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디자인 만화책 텃밭
Manga Farming / 2009 |
유년기를 떠올리면 그곳엔 항상 만화책이 있었다. 방 한구석에서 만화책을 쌓아놓고 좋아하는 과자 한 봉지만 있으면 가장 행복한 시간이고 최고의 휴식이었다. 시험만 끝나면 마치 보상이라도 받듯 만화책을 찾고, 밤새 울고 웃으며 수십 권씩이나 되는 만화책을 참 열심히도 봤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이젠 예전처럼 만화책을 끼고 살지는 않는다. 이제 만화도 컴퓨터로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문득 종이로 된 만화책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 그 만화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화려한 컬러와 3D, 4D까지 나온 세상이지만 흑백으로 된 소박한 만화책에서 얻는 묘한 흥취를 다시금 느끼고 싶다.
만화의 왕국, 일본의 예술가 가와치 고시河地貢士는 화분이 아닌 오래된 만화책을 텃밭으로 활용했다. 그는 낡은 만화책들을 모아 빨간무radish를 심어서 싹을 냈다. 혹시 베란다나 옥상에 텃밭을 만들 궁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독특한 화분을 눈여겨보자.
©Koshi Kawachi |
가와치 고시는 나고야에 있는 마츠자카야 백화점에서 전시를 하고 싹 틔우는 과정을 시연하기도 했다. 원리는 간단하다. 더 이상 보지 않는 만화책을 접시 위에 세워놓는다. 그 위에 원하는 종자를 뿌리고 물을 준다. 그런 다음 공기가 잘 통하고 햇볕 좋은 곳에 놓아둔다. 며칠 후 책장 사이로 솟아오른 싹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종자는 꼭 빨간무가 아니어도 되지만 메밀, 브로콜리, 바질, 로켓 등이 잘 큰다고 한다. 만화책 사이로 돋아난 바질이며 로켓을 뜯어 요리에 넣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이것이야말로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광경 아닌가! 이렇게 일상은 만화가 되고, 만화책은 일상의 사물이 된다.
©Koshi Kawachi |
초등학교 때 강낭콩을 심어 싹을 틔운 뒤 관찰일기를 쓴 것이 아마 내가 최초로 식물을 키운 경험일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작은 화분을 확인하곤 했다. 그러다 마침내 초록색 싹이 흙을 뚫고 올라왔을 때는 우주를 창조한 듯한 황홀감에 휩싸였다. 그런 설렘보다 싹이 난 감자를 보는 당혹감에 익숙해진 지금, 이 작품은 그때의 그 강낭콩을 떠올리게 한다. 하루를 마친 후 작은 화분에 물을 주고 말을 거는 것이 휴식이며 위로인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도 텃밭이 늘어나고 있다. 식물과 만화책의 결합은 최고의 힐링 아이템이 되지 않을까!
©Koshi Kawachi |
기후 현県 가지미 시市에서 태어나 나고야 예술대학 미술학부 디자인과를 졸업했다. 쿄를 거점으로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설치미술, 조각, 사진, 영상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일상 속의 이야기를 표현한다. 현대미술작가이자 아트디렉터, 책을 장정하는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www.koshikawachi.com
*위 내용은 책 『위로의 디자인 2』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글_ 조창원, 정리_ 김소영
저자 소개조창원
책을 쓰고 만드는 작가이자 에디터. 서강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런던커뮤니케이션대학에서 출판학을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는 『일상을 바꾸는 쓰레기들』, 옮긴 책으로는 『나의 플랫 슈즈 이야기』가 있다.
changwonj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