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모델로 10kg 감량→농구 감독…‘농구여제’ 박찬숙의 무한도전
지난해 시니어 모델로 활동할 당시의 박찬숙 감독의 모습. 박 감독은 올해 서대문구청 지휘봉을 잡으며 코트로 돌아왔다. 박찬숙 감독 제공 |
한국 여자 농구에서 가장 눈부신 시절은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LA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대표팀은 한 수 위로 평가받던 캐나다와 유고슬라비아, 호주를 차례대로 꺾었다. 그리고 준결승에서 중공(현 중국)과 만났다. 전력상 한국은 중공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국은 올림픽 전에 열린 프레올림픽에서 장신 센터가 즐비한 중공에 더블 스코어에 가까운 37-72로 패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한국 수비진이 중공의 공격을 철저히 봉쇄하며 앞서나간 것이다. 한국 선수들이 던진 슛은 속속 림을 통과했다. 69-56의 완승. 경기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조승연 한국 대표팀 감독은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국 농구 역사상 첫 올림픽 메달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박찬숙 서대문구청 감독이 올해 3월 창단식에서 깃발을 흔들고 있다. 서대문구청 제공 |
기적 같은 은메달의 주역은 여자 농구의 레전드 박찬숙 서대문구청 감독(64)이었다. 사실 박 감독은 올림픽이 열리기 전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올림픽 한 해 전인 1983년 무릎 부상으로 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올림픽 예선에서도 제대로 뛰지 못했고, 한국은 예선전에서 6위까지 밀며 자력으로 출전권을 따내지 못했다.
하지만 하늘은 한국의 기적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올림픽 예선 4, 5위 팀인 헝가리와 쿠바가 불참을 선언하며 한국이 막차로 올림픽 본선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박 감독도 마지막 순간 대표팀에 복귀하기로 했다. 그는 “주변에선 ‘어차피 꼴찌인데 거길 왜 가나’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수들이 모두 죽기 살기로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정작 올림픽 본선 무대에 서니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내 실력의 120%를 발휘한 것 같다”고 했다.
박찬숙 감독을 비롯한 한국 선수들이 1984년 LA 올림픽 중공전에서 승리한 뒤 두 팔을 벌려 환호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
박찬숙 감독의 숭의여중 시절의 모습. 1974년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힌 그는 이듬해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동아일보 DB |
1975년 숭의여고 1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가 된 박 감독은 그렇게 태극마크를 단 지 10년째에 한국 농구 역사에 새 페이지를 썼다.
이후에도 그의 농구 인생은 계속 이어졌다.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1985년 은퇴했지만 1988년 대만으로 진출해 선수 겸 플레잉코치로 뛰었다. 대만에서 뛸 때 그는 ‘최초의 주부선수’라는 수식어를 추가했다. 그는 1992년 다시 국내 무대로 복귀한 뒤 1994년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그는 친정팀 태평양 코치와 국가대표 감독,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경기운영본부장과 육성본부장 등을 거치며 농구와의 인연을 이어왔다.
선수, 지도자, 행정가로 승승장구해온 그이지만 단 하나 못 이룬 꿈이 있다. 바로 프로 팀 감독이다.
그는 여러 번 감독 공채에 도전했다. 하지만 번번이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 한 번은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으나 구단주는 같은 학교를 나온 남자 지도자를 선택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도 제출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 ‘여자가 감히~’라는 시선이 있었던 것 같다. 나뿐 아니라 여자 후배들을 위해서 내가 싸워야 했다”고 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최근에는 WKBL에서도 여자 지도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옥자 감독이 2012년 처음 KDB생명 감독을 맡았고, 유영주 감독이 2019년 BNK썸의 지휘봉을 잡았다. 2021년부터는 박정은 감독이 BNK썸을 지휘하고 있다.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는 전주원 우리은행 코치가 여자농구 최초의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소련과의 경기에서 뛰고 있는 박찬숙 감독. 동아일보 DB |
그리고 박 감독 역시 올해 코트로 돌아왔다. 3월 창단한 실업농구 서대문구청의 창단 감독으로 부임한 것이다.
창단 첫해부터 서대문구청은 침체 됐던 한국 여자 농구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전국종별선수권대회에서 창단 첫 승을 거둔 뒤 지난 달 열린 평가전에서는 서울시농구협회를 95-56으로 대파하고 서울 대표로 10월 열리는 전국체전에 출전하게 됐다.
전국체전을 앞두고 청주에서 전지훈련에 한창인 박 감독은 “창단 후 첫 경기에서 20점 이상 졌던 우리 팀이 ‘원 팀’으로 똘똘 뭉쳐 이젠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팀이 됐다”며 “내달 전국체전에서도 서대문구청의 패기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팀을 맡아보겠다는 오랜 꿈이 현실이 돼 너무 행복하다. 프로에 가지 못한 선수들이 모였지만 이 팀을 잘 만들어보고 싶다. 선수들도 훌륭하게 키워 프로에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열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한다. 오전에는 서대문구 북아현문화체육센터에서 체력 훈련을 위주로 하고, 오후에는 서대문문화체육센터로 장소를 옮겨 기술 훈련을 한다. 선수들을 지도할 때나 경기를 할 때 그는 의자에 앉는 법이 없다.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함께 뛰며 선수들과 호흡한다. 그는 “경기를 마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다. 선수들이 ‘감독님이 경기 뛰신 것 같아요’라고 말하곤 한다”며 웃었다. 그는 “내 나이가 적지 않다. 하지만 믿고 불러주신 구단주(이성헌 서대문구청장)와 구민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빅찬숙 감독은 요즘도 선수들과 함께 뛰며 선수들을 지도한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어린 선수들과 함께 뛰기 위해선 체력이 필수다. 40년 전 수술을 받았던 무릎 부위는 특히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그는 “연골이 닳아 없어져 오래 서 있거나 하면 무릎이 붓고 쑤신다”며 “무릎 주변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 선수들이 운동할 때 나도 옆에서 함께 운동을 한다”며 “특히 몸무게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 살이 찌면 무릎에 훨씬 무리가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전히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는 그는 스쾃과 윗몸일으키기도 빼놓지 않고 한다.
유산소 운동은 뛰기 대신 걷기와 가벼운 산행으로 한다. 쉬는 날 그는 서울 남산 둘레길을 자주 걷는다. 서울 청계산 등 낮은 산을 오르는 것도 좋아한다. 그는 “예전엔 높은 산도 많이 올랐다. 그런데 올라갈 때 좋은데 내려올 때 무릎에 무리가 가는 것 같아 요즘에는 낮은 산을 오르는 편”이라고 했다.
서대문구청을 맡기 전인 지난해엔 10kg을 감량한 적도 있다. 축구선수를 거쳐 모델로 활동했던 아들 서수원의 권유로 시니어 모델에 도전하면서다.
약 1년 동안 하루 3시간씩 모델이 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워밍업과 스트레칭을 하고, 댄스로 가볍게 몸을 푼 뒤, 모델 워킹을 하는 게 순서였다. 그는 “모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달았다. 워킹 자체만으로도 땀이 많이 났다. 동시에 자세가 교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시니어 모델로 두 번 런웨이(무대)에 올랐다. 그는 “처음 취미로 시작했던 모델 활동을 통해 몸과 마음에 큰 변화가 오는 게 신기했다.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었다”고 했다.
박찬숙 감독(가운데)이 시니어 모델 시절 딸 서효명(오른쪽), 아들 서수원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박찬숙 감독 제공 |
바쁜 생활 속에서도 그는 항상 가족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산다. 그는 “10여년 전 남편과 사별했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딸(서효명)과 아들(서수원)이 잘 채워줬다. 나도 아빠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더 노력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탤런트로 활동하고 있는 딸 서효명은 이달 초 일반인 남성과 결혼했다. 축구선수를 거쳐 모델로 활동했던 서수원은 한 모델 에이전시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그는 “내가 주중에는 숙소 생활을 해 주말에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함께 하곤 했다. 이제 효명이가 결혼을 해 아들과 둘이 살게 됐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도 더 열심히 살아가려고 한다. 늦게나마 내가 단일 농구팀 감독의 꿈을 이루지 않았나. 앞으로도 한국 농구 발전과 후배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내가면서 살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지금처럼 건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