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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접시가 비좁은 거대한 돈가스… 600g이 주는 배부른 행복

[정동현의 Pick] 경양식 돈가스


서울 마포 합정역 인근 '순진분식'의 '한 근 돈가스'(앞)와 '꼬꼬닭 떡볶이'./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요즘 유행하는 일본식 돈가스는 살이 두껍고 튀김옷이 얇으며 속이 핑크빛을 살짝 띤 채 촉촉하다. 살코기가 의미 있게 씹혀야 가성비가 좋다고 한다. 돈가스 맛은 튀김옷·소스·살코기로 이루어지는 세 겹의 구조에 달려있다.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면 맛 역시 균형이 깨진다. 고기를 얇게 저미고 튀김옷을 여름옷 입듯 가볍게 걸친 뒤 소스를 끼얹어 먹는 경양식 돈가스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경양식 돈가스는 고기가 얇아 못 먹던 시절의 추억 같지만 실제는 유럽에서 유래한 뼈대 깊은 음식이다. 오스트리아 슈니첼이냐, 이탈리아 밀라노의 코톨레타냐, 아니면 영국의 커틀릿이냐를 두고 돈가스의 기원을 추측하는 설은 많다. 어디건 간에 일본식보다는 경양식 돈가스가 원형에 가깝다는 건 확실하다.


서울 충정로 ‘호산나의정부부대찌개’는 예전에 먹던 경양식 돈가스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 중 하나다. 점심시간이면 인근 직장인들이 앞치마를 한 채 부대찌개를 끓인다. 사골을 우린 듯 뽀얀 육수에서는 잔잔한 감칠맛이 돌고 국산 스팸만 쓴다는 주인장의 장담답게 익숙한 모양의 햄이 국물에 잠겼다. 끓일수록 맛의 농도가 짙어졌지만 그렇다고 자극의 강도가 강하지는 않았다. 먹고 나면 물이 한참 당기는 다른 부대찌개와 달리 매일 먹어도 좋을 듯싶었다.


이 집 주인장의 또 다른 자랑은 돈가스다. 직접 고기를 두들겨 밑준비 한다는 돈가스를 거의 모든 손님이 먹고 있었다. 바삭하게 튀긴 돈가스에 소스를 흠뻑 묻혀 입에 넣었다. 옅은 갈색 소스에서는 토마토에서 유래한 듯한 신맛과 단맛이 느껴졌다. 소스가 적당히 스며들어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오이김치, 어묵볶음 같은 한국식 반찬을 곁들여 밥과 함께 돈가스를 먹었다. 마지막 한 점까지 맛이 다르지 않았고, 반찬도 버릴 것이 없었다.


광화문 SFC 건물 지하에 ‘이스트빌리지’라는 식당이 있다. 동촌(東村)을 영어로 옮긴 이름과 달리 투박한 한국 음식을 낸다. 한식이라고 하여 한복 입고 각 잡은 한정식류는 아니다. 옛날통닭, 골뱅이 파스타, LA갈비같이 요즘 한국인이 즐겨 먹는 음식이 주를 이룬다. 이곳의 주력은 첫째가 보리밥이다. 큼지막한 자기 그릇에 담긴 보리밥에 따로 나온 나물들과 고추장, 참기름을 넉넉히 부어 비볐다. 심심하고 절제된 맛은 여기에 없다. 입을 가득 채우는 무절제한 식욕과 극도로 치솟는 포만감, 육체 노동을 하듯 온 힘을 다 해 식사하는 에너지만 있을 뿐이었다.


접시 바깥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거대한 옛날돈가스도 마찬가지였다. 입자가 큰 빵가루를 사용해 튀김옷의 거칠하고 바삭한 식감을 극대화했다. 고기의 두께도 일식 돈가스에 뒤지지 않았다. 땅콩과 당근같이 식재료가 그대로 남은 소스는 이 식당이 지향하는 굵직한 선을 그대로 따라갔다.


마포 합정역 근처로 가면 ‘순진분식’이 있다. 이 집 주인은 식사를 하면 무조건 배가 터질 듯 불러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듯싶었다. 대식가가 아닌 이상 그 어떤 메뉴라도 “양이 적다”는 불평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주력은 떡볶이다. 기본이 되는 ‘순진떡볶이’는 버너 위에 넓적한 냄비를 올려놓고 불에 끓여가며 먹는 종류였다. 떡볶이가 끓어 어느 정도 양념이 배면 깻잎을 듬뿍 올려 마지막을 장식했다. 가제트 팔처럼 긴 떡을 국수 먹듯 후루룩 삼켰다. 쫄깃하지만 부드러운, 모순된 식감에 떡 하나를 다 먹기 전에 다시 젓가락질을 했다. 어묵은 오래 끓여도 풀어지지 않았다.


이 집에서 단백질을 책임지고 있는 메뉴는 ‘한 근 돈가스’다. 말 그대로 고기 한 근, 600g을 그대로 써서 만든 돈가스는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고운 빵가루를 써서 바삭하게 튀긴 돈가스는 소스 없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소스를 부어 돈가스를 찍어 먹자 생각이 달라졌다. 맛이 농축된 소스만 돈가스 없이 먹고 싶어졌다. 붉은빛을 띤 갈색 소스에는 어떤 근심 걱정도 없었다. 돈가스 먹는 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처럼, 작은 기쁨으로 출렁이는 익숙한 행복이 있을 뿐이었다.


# 호산나의정부부대찌개: 부대찌개 8000원, 등심 돈가스 8000원. (02)313-1678


# 이스트빌리지: 옛날 돈가스 1만3000원, 보리밥 정식 1만2000원. (02)3789-0209


# 순진분식: 꼬꼬닭떡볶이 1만9000원, 한 근 돈가스 1만4900원. (02)6406-8989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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