언젠가 우리 마을의 채식모임 ‘오! 이런 밥상이!’의 초대로 맛보았던 경쾌한 색감의 채식초밥을 기억한다. 그 밥상에는 누구의 눈물도 없어서 그날 우리는 함께 마음껏 평화롭고 행복했다. 박이은실 제공 |
소의 눈물을 처음 본 것은 내가 열여섯살 때였다. 대도시에서 작은 도농복합 해변도시로 이사한 뒤 두어 해를 살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 집 앞의 작은 개천 건너에는 그 마을에 몇 없던 외양간이 하나 있었다.
날씨가 모처럼 풀리고 있던 어느 이른 봄날, 저녁 어스름 속에서 그 외양간에서부터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깊은 밤이 되어도, 심지어 다음날이 밝아왔는데도 멈출 줄을 몰랐다. 소는 목이 다 쉬어 더 이상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이제는 끼역끼역 긁는 듯한 쉰 소리로 울었다. 나는 소의 안부가 조금 걱정이 되어 소가 있는 이웃집 본채 밖 허술한 외양간으로 다가갔다. 기척이 들려서였는지 소는 잠시 울음을 멈췄다. 나는 소를 잘 보기 위해 위쪽이 뚫려 있는 입구로 가서 바짝 몸을 붙였다. 외양간 안에서 덩그러니 서 있던 소가 몇 걸음 가까이 오더니 고개를 들어 잠깐 나를 보았다. 커다랗고 순한 동그란 두 눈이 금세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로 그득했다. 두 뺨은 온통 밤새 운 울음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물어보고 이유를 알았다. 소는 그날 어인 일로 보이지 않기 시작한 자식이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찾아 부르기 시작했고 집주인이 데려다 팔아버린 어린 송아지는 당연히 돌아올 길이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소의 눈물을 보았던 그날 이후부터 나는 더 이상 소를 먹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직접적으로 가해진 상처나 통증 때문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잃은 상실감 때문에 그토록 처절하게 울 수 있는 존재를 나는 더 이상 어떤 이유로든 먹을 수가 없었다.
나의 채식생활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지금은 4년 전에 사놓고 아직 못다 먹은 마른 멸치와 이웃 동네 방목농장 닭들이 낳아준 달걀이 내가 먹는 육식의 전부인데 큰 부족함이 없이 산다. 5년 전부터는 다시 대도시를 떠나 아주 시골에 살게 되었는데 재밌는 것은 도시에서 살 때보다 내가 훨씬 풍요롭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현금이 없으면 어떤 것도 내 손에 쥘 수 없는 도시와 달리 시골에서는 지구가 무상으로 주는 먹거리가 지천이다.
그중 내게 최고는 쑥과 냉이다. 특히 쑥은 이른 봄부터 늦은 봄까지 집 마당이든 이웃집 밭두렁이든 어디에서나 쑥쑥 자란다. 농약을 쓰지 않는 이웃들 덕분에 마음 놓고 뜯어 먹을 수 있어 봄 내내 나의 밥상에는 쑥 향기가 가실 날이 없다. 산나물 지식이 엄청난 이웃들의 밥상은 비교가 안 될 만큼 풍성하기 이를 데 없다. 땅두릅, 머위, 취…. 나는 듣고도 금방 잊어버리기 일쑤인데 아무튼 먹거리가 되는 식물들의 종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종종 얻어먹을 기회가 있어 그 낙 하나만으로도 한 철을 살아낼 수 있다. 고소하거나 달거나 쌉싸름한 향기를 가진 각각의 나물 맛은 지구의 따뜻한 살 냄새를 맡는 듯 나를 흐뭇하게 해준다.
오염되지 않은 기름진 땅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줄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그전에 한번 경험을 했었다. 귀촌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그때 싹텄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 이곳으로 와서 살고 있는 친구 집에서 한 이틀 머물렀는데 밥을 해준다며 그 친구가 텃밭에 가서 파와 고추, 토마토를 따오라는 주문을 내렸다. 오랜 도시생활에 젖어 있던 나는 마트에 가서 사지 않고 집 코앞에서 세상 신선한 채소를 거둬와 그것으로 밥상을 차리는 모습이 그렇게 생경할 수가 없었고 또한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날 나는 방울토마토가 실제로 특정한 맛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방울토마토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동안 슈퍼마켓에서 사먹어왔던 방울토마토에서는 특별히 어떤 맛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친구 집 텃밭에서 따먹었던 토마토는 신선하기도 했지만 고소하고 달달한 맛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 나는 그때서야 토마토가 맛이 있는 식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그동안 뭔가 속고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후 친구가 데려가준 우리 마을 쌈밥집에서 느낀 ‘배신감’은 거의 뒷목을 잡을 수준이 되었다. 채소를 먹기 위해서 슈퍼마켓에서 쌈채소를 종종 사먹어오긴 했지만 이 채소와 저 채소가 모양만 달랐지 맛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먹는 감흥이 크지 않았었다. 그런데 텃밭에서 직접 길러 밥상에 올린다는 그 식당의 다양한 쌈채소들은 하나하나가 같은 맛이 없었다. 게다가 맛이 짙었다. 정말 짙었다. 그 짙은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시골이란 지구상의 가장 멋진 곳이 아닌가?
오래전 귀촌한 친구 집 텃밭에서 따 먹었던 토마토. 신선하기도 했지만 고소하고 달달한 맛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 나는 그때서야 토마토가 맛이 있는 식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 박이은실 |
사실 한국 사회는 도시뿐만 아니라 어디든 육식을 하지 않고 살기에 편한 곳은 아니다. 더 힘든 것도 있다. 육식을 당연해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인 곳에서는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일종의 도전이나 비난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있다. 설사 그들로부터 일종의 ‘배려’를 받는다 하더라도 육식 위주의 식탁 앞에 장시간 붙들려 있는 것도 고역이다. 사람들과 즐겁게 식사를 하는 것은 고사하고 마음까지 불편한 상태로 그 자리를 견뎌야 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참석하는 모임도, 만나는 사람도 줄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온다.
육식을 하지 않아서 그동안 많은 말을 들었다. 몸이 좀 부실해지거나 아프기라도 할라치면 풀만 먹어 그렇다는 걱정과 타박을 여지없이 듣는다. (그런데 나는 동년배 평균보다 건강한 편이다.) 나름 배려해주는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이건 먹을 수 있냐, 저건 먹을 수 있냐는 질문을 받는 것도 피곤해서 한마디 할라치면 좋은 마음으로 하는 말을 뭘 그리 뾰족하게 받냐는 원망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말은 따로 있다. 바로 육식은 자연스럽고 채식은 억지스럽다는 말이다. 육식동물들과 달리 인간의 육식은 슈퍼마켓이나 식당에서 ‘고기’로 접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 몸이 따뜻한 살과 피를 가지고 나름의 생애를 살고 있던 동물이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지운다. 그런 모든 과정을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납득이 안 된다.
올해 초, 코로나 긴급재난지원금이 제공되었을 때 이웃 면에서는 모처럼 생긴 그 ‘공돈’으로 죄다 ‘소고기’를 사먹느라 동네 고깃집 ‘고기’가 동이 났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자주 지나는 그 동네 길에서 이런 현수막이 오래 붙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물좋은 청정○○에 냄새지옥 축사신축 웬말이냐.” 이런 말을 비단 시골에서만 할까? 이상한 일은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이나 많고 육식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막상 자신이 즐기는 그 ‘고기’가 키워지는 곳은 자신의 일상과는 무관한 어떤 곳에 감춰져 있기를, 자신의 일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고기’는 반길지라도 고기를 만드는 도축장을 사람들이 반기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지난해 여름, 기후붕괴로 인한 유난한 장마로 홍수가 나자 높은 산등성이의 절로 스스로 피난을 갔던 소들이 있다. 순한 눈의 그 소들 중 몇이나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까. 눈물을 흘리는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이 지구가 허락해 준 실존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날이 꼭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언젠가 우리 마을의 채식모임 ‘오! 이런 밥상이!’의 초대로 맛보았던 경쾌한 색감의 채식초밥을 기억한다. 그 밥상에는 누구의 눈물도 없어서 그날 우리는 함께 마음껏 평화롭고 행복했다.
글·사진 박이은실 여성학자
작은 마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지리산의 품속에서 페미니즘을 연구하고 실천하고 있는 여성학자 박이은실씨의 글을 상중하로 나눠 격주로 싣는다. 2020년의 폭우와 기후변화 이후 지리산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리산 인근 논에서 자라는 벼. 지난 여름 지독한 폭우를 견뎠다. 사진 박이은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