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클래식 컬렉션
세대를 풍미한 작가이자 클래식 애호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두 번째 클래식 컬렉션 리스트를 선보였다. 그의 컬렉션을 소개하는 겸 나름 클래식 애호가라 자칭하는 에디터가 그의 수많은 컬렉션 중 몇 가지를 꼽아 음미했다.
ⓒ unsplash |
J. S.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988
피터 제르킨(Pf) Vic. LSC 2851 (1964년) |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바흐의 대표곡 중 하나이자 글렌 굴드의 명성을 알리는 계기가 된 음악이다. 글렌 굴드는 ‘바흐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대가 피아니스트로,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1955년과 1982년에 걸쳐 두 번 발매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골드베르크’에서 글렌 굴드의 신반과 구반을 꺼내오지 않으면 얘기가 시작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아마 클래식 애호가 중에선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두 음반 모두 훌륭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1955년도 구반을 선택했다. 그는 글렌 굴드의 음반을 포함해 여섯 음반을 꼽았다. 그중 피터 제르킨(Peter Serkin)의 음반에 대해 “그의 ‘골드베르크’를 듣고 있으면 젊은 심장의 고동이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라고 말했다.
‘가장 많이 듣는 클래식’을 물으면 주저 없이 이 곡을 꼽겠다. 바흐 특유의 명료한 음악 스타일을 좋아한다. 이 곡을 들으면 어쩐지 차분해져 집중해 일해야 할 때마다 듣는다. 평소 이 곡을 들을 땐 너무나 당연하게도 글렌 굴드의 음반을 꺼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컬렉션을 보고 피터 제르킨의 음반을 처음 들었다. 피터 제르킨의 음반은 글렌 굴드 특유의 강박에 가까운 연주에 비해 유려하고 자유롭다. 음반을 듣다 보면 ‘젊은 심장의 고동’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쇼팽 전주곡 작품 번호 28
블라디미르 펠츠만(Pf) Col. M-39966 (1984년) |
쇼팽이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모델로 모든 조성을 사용해 작곡한 스물네 곡의 전주곡이다. 각각의 곡을 따로 녹음하지 않고 전곡을 함께 녹음해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총 11가지 음반을 소개했는데,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리뷰는 블라디미르 펠츠만의 음반이다. 그는 소련 피아니스트로, 당국의 이데올로기와 정부의 예술억압정책에 반감을 표해 국외 출국과 연주 활동을 금지 당하는 바람에 8년간 음반을 녹음하지 못했다. 블라디미르 펠츠만의 쇼팽 전주곡은 이 가운데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녹음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음반에 대해 “여러 해 쌓인 울분을 해소하려는 듯 힘 있고 출중한 연주다. 거의 완벽하다고 말해도 무방하다”라고 극찬했다.
EDITOR’S COMMENT
낭만주의 시대 음악은 피아노곡보다 교향곡을 더 자주 찾는 편이다. 아주 가끔, 낭만주의 피아노곡이 듣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때 가장 먼저 찾는 작곡가가 쇼팽이다. 자주 찾지 않는 탓에, 검색하기 쉽다는 이유로 조성진의 연주를 자주 듣곤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코멘트가 흥미로워 블라디미르 펠츠만의 음반을 들었다. 막연히 ‘쇼팽’ 하면 떠오르는 부드러움이 아니라 꽤 강렬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블라디미르 펠츠만의 스토리를 생각하며 들으면 더욱 흥미로울 것.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F단조 작품 번호 36
이고리 마르케비치 지휘,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1964년) |
교향곡 4번, 5번, 6번은 ‘차이콥스키의 후기 3대 교향곡’이라 불린다. 그만큼 명성도 높아 세계적으로 자주 연주된다. 러시아 음악은 유독 그들만의 정서가 있는 것처럼 이와 잘 어울리는 음악가들이 있다. 또 이들 중 대다수는 러시아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개한 다섯 컬렉션에 러시아 지휘자가 없다는 것은 무척 의아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들 음반이 각각의 매력이 있다고 소개했다. 특히 이고리 마르케비치가 지휘한 음반을 소개하며 “차이콥스키 특유의 ‘축축함’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힘 있게 때려 박는 망치 같다”라고 표현했다.
EDITOR’S COMMENT
빠르거나 규모가 큰 교향곡을 들을 때 대체로 공격적이고 강한 연주를 찾아 듣는다. ‘뽕맛(?)’을 즐기는 개인적인 취향 탓이다. 혹시 취향에 공감한다면, 교향곡 음반 선택 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추천한다. 파워풀한 연주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평을 보고 이고리 마르케비치 지휘 음반을 골라 들었다. 도입부부터 금관악기의 찢어지는 듯한 웅장한 사운드가 마음에 든다. 탄탄한 금관악기와 쫀쫀하고 단호한 현악기의 조화가 매력적이다.
바그너 ‘발퀴레의 기행’
한스 크나페르츠부슈 지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1954년) |
바그너의 악극(musikdrama) <니벨룽겐의 반지>는 바그너가 무려 28년에 걸쳐 작곡한 필생의 역작이자, 바그너 악극 중 최고로 꼽는 작품이다. ‘발퀴레의 기행’은 <니벨룽겐의 반지> 2부 ‘발퀴레’ 중 3막의 전주곡이다. 특유의 웅장한 곡조로 여러 매체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곡명 자체는 생소할 수 있으나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본 곡이라는 사실을 도입부만 들어도 알게 된다. 한스 크나페르츠부슈는 바그너와 부르크너 음악의 대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스 크나페르츠부슈는 바그너를 지휘하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라고 평했다.
EDITOR’S COMMENT
바그너 음악은 어쩐지 다른 영역의, 다른 분야의 예술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독 진입장벽이 높다. 오페라 전체를 감상할 엄두는 못 내지만 그중 유명한 몇몇 곡은 꽤 즐겨 듣는 편이다. ‘발퀴레의 기행’이 대표적이다. 한스 크나페르츠부슈의 음반은 음 하나하나가 묵직하다. ‘말을 타고 전장을 달리는 모습’을 표현했다지만 특유의 웅장함으로 어쩐지 지금은 최첨단 탱크가 무더기로 돌진해야만 할 것 같은 인상이다.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C단조
브루노 발터 지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1957/1958년) |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교향곡 작곡가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은 그의 교향곡 중 가장 오랫동안 작곡한 곡이다. 말러의 곡은 오케스트라 편성과 연주 시간 등 특유의 맥시멀리즘으로 호불호가 갈린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섯 컬렉션을 소개했다. 컬렉션에는 말러와 직접적으로 인연이 깊은 오토 클렘페러의 음반과 브루노 발터의 신구 음반이 담겼다. 두 지휘자 모두 20세기 거장 지휘자이면서 말러의 후배다. 두 지휘자의 음반은 나치 정권을 피해 망명 생활을 하다 빈으로 돌아와 녹음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두 지휘자의 상황에 공감하며 그들이 전하는 벅찬 감동을 높이 사는 듯하다.
EDITOR’S COMMENT
지인의 추천으로 <부활> 피날레를 처음 접했던 때가 기억난다. 그 무지막지한 규모에서 나오는 희열이 생생한데, 마치 머리채를 붙들려 하늘로 승천하는 기분이었다. 사이먼 레틀 특유의 광기어린 지휘가 좋아서 평소엔 그의 음반을 주로 듣는다. 하루키의 컬렉션에선 브루노 발터의 신구 음반을 모두 들었다. 각자의 매력이 있는데, 그래도 녹음이 깨끗한 뉴욕 필 음원에 손이 더 가더라.
프로코피예프 피아노협주곡 3번 C장조 작품번호 26
바이런 야니스 피아노, 키릴 콘드라신 지휘,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1962년) |
1921년 시카고에서 초연되며 호평받은 곡으로, 프로코피예프의 협주곡 중 가장 자주 연주된다. 이 곡은 강렬하고 역동적인 리듬, 명료한 선율과 복잡한 화성이 매력이다.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유머와 예리함을 잘 느낄 수 있는 곡으로, 클래식 입문자도 꽤나 즐겁게 들을 수 있다. 하루키는 5가지의 컬렉션을 소개했다. 바이런 야니스 음반은 머큐리 레코드(Mercury Records)가 자랑하는 녹음 자재를 모스크바까지 가져가서 현지 스테레오 녹음으로 진행했다. 그 덕분인지 음반에는 맑고 선명한 선율이 고스란히 담겼다.
EDITOR’S COMMENT
협주곡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꽤나 즐겨 듣는 곡. 하루키의 컬렉션에선 바이런 야니스의 연주를 골라 들었다. 평소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베를린 필)즐겨 듣는 편이라 두 연주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바이런 야니스 음반은 음악에서 비교적 건조한 질감이 느껴진다. 각각의 음이 독립적이고 톡 쏘는 듯한 연주로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예리함을 잘 표현한 듯하다.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 2
무라카미 하루키, 홍은주 옮김, 문학동네
486장의 클래식 레코드와 100여 곡의 클래식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의 후속작. ‘이 레코드는 평생 품고 살아야지’ 하고 다짐한 명반부터 ‘이런 게 왜 우리집에 있을까’ 하는 의문의 음반까지 한층 다채로운 플레이리스트를 알차게 담아냈다.
정지환 에디터 stop@mcircle.biz
저작권자 © 덴 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