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웠던 ‘그날’의 기억, 지울 수 있을까
국내팀, 뇌속 공포 대사 효소 발견…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치료에 활용
2017년 11월 경북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아파트 건물에 균열이 가자 주민들이 대피하고 있다. 지진의 공포는 당시 환경 등 주변 정보와 결합해 이후 공포증이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유발한다. 동아일보DB |
‘높은 곳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은 동료를 목격한 주인공이 심한 충격을 받는다. 이후 주인공은 심각한 고소공포증을 앓아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현기증’ 속 주인공은 무서운 기억(동료의 죽음)과 특정한 자극(높은 곳)이 결합한 공포증을 앓는다. 그래서 생명의 위협이 없는 안전한 지역이라도 일단 높은 곳이라면 공포를 느낀다. 외상후스트레스 장애(PTSD)도 비슷하다. 포항 지진을 겪은 주민은 건물 안에만 있어도 건물이 흔들리던 ‘그날’의 공포를 느낀다.
이렇게 공포증이나 PTSD는 뇌에 특정 자극과 함께 공포가 기억돼 일어난다. 최근 이런 뇌 속 공포 기억을 억제시켜 PTSD나 공포증을 치료하려는 시도가 성과를 내고 있다. 박진아 KAIST 생명과학과 연구원과 김세윤 교수팀은 뇌에서 특정 효소를 제거하면 공포 기억을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동물실험으로 밝혀 ‘미국국립과학원회보’ 1월 28일자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뇌의 흥분성 신경세포에서 만들어지는 ‘이노시톨 대사 효소’에 주목했다. 이노시톨은 음식물을 통해 공급받는 영양성분이다. 이노시톨 대사 효소는 이노시톨을 뇌 활성을 조절하는 물질로 바꾸는 데 관여하는 효소다.
연구팀은 뇌 속에 있는 흥분성 신경세포(뉴런)에서 이노시톨 대사 효소를 만들지 않는 유전자 변형 쥐를 만들어 두 가지 실험을 했다. 먼저 강한 소리와 함께 전기자극을 주는 ‘공포 자극’ 실험을 했다. 실험 뒤에 쥐는 소리만 들어도 전기 충격의 공포를 떠올리며 바싹 얼어붙는 자세를 취했다. 이어 연구팀은 같은 쥐를 대상으로 전기 자극 없이 소리만 들려주는 실험을 추가로 반복 실행했다. “소리가 나도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다”는 새로운 학습을 시키는 것이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PTSD 치료에서도 쓰는 방법으로, 예를 들어 “비행기 소리가 나도 전쟁이 아니니 괜찮다”고 반복 학습시켜 전쟁 PTSD를 치료하는 식이다. 원래 이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이노시톨 대사 효소를 만들지 않는 유전자 변형 쥐는 이런 ‘공포 소거’ 학습이 훨씬 빨랐다.
김 교수는 “공포 기억을 없애는 과정은 아직 거의 밝혀지지 않았고 일부 발견된 기억 조절 요인도 학습 능력을 함께 조절하는 경우가 많아 약으로 개발하기 어려웠다”며 “이노시톨 대사 효소는 학습 능력을 조절하지 않고 기억만 제거해 공포 치료 신약을 개발하기 위한 좋은 타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