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제작사 맘대로, 관람 등급이 왜이래
‘어린왕자’는 12살 이상 관람가인데
살인하는 ‘잭 더 리퍼’ ‘지킬 앤 하이드’는
8살·만 7살 이상 관람가
같은 공연이 지역마다 기준 다르기도
국내 유통 영상물 심의 거치지만
공연은 관람등급 규정 자체가 없어
제작사들이 개막 전 알아서 정해
관람태도, 내용 등 고려하지만
“가족 단위 관람객들 많아서
수익 따져 폭넓게 잡는 경우 많아”
선정적·폭력적 장면 그대로 노출
이참에 “공연업계 자체 기준 정하자” 목소리도
8살 이상 관람가인 ‘잭 더 리퍼’엔 성매매 여성만 노리는 연쇄살인범이 등장한다. 엠뮤지컬컴퍼니 제공 |
문제) 다음 중 초등학교 1학년이 볼 수 ‘없는’ 내용은 뭘까.
① 술집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이 손님들한테 노골적인 추행을 당하고… 광기어린 과학자는 자신의 실험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② 강력계 수사관은 연쇄살인범을 수사하고… 성매매 여성만 노리는 잔인한 살인 수법 때문에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③ 사막 한복판에서 신비로운 소년 ‘어린왕자’를 만나고…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노래하고….
①번과 ②번에서 고민하겠지만 그럴 필요 없다. 정답은 ③번이다. 1번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5월19일까지)와 2번 뮤지컬 <잭 더 리퍼>(3월31일까지)는 각각 만 7살 이상과 8살 이상 관람가이고, 3번 뮤지컬 <어린 왕자>(4월7일까지)는 12살 이상 관람가다. ‘어린 왕자’는 못 보는데 여성의 몸을 더듬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지킬’과 ‘잭’은 왜 아이들에게 허용되는 걸까? 공연계의 관람 등급 결정이 ‘제작사 마음대로’이기 때문이다. 영화 등 영상물은 주제·선정성·폭력성·대사·공포·약물·모방위험 등 7가지 기준에 따라 상영 전 영상물등급위원회(영화) 심의를 거치지만, 공연은 관람 등급에 관한 규정 자체가 없다. 1988년 표현의 자유를 해친다는 이유로 공연윤리위원회가 폐지되고, 사전각본심의제도도 1999년 없어진 뒤부터 제작사들이 개막 전 알아서 정해왔다.
관람 태도, 내용 이해도 등을 고려해 뮤지컬 ‘어린 왕자’는 12살 이상 관람가로 설정했다. 수익성을 앞세우기보다 “관객은 공연의 제3의 요소”라며 작품성을 고려한 결정이다. HJ컬처 제공 |
<어린 왕자>를 만 12살 이상으로 정한 데 대해 제작사 에이치제이(HJ)컬처 쪽은 “아이들이 봐도 무방하지만, 관람 태도 등에서 다른 관객을 방해할 수도 있고, 어른들의 동화인 만큼 내용 전달력에서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익보다는 “관객은 공연의 제3의 요소”라며 작품성을 고려한 결정이다. 반면 <지킬 앤 하이드>를 제작한 오디컴퍼니 쪽은 “2004년 초연 때 살인 장면 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른과 동반 관람하면 아이들에게도 무리 없다고 판단해 등급을 결정했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공연은 초등학생 이상, 중학생 이상 이상 등으로 나누는 경우가 많은데, 대형 뮤지컬은 대부분 초등학생 이상이다. 공연 제작사 관계자는 “제작비가 많이 드는 대형 뮤지컬의 경우는 수익적인 측면을 고려해 관람 가능 연령대를 폭넓게 잡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공연 예매사이트 인터파크 누리집 ‘핫공연’에 올라온 <안나 카레니나> 등 대형 뮤지컬 작품 8개가 모두 8살 이상이거나 만 7살 이상이다. 라이센스 뮤지컬은 브로드웨이 기준을 그대로 따르기도 한다.
연령대를 낮춘다고 표현의 수위를 조정하는 것도 아니다. 공연 제작사 관계자는 “폭력적인 장면들이 있더라도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부드럽게 바꾸기는 애매하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도전을 그렸던 대형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경우 흡연 장면이 많아 아이를 데려온 어른들이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이 관계자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 뺄 수 없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만 7살 이상 관람가인 ‘지킬 앤 하이드’엔 추행, 살인 등이 나온다. 오디컴퍼니 제공 |
기준이 없다보니 같은 작품인데도 때와 장소에 따라 등급이 달라진다. 뮤지컬 <빨래>의 경우 서울 공연은 만 14살 이상 관람 가능하지만, 지방 공연은 만 7살 이상인 곳이 많다. <빨래> 제작사 관계자는 “지방 공연은 지역의 프로덕션에서 알아서 정한다. 지방에서는 가족 단위로 오는 관객이 많기 때문에 연령대를 낮추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초등학생들이 보기에 부적절한 내용도 그대로 무대에 오른다. 최근 <지킬 앤 하이드>를 관람한 초등 2학년 전아무개는 “번개가 치며 하이드로 바뀌는 장면과 살해하는 장면이 무서워서 눈을 가렸다”고 말했다. 함께 공연을 본 엄마 송아무개도 “초등학생 관람가여서 봤는데, 성매매 여성의 몸을 더듬는 등의 장면을 아이가 보고 있어서 신경이 쓰였다”고 말했다. 예매처 공지 사항에 ‘어린이와 청소년 관람 시 보호자 및 인솔자의 동반 관람이 필요하다’는 식의 안내 문구를 넣어놓지만 별 소용이 없다.
초등학생들의 관람 여부는 두 작품의 수익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잭 더 리퍼>를 만드는 엠뮤지컬컴퍼니 쪽도 “실제로 초등학생 관람객은 많지 않다”고 밝혔다. 한 예매 사이트 티켓 판매 기준으로 <지킬 앤 하이드>의 경우 초등학생(2007년생~2012년생)이 직접 표를 예매한 경우는 이번 공연 기준으로 6명 뿐이고, <잭 더 리퍼>는 한명도 없다. 이 예매사이트 관계자는 “부모가 예매하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집계는 어렵지만, 초등학생은 많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전년 대비 티켓 판매금액이 23% 상승(5441억원·인터파크 기준)하는 등 공연 시장이 커지고 내용도 다양해지면서 기준을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공연은 드라마·영화와 달리 무대에 오르기 전 공개되지 않는 예술 장르이기 때문에 사전 심의는 규제나 검열로 작용할 수 있지만, 공연계가 자율적으로 기준을 정할 필요성엔 업계 관계자들도 동의한다. 한 공연 제작사 대표는 “#미투(me too·나는 폭로한다)운동 이후 <맨 오브 라만차>에서 여성을 성폭행하는 장면을 자체적으로 없앴던 것처럼, 공연 등급 역시 ‘현재’ ‘우리에게’ 적절한지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킬 앤 하이드>를 제작하는 오디컴퍼니 쪽도 “관람 등급에 관한 의견을 모니터링해 다음 시즌 때 적극적으로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잭 더 리퍼>를 만드는 엠뮤지컬컴퍼니 쪽도 “앞으로 어린 관객들이 많아진다면 (등급 조정 여부를) 고려해봐야 할 사항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