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조앤 롤링? 삼성전자 관두고 쓴 첫 소설로 베스트셀러 1위
[아무튼, 주말]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작가
지난 19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이미예 작가는 가벼운 배낭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30만부 판매 소감을 묻자 "'다시 안 올 날들일 수 있으니 최대한 기분 좋게 지내자'고 생각하고 있다. 일상생활은 여전히 똑같다"며 웃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소설 쓰기를 따로 배운 적 없고, 필사도 안 해 봤다. 대신 10년 넘게 간직해 온 소재를 출퇴근길에 갈고 닦았다. 만화책부터 드라마 대본집까지 재밌는 작품은 가리지 않고 ‘재미 요인’을 분석해 노트에 기록했다. 그렇게 쓴 노트가 20여 권. 소설 부문 18주 연속 1위이자, 2020년 연말부터 최근까지 3주째 종합 베스트셀러 1위(교보문고 기준)를 지키고 있는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31) 작가 얘기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잠들어야 들어갈 수 있는 꿈 백화점이 있으며, 우리가 꾸는 꿈은 사실 이곳에서 만들어 사고판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판타지 소설. 신춘문예나 공모전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 신예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 등 대작가의 공세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더니, 주식 활황 속에 쏟아지는 경제 서적의 역습도 막아냈다. 작년 7월 출간 이후 팔린 책이 30만부 이상. 290쇄를 찍었다. 19일 이 작가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삼성 그만두고 독립 출판 하다
–판타지라는 점과, 무명에서 단박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는 점 때문에 ‘해리포터’를 쓴 조앤 롤링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그게 너무 싫었다. 해리포터 진짜 좋아하는데···. 그분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웃음).”
–인기를 실감하나.
“언니와 같이 부산 서면에 있는 교보문고에 갔는데, 여러 명이 내 책을 사 가더라. 우리 언니가 좀 호들갑스러운 편이라 ‘사인이라도 해드려라’ 했는데, 책 안 산다고 하실까 봐 못했다(웃음). 가끔 동네 서점에 나가서 가만히 있다 오기도 한다. 내 책이 진열돼 있는 걸 보면 신기하다.”
–‘텀블벅’으로 데뷔했다. 신춘문예나 공모전을 통해 등단하는 종전 소설가의 데뷔 문법과 다르다.
“회사 그만두고 ‘6주 만에 책 만들기’라는 독립 출판 강좌를 들었다. 원래는 나 혼자 책 만들어서 가지고 있으려고 했는데, 강사분이 텀블벅을 통한 출판을 권유했다. 책을 나만 가지고 있는 것도 좋지만, 돈 주고 산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아는 것도 좋다면서. "
텀블벅은 한국에서 가장 활성화된 크라우드 펀딩(웹이나 모바일 네트워크를 통해 여러 개인에게 자금을 모으는 행위) 사이트다. 이 작가는 2019년 9월 텀블벅에 출판 계획을 써서 올렸다. 목표 금액인 100만원보다 18배 많은 1800만원이 모였다.
–왜 그렇게 소설을 쓰고 싶었나?
“재밌는 소설 다 안 읽고 조금 남겨 두면 나머지 읽을 생각에 온종일 기분 좋지 않은가. 좋아하는 책 속편 나오는 날엔 어떤 일을 해도 힘이 난다. 읽는 사람만 해도 그런데 직접 쓰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부러웠다.”
이미예 작가가 쓴 책 '달러구트 꿈 백화점'. /팩토리나인 |
–꿈 백화점을 소재로 삼은 계기가 있나.
“꿈은 매일 꾸는 건데 아무도 아는 바가 없다. 신기하다고 하면서도 이상하게 무관심하다. 어릴 때는 뭔가 꿈에 얽힌 비밀이 있는데 다들 나만 빼놓고 쉬쉬한다고 생각했다. 이 비밀에 대해 쓰고 싶었다. 수능 치고 나서부터 내 첫 소설의 소재는 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 ‘인셉션’ 이 나오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잠’도 나오고(웃음)···. ‘계속 미루면 누군가 써 버리겠구나’ 하는 초조한 생각에 얼른 쓰기 시작했다. 속도가 느려서 회사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전세 자금 대출 빌린 게 있어서 참았다. 그거 다 갚는 날 그만뒀다.”
이 작가는 부산대 재료공학과를 나와 삼성전자 엔지니어로 입사해 반도체 생산 설비 관리를 담당했다.
–그만둔 회사가 삼성전자다.
“그때는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퇴사하기 전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이 많은데, ‘지금이라도 다시 다닌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단 한 번도 안 들었다. 그만두고 나니까 그제야 ‘다니면서 할걸’ 후회했다.”
–그만둔다고 할 때 부모님 반응은 어땠나?
“말 안 하고 그만둔 거라서(웃음)···. ‘아휴, 쟤가 왜 저러나’ 이런 정도? 오히려 남자 친구한테 미안했다. 결혼 승낙받으러 갈 때 비전 있는 사람으로 보이면 좋겠는데, 거기서 내 꿈이 뭐고 그런 걸 구구절절 말할 수도 없고. 왜, 사족이 길면 못난 사람 같지 않은가.”
이 작가는 지난해 9월 결혼했다. 결혼식 당일 교보문고에서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소설 부문 판매 1위에 올랐다.
–인세는 많이 받았나.
“계약할 때 1월 말과 7월 말에 인세를 받기로 했다. 종이책이 작년 7월에 나와서 오는 1월 말이 되면 첫 인세를 받는다. 그래서 더 실감이 안 나는 것 같다. 인세 받으면 결혼할 때 산 아파트 대출금부터 갚고 싶다(웃음).”
이미예 작가는 최근 ‘달러구트 꿈 백화점’ 2편을 준비 중이다. “첫 편이 꿈을 자주 사러오는 사람, 꿈꾸는 걸 즐기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2편은 꿈을 안 꾸고 싶어하는 사람 이야기”라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웹 소설 조회 수 굴욕에 창업 외도도
–이렇게 잘될 걸 예상했나.
“전혀. 처음에는 ‘문피아’에 웹 소설을 연재했다. 10여 편 올렸는데 가장 많은 조회 수가 ’15′였다. 댓글도 없었다. 안되겠다 싶어 3D 프린터를 구입해, 쿠키 틀을 만들어 온라인에서 파는 사업을 내 오피스텔에서 시작했다. 텀블벅 펀딩은 책 만들어 내 책장에라도 꽂으려고 했다.”
–독자들 반응이 좋았다.
“텀블벅에 구매자와 판매자가 소통할 수 있는 게시판이 있다. 보통은 배송이 잘못됐거나, 책 귀퉁이가 찢어졌을 때 사용하는데, 책을 받은 사람들이 여기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후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기억 나는 게, 고등학생 독자가 학교에 책을 가져갔다가 쉬는 시간 오기만을 기다리며 읽었다는 거다. 책 읽기를 안 좋아하는데, 페이지 줄어드는 게 아쉬워서 아껴가며 읽었다고 했다. 이 후기를 읽고 울었다. 돈 주고 내 책을 사서 본 사람의 첫 반응이었다.”
–기성 출판사(팩토리나인)에서 다시 책을 출간했다. 종이책 아닌 전자책으로.
“좋게 봐주셨다는 리뷰가 많아지니까 정식 출판을 안 한 게 아쉽더라. 다시 책을 내보고자 여러 출판사에 투고했는데, 팩토리나인에서 연락이 왔다.”
팩토리나인 김명래 편집자는 “소설은 문단에 데뷔하지 않으면 판매가 쉽지 않다. 종이책으로 출간하기는 조심스러워서 전자책을 낸 다음 독자 반응을 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3일 만에 리디북스(전자책 대여·판매 사이트) 1위에 올랐다.
–공모전이나 신춘문예에 도전할 생각은 안 했나?
“내가 쓰는 장르(판타지)를 좋아하지만, 상 받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노력하면 상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거기까지 버틸 힘이 없었다. 상 받으려고 몇 년을 도전하고 기다리지 않나. 왜 떨어졌는지 말도 안 해주시는데(웃음). 자꾸 우울하기만 하고, 글은 점점 못 쓰고···. 악순환이 될 것 같았다.”
–대학 때 습작도 해본 적 없나.
“없다. 대신 재밌는 작품이면 만화책부터 드라마 대본집까지 가리지 않고 보면서, 내 방식대로 재미 분석을 했다. 캐릭터 이름이 언제부터 외워지는지, 두 줄짜리 문장이 몇 초 안에 머릿속에 이미지로 그려지는지. 수백 작품을 분석했다. 누가 시켜서 했으면 못 했을 것 같다. 나 혼자 재밌어서 했다.”
–만국의 직장인들이 오늘도 퇴사하고 꿈 찾아 나서기를 소망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퇴사 안 했어도 (책이) 잘됐을 수도 있다. 내 이야기가 ‘저 사람은 퇴사하고 모든 걸 다 걸었으니까 된 거야’ 이렇게 와전되지 않았으면 한다. 나도 이제 겨우 책 한 권 낸 작가고, 시작이며, 이게 다일 수도 있다. 지금은 뭔가에 도전할 때 처음 기회비용이 적게 드는 시대다. 텀블벅이나 유튜브처럼 잘 활용하면 모든 걸 걸지 않아도 시도해볼 만한 일이 많다. 아무 이력이 없는데 한 사람도 있지 않나(웃음). 옛날에는 어떤 일을 하는 데 큰 문이 하나 있었다면, 지금은 그 옆에 조그만 문이 많이 뚫려 있다고 본다.”
–넷플릭스, 유튜브 시대다. 여전히 책이 주는 힘이 뭐라고 보나.
“소설 쓰면서 ‘이걸로는 밥벌이가 안 될 것 같다, 잊고 살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이런 내용이 나온다. ‘소설가들은 다른 사람들이 소설가 되는 걸 환영한다. 네가 좋은 걸 쓰면 나도 좋은 걸 읽을 수 있다.’ 이게 내게 주는 위로로 읽혔다. 책의 힘이 아닌가 싶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가.
“어차피 완벽한 책은 만들지 못할 테니, 다른 사람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 있게 쓰고자 한다. 내 취향대로 쓰다 보면 나랑 취향이 맞는 독자들이 좋아해주지 않겠나. 작가는 차고 넘칠 텐데, 나만의 장점이 뚜렷한 책을 만들고 싶다.”
[남정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