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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지콜론북

한글학교에서 유일하게 한글을 모르는 한국인

한글학교에서 유일하게 한글을 모르는

ⓒ fab

한글학교에서 유일하게 한글을 모르는

ⓒ 강병융 모스크바의 밤 / 모스크바는 밤도 정말 아름다워요.

모스크바에서 아빠는 학생이자 선생이었다. 주중에는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었고, 주말에는 모스크바 한글학교 교사였다. 아빠는 유학 기간 내내 모스크바 한글학교에서 러시아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엄마도 아빠와 함께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일종의 자원봉사를 했다.

 

9월 새 학기가 시작되면 모스크바 한글학교를 가득 채운 학생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열심히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다른 한편으로는 (나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한글학교는 확실히 아빠의 유학 생활의 활력과 같은 존재였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유치원생부터 환갑이 넘은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그저 한국이 좋다는 이유로,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일요일마다 학교를 찾았다. 심지어 국적까지 다양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사람들도 있었고 가끔은 중국이나 일본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배움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단순한 진리가, 배움에는 국경이 없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증명되는 장소였다.

 

아빠는 그 기분이 좋았다. ‘공부’라는 것도 좋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의지’가 참 멋졌다. 딸에게 그런 ‘멋’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빠가 살짝 딸에게 물었다.

아빠가 가는 한글학교에 같이 가보지 않을래? 너, 한국말을 잘하지만 아직 한글을 쓸 줄 모르잖아. 어린이반도 있거든. 러시아 친구들도 사귈 수 있고 좋잖아. 끝나면 초코파이도 준대.

딸은 아빠의 설득에 따라나섰다. 그리하여 가족 모두가 일요일엔 한글학교에 갔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 초코파이를 먹었다.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이 음으로, 양으로 한글학교를 도와주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는 교사로, 딸은 학생으로. 아빠는 한국이 아닌, 타국에서 가족 모두가 함께 같은 곳에서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 행복했다. 그리고 내심, 한글을 전혀 모르는 딸이 한글학교를 통해 (혹시나) 한글을 깨우칠 수 있진 않을까 기대도 ‘살짝’ 했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딸은 한국어 원어민이니까 쉬울 것이라는 착각에!)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아빠는 넌지시 딸에게 물었다.

태희야, 요즘 일요일에 다니는 한글학교 재미있니?

딸은 천진하게 아주 재미있다고 했다. 아빠는 (용기를 내서) 조금 더 깊게 물어봤다.

아, 그래? 뭐가 재미있어?

딸은 보여줄 게 있다면서, 공책 하나를 들고 왔다. 그리고 당당하고 자랑스러우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림 그리는 거!

아빠는 한글 공부만으로는 지루할 수 있으니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 그리기, 노래 부르기 같은 다른 활동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딸의 다음 얘기를 듣고 그것이 완벽한 착각임을 깨달았다.

이게 바로 내가 수업 시간에 그린 나뭇가지들이야! 예쁘지?

한글학교에서 유일하게 한글을 모르는

ⓒ fab

정말 딸의 공책에는 ‘나뭇가지’들이 그득했다. 딸은 그렇게 매주 일요일 교실에 앉아 ‘한글 쓰기’ 대신 ‘나뭇가지 그리기’를 했던 것이다. 딸의 눈에는 ㄱ, ㄴ, ㄷ, ㅏ, ㅑ, ㅓ, ㅕ가 나뭇가지였다. 그래서 선생님이 러시아 말로 설명해주는 한글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칠판에 잔뜩 그려진 나뭇가지들만 열심히 따라 그렸던 것이다. 그것도 수업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하고 ‘즐겁게’ 말이다.

 

당시 러시아어를 전혀 몰랐던 그리고 한글이 뭔지도 전혀 몰랐던 딸에게 러시아어로 진행되는 한글 교육은 어려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딸은 진정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딸은 꽤 진지한 아이였고, 자신이 러시아 어린이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아빠는 이렇게 생각했다. 한글도 좋고, 그림도 좋다. 딸만 즐겁다면야.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한글은 천천히 배워도 늦지 않아!

2008. 09

“딸아, 사람들은 “배움에는 때가 있다”고 말하지만,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배움에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싶을 때가 바로 진짜 ‘때’일거야.”

* 위 글은 책 『사랑해도 너무 사랑해』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저자 소개

강병융

1975년 서울 출생. 소설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교 아시아학과 교수

www.facebook.com/oddyong

 

강태희

2004년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세 살도 되기 전에 아빠가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서 엄마랑 외가에서 살았어요. 학교에 들어가기 전 '공동육아'를 했고, 다섯 살 때, 아빠와 살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어요. 그때는 러시아어를 꽤 잘했지만, 지금은 전혀 기억을 못 해요. 서울에 돌아와 한글도 제대로 모른 채,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학원도 다니지 않고 놀기만 했어요. 수학도 못했고, 영어는 더 못했어요. 3학년이 되어서 슬로베니아로 이사를 왔어요. 슬로베니아어를 한마디도 못했지만, 씩씩하게 지냈어요. 지금은 류블랴나에서 아빠, 엄마와 즐겁게 살고 있어요. 세계를 돌아다니며 행복하게 사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일러스트. Fab

그림 그리는 게 좋은 디자이너. I.Y.A.G.I x 팹

i_am_fa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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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콜론북은 예술과 문화, 일상의 소통을 꿈꾸며 사색적이고 유익한 책을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