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가 조훈현을 이기고 ‘건넨 말’, 영화 [승부]의 실제 이야기
열다섯 제자가 스승을 꺾고 건넨 말, “선생님, 죄송합니다.” 영화 [승부]의 실제 이야기, 조훈현과 이창호 사제지간의 치열했던 반상 위 인생사를 정리했습니다.
이 달 26일 개봉을 앞둔 영화 [승부]는 한국 바둑계의 거장 조훈현과 그의 천재 제자 이창호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을 그린다. 열다섯에 스승을 이긴 이창호의 첫 마디와 그 심경은 무엇이었을까?
19줄 바둑판 위에서 펼쳐진 그들의 실제 삶을 이해한다면, 승부 속 치열한 서사를 한 수 앞선 안목으로 읽어낼 수 있다.
![]() 조훈현 ⓒwikipedia |
최연소 바둑 프로 기사
반상(盤上) 위의 전설 조훈현
1953년 3월 10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조훈현은 어린 시절부터 목포와 영암 일대에서 '바둑 신동'이라 불릴 만큼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지만 그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 조규상은 1958년 겨울, 아들의 바둑 공부를 위해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는 결단을 내렸다. 조훈현은 당시 한국 바둑계의 일인자였던 조남철 국수를 만나 본격적인 지도를 받게 되었다.
조남철 국수는 어린 조훈현의 재능을 알아보고 "이 아이는 내가 죽는 날까지 데리고 있겠네"라고 말하며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상경 3년 후, 조훈현은 9세의 나이로 입단대회를 통과해 프로기사가 되었다. 일본을 포함해 전무후무한 세계 최연소 기록으로 당시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다. 어린 조훈현은 입단대회 도중에 자주 사라져 그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날렵한 몸매와 빠르게 몰아치는 바둑 스타일 때문에 ‘제비’로 불렸다.
![]() ⓒ네이버 영화 [승부] 스틸컷 |
제비, 돈에 눈이 멀어 추락하다
‘내기 바둑’ 파문 사건
1960년대 중반, 조훈현은 근대 바둑의 개척자라 불리는 '세고에 겐사쿠' 9단의 문하생이 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세고에는 바둑계에서 엄격한 수도승과 같은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던 중 조훈현은 자유분방한 성격의 '슈코 후지사와'의 권유로 내기 바둑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당시 2단이었던 그는 자신보다 훨씬 선배인 '아베 요시테루' 6단을 상대로 무려 여섯 판을 내리 이겨 600엔을 따냈다. 그런데 패배한 아베는 오히려 "세고에 선생의 내제자에게 여섯 판이나 졌어. 정말 무서운 녀석이야!"라며 자랑스럽게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식이 결국 세고에 스승의 귀에 들어갔고, 그는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당장 보따리를 싸서 일본을 떠나라"는 파문 명령이었다. 도장에서 쫓겨난 조훈현은 방황하며 한국 교민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설거지와 청소를 하며 힘겹게 생활했다.
약 2주 후, 조훈현은 결국 눈물로 스승에게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고, 세고에는 그를 다시 받아들였다. 천재성만으로는 진정한 대가가 될 수 없다는 세고에의 가르침은 영화 [승부]에서도 조훈현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 ⓒwikipedia |
호랑이 새끼를 집에 들이다
어색한 동거의 시작
1984년, 9살 소년 이창호와 31살의 '바둑 황제' 조훈현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당시 조훈현은 이미 한국 최초의 9단이자 국내 기전 전관왕을 3회(1980년, 1982년, 1986년) 달성한 절대 강자였다.
그는 전주에서 이창호와 시험기를 치른 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 정반대 성향의 싹"이라고 말하며 이창호를 내제자로 정했다. 주변에서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 아니냐?"라고 놀리자, 조훈현은 "그래도 제자에게 지면 행복한 것이지", "10년은 걸릴 것 아닌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조훈현은 어린 이창호를 집에서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새로 이사까지 감행했다. 과거 자신이 일본 스승에게 받은 은혜를 돌려주는 것이었다. 조훈현은 이창호에게서 전형적인 천재형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과묵했고, 속이 답답해 죽을 정도로 말이 없었다"는 이창호지만, 입단 무렵 조훈현은 "묘한 바둑이야. 계산이 아주 뛰어나거든. 어쩌면 마무리는 나보다 강한지도 몰라"라고 그의 특별한 재능을 인정했다.
![]() ⓒ네이버 영화 [승부] 스틸컷 |
청출어람(靑出於藍), 교학상장(敎學相長)
감사와 미안함의 인사
1990년 2월 3일, 열다섯 살의 이창호가 제29기 최고위전에서 아슬아슬한 반집 차이로 스승을 꺾고 첫 타이틀을 따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선생님, 죄송합니다"였다. 조훈현이 예상한 "최소 10년은 걸릴 것"이라는 시간보다 훨씬 빠른 5년 만의 역전이었다.
그 다음부터 대국 후 패배한 스승은 지친 걸음으로 집에 돌아오고, 승리한 제자는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뒤를 따르는 풍경이 계속되었다. 조훈현의 아내 정미화씨는 남편의 패배를 위로해야 할지, 제자의 승리를 축하해야 할지 난감한 처지에 자주 놓였다고 한다.
![]() ⓒ네이버 영화 [승부] 포스터 |
경쟁자이자 동반자
69번의 타이틀 매치, 멈추지 않는 초읽기
이창호는 중학교 졸업 이후 독립한 뒤에도 조훈현과 지속적으로 깊은 인연을 유지하며 한국 바둑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스승과 제자는 때로는 동반자로, 때로는 경쟁자로서 1988년부터 2003년까지 무려 69번의 타이틀 매치를 벌였다.
이는 세계 바둑 역사에서도 유례없는 사제 간 경쟁이었다. 현재 이창호는 통산 승률 70% 이상의 뛰어난 성적으로 한국 바둑계의 전설로 남아 있으며, 2025년 3월 기준 현역 기사로 활동 중이다. 최근에도 시니어 최강자전 등 여러 대회에 출전했다. 조훈현 역시 한국 바둑계의 원로로서 후배 양성과 바둑 보급에 힘쓰고 있다.
3월 7일 영화 [승부] 제작보고회에서 극중 조훈현 역을 맡은 이병헌은 "이야기가 드라마틱한 힘을 가지고 있다. 바둑을 전혀 몰라도 흥미롭게 몰입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바둑계의 두 거장의 이야기를 높이 평가했다.
영화 [승부]에서 주목할 점도 바로 사제 간, 반상 위 흑돌과 백돌처럼 얽힌 미묘한 감정선에 있다. 바둑이라는 키워드로 채워지는 두 인물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오는 3월 26일부터 전국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김진우 에디터 tmdrns1111@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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