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힙스터? 한국 할매들, 글로벌 트렌드 열었다
한국 할머니 패션과 명품의 놀라운 평행이론
촌스러운 게 힙한 요즘 패션, 실용적이고 과감한 한국 할매 감성과 닮아
“디자이너 선생님, 혹시 우리 할머니 만났어요?” 한국의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왼쪽)와 프랑스 명품 베트멍 2019 봄/여름 패션쇼./인스타그램 |
시골 할머니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총천연색 꽃무늬 일바지(봄뻬바지)와 넉넉한 원피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와 샛노란 금붙이 장식. 게다가 꽃문양은 어찌나 다채로운지, 비슷한듯하면서도 결코 겹침이 없다.
한동안 ‘아재 패션’이 거리를 달구더니, 이제 ‘할매 패션’의 시대가 올 태세다. 할머니의 옷장을 뒤져 입은 듯한 옷과 소품이 패션계에 번지고 있다. 러시아 할머니의 스카프인 바부슈카가 힙합 가수의 머리를 장식하고, 할머니가 짠 듯한 뜨개(크로셰) 옷이 유행이란다. 그 중엔 우리네 할머니의 흔적도 있다. 한국 할머니의 정겨운 옷차림이 값비싼 명품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실제 우리 할머니가 즐겨 쓰는 소품이 해외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끈다.
어, 이 꽃무늬 우리 할머니 거랑 비슷한데...
데자뷔인가, 평행이론인가.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할머니의 차림새를 묘하게 닮은 옷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발렌시아가, 베트멍, 구찌, 사카이 등이 쏟아낸 큼직하고 선명한 꽃무늬 옷이 그것. 유럽을 기반으로 한 명품 업체들은 할머니의 벽지와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빈티지 꽃무늬라고 설명하지만, 아무리 봐도 기자 눈엔 한국 할머니의 옷과 겹쳐 보인다. 게다가 서로 다른 꽃무늬를 마구 겹쳐 입는 과감한 레이어링은 우리 할머니들의 전매특허 아닌가.
윗줄은 W매거진 화보에 등장한 시골 할머니(왼쪽)와 구찌의 최신 옷을 차려입은 배우 자레드 레토. 아랫줄은 발렌시아가의 싸이 하이 부츠(왼쪽)와 한국의 요술 버선./W매거진,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 매치스패션 |
심지어 요즘 일본 젊은이들에게 인기라는 요술 버선도 프랑스 명품 발렌시아가의 꽃무늬 싸이하이 부츠와 닮았다. 비단 기자만의 생각은 아닌지, 소셜미디어에서는 요술버선 사진 아래 #발렌시아가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도 발견된다.
억지스럽다고? 명품과 한국 할매의 평행이론은 앞서 세계적인 패션 잡지 보그도 언급한 바 있다. 2017년 73세 유튜브 스타 박막례 할머니를 소개한 패션 잡지 보그는 스위스 여행에서 입은 할머니의 빨간 우의 패션을 두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베트멍 패션쇼가 떠오른다고 했다. 또 다른 매체는 할머니의 꽃무늬 셔츠와 돌체앤가바나의 옷을 나란히 두거나, 할머니가 든 이마트 장바구니를 발렌시아가의 장바구니 가방과 배치해 평행이론을 입증했다.
진짜 한국 할머니의 스타일을 차용한 디자이너도 있다. 영국 브랜드 프린은 지난해 제주의 80대 해녀에게서 영감받은 패션쇼를 선보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온 한국 여성들의 강인함에 매력을 느꼈다"는 게 이유였다.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 라프시몬스는 한국 농촌 할머니들이 밭일할 때 쓰는 스카프가 달린 모자와 고무장화를 무대 위에 올렸고, 이스트팩과의 협업에선 ‘상주곶감’ 보자기가 안감으로 들어간 백팩과 슬리퍼를 내놨다. 직접 한국 할머니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한글로 선명하게 새겨진 ‘상주곶감’ 보자기는 우리 할머니의 것이 분명했다.
제주 해녀 할머니에게서 영감받은 프린 패션쇼(왼쪽)과 한국 농촌의 일 모자와 고무장화가 등장한 라프시몬스./각 브랜드 |
실용적이고 화려한 미감, 세계에 통하는 한국 할매의 ‘멋’
패션계가 한국 할머니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실용성. 한국 할매 패션을 보면 처음엔 촌스러움과 화려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양의 방대함에 놀라고, 다음엔 실용성에 놀란다.
신축성 좋은 폴리에스터로 만든 일 바지와 아코디언 주름 원피스는 언제 어디서 입어도 거침이 없고, 현란한 문양은 웬만한 오염에도 주눅 들지 않는다. 세탁기로 마구 빨아 널어도 금세 마르는 편의성은 어떻고. 게다가 대부분 옷과 소품은 재래시장에서 1만원 안팎이면 살 수 있다. 즉, 할머니 패션은 힘든 가사와 노동에도 취향을 놓치지 않은 할머니들의 연륜과 감각이 담긴 일상복이자 워크웨어라고 할 수 있다.
2017년 패션 잡지 보그는 스위스 여행 중 빨간 우의를 입고 스카프를 허리띠처럼 묶은 박막례 할머니의 패션(오른쪽)을 두고 베트멍이 떠오른다고 평했다./인스타그램 |
‘촌스러운 게 힙하다’는 요즘 트렌드에도 할머니 감성은 딱이다. 해외 패션쇼에서 한국 할머니의 흔적이 발견되기 시작한 최근 3~4년 사이, 명품은 고상함을 버리고 길거리 감성과 하위문화를 받아들이며 밀레니얼과 소통하기 위한 변신을 시도했다. 심지어는 못생긴 패션, 아재 패션 등 반(反) 패션이 유행으로 부상했다. ‘패션’이라 여겨지지 않았던 한국 ‘할매 패션’이 나서기 좋은 타이밍이다.
알고 보면 한국 할머니는 최고의 힙스터다. 70만 명이 넘는 랜선 손주를 보유한 박막례 할머니는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솔직한 모습으로 지지를 받는다. 특히 패션에 관해선 촌철살인 명언으로 가슴을 울린다. "뚱뚱하고 날씬해 뵈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 입으라"며 다양성을 포용하는가 하면, "이쁜 것은 눈에 보일 때 사야 해. 내년에는 없어"라며 계절에 안 맞는 원피스를 산다. 충동 구매가 심하다는 손녀의 지적에는 "내 돈 내가 쓰는디 뭐. 난 맘에 들면 안 입어 보고 사"라며 쿨 거래의 진수를 보여준다. 세상에 이보다 힙한 할머니가 또 있을까? 바로 우리 할매다.
[김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