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불치병서 만성질환으로…“당뇨환자보다 건강관리 더 쉽다”
에이즈 환자 첫 공식 보고 40주년
“당장 죽는다는 걱정은 사라졌습니다. 잠들기 전에 약만 한 알씩 먹으면 됩니다. 치료제 덕분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습니다.”
11년째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를 앓고 있는 한 환자는 투병기에서 이렇게 밝혔다. 과거 에이즈는 원인도 모르고 치료제가 없는 데다 치사율도 높아 ‘20세기 흑사병’ ‘천형(天刑)’이라 불리던 공포의 대상이었다.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를 비롯해 숱한 유명인과 일반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하지만 첫 환자가 공식 보고된 지 40년을 맞은 지금은 과학계와 의료계, 편견에 맞선 환자들의 오랜 노력으로 당뇨,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 수준으로 관리가 가능해졌다.
1981년 에이즈 첫 확인… 원인은 미스터리
에이즈는 1981년 6월 5일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주간보고에서 처음 등장했다. 폐렴 증상을 보인 남성 5명이 면역세포에 손상을 입은 특이 사례가 발견됐으며 이 중 2명은 이미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미 CDC가 남성 동성애자 사이에 비슷한 사례가 더 있는 것을 확인했고, 뉴욕주와 캘리포니아주에서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이 보고됐다.
1980년대 에이즈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병이었다. 초창기 환자의 80%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에이즈를 유발하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는 성관계, 수혈로 몸속에 들어와 면역세포를 파괴시키는 바이러스다. HIV에 감염되더라도 증세를 느끼지 못하고 감염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다 감염 등 합병증과 함께 갑자기 발병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첫 환자 보고 이후 마지막 공식 통계가 나온 2019년 12월까지 전 세계 감염자는 7600만 명, 사망자는 3300만 명에 이른다.
한국에서는 1985년 첫 환자가 보고됐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이후 2019년까지 1만3857명이 HIV에 감염된 것으로 집계된다. 2013년 이후에는 해마다 1000명 안팎의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다. 주요 감염경로를 보면 성 접촉 감염이 가장 많은 95% 이상을 차지했다.
치명적인 질병의 등장에 과학계는 처음에는 허둥거렸다. 정체불명 질병의 원인 바이러스를 발견하는 데만 2년이 걸렸다. 1983년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팀이 HIV가 에이즈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보고했다. 하지만 HIV의 기원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원숭이에서 발견되는 원숭이면역결핍바이러스(SIV)에서 1930년대에 분리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치료제 47종 나와…백신 개발도 진행
첫 에이즈 치료제는 한국에서 첫 환자가 보고된 뒤 2년 후인 1987년 공개됐다. HIV 증식을 억제해 질병의 진행을 늦추는 효과가 있는 항레트로바이러스제인 ‘지도부딘’이다.
HIV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같은 리보핵산(RNA) 바이러스의 한 유형인 레트로바이러스다. 숙주세포인 면역세포에 들어간 바이러스가 RNA의 유전정보를 DNA로 전달하는 역전사 과정을 거쳐 숙주의 DNA에 들어가 증식한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돌연변이로 면역 기능을 상실한다. 지도부딘은 바이러스의 RNA가 DNA로 역전사하는 과정을 억제해 바이러스의 증식을 막는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따르면 현재까지 공식 승인을 받은 에이즈 치료제는 47종에 이른다. 치료제가 발전을 거듭하면서 메스꺼움과 설사, 두통 같은 부작용도 줄었다. 환자들은 이제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입을 모은다. 전문가들은 한때 치명률이 80%에 달하던 에이즈가 이제는 치료제만 있으면 6개월 안에 통제할 수 있는 질병이 됐다고 설명한다. 에이즈 전문가인 제롬 김 국제백신연구소(IVI) 사무총장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몇몇 국가의 노력으로 에이즈 치료제 개발에 수십억 달러가 투입됐다”고 말했다. 30년간 국내 에이즈 환자 62명을 추적해온 조영걸 서울아산병원 미생물학교실 교수는 “치료제가 개발된 덕분에 당뇨 환자보다 에이즈 환자들이 건강을 관리하기가 더 용이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나온 치료제들로는 완치가 어렵다. 지난해 8월 미국의 면역치료 전문기관인 라곤연구소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치료제를 통해 에이즈가 완치된 사람이 3명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과학계는 에이즈를 극복할 궁극의 치료제 개발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올해 2월 미국 워싱턴대 의대 연구팀은 숙주세포에 숨어 있는 HIV를 잡아내는 방법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에이즈를 예방할 백신 개발도 진행 중이다. 그간 진행된 임상이 완료된 경우는 6건에 그친다. 조 교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HIV는 ‘움직이는 목표’로 불린다”며 “코로나 바이러스보다도 변이가 많다보니 치료제 개발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치료제가 고소득 국가에서만 주로 사용되고 환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여전하다는 점은 극복할 과제라고 지적한다. 김 사무총장은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다”며 “코로나19 이후 관심이 줄었는데 에이즈 퇴치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jawon121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